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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24: 일본/사람들2007. 11. 8. 21:08

작년에 에티오피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이었다.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을 아디스 아바바에 하나 뿐인 한국 식당 '레인보우'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시간 맞춰 나갔는데 왠걸, 다들 30분 이상씩 지각을 하는 바람에 혼자 예약석에 멍청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각선으로 보이는 테이블에 정말 아무 대화도 없이 메뉴판만 들여다보며 앉아 있는 아시아인 둘이 있었다.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아니면 일본인인지 도무지 감을 못 잡았다. 그러다 일행들이 와서 왁자지껄 떠들면서 아무튼 실컷 먹고 일어나다가 대각선 테이블로 눈이 갔다. 일본인들이었다. 내 일행 중에 메뉴판만 읽고 있던 아시아인들의 일행을 아는 사람들이 있어 졸지에 서로 인사를 하게 됐고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짐을 싸기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떠나는 날 오전에 전화가 왔다.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주소만 들고 무작정 찾아 갔는데 거기에 그 아시아인 둘이 있는 거다. 세계 배낭여행 중인 일본인 여대생들이었다. 하나는 와세다대, 또 하나는 츠쿠바대에 재학 중이었다. 국제관계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는데 아프리카를 다 훑고 이제 중동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이야기 하던 중에 내가 유학을 준비 중인데 학교를 교토대에서 도쿄에 있는 곳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다, 도쿄에 어디가 내가 전공하려는 학교로 적당한 지 정보를 좀 달라, 이런 부탁을 하게 됐다. 대뜸 지금 다니고 있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을 추천해 주는 게 아닌가. 당시는 정말 듣도보도 못한 웃긴 이름의 대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강원도 화천으로 가서 산천어축제 홍보팀장으로 정말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지내면서 퇴근 후에는 유학 갈 준비를 했다. 남들은 몇 년을 준비해서 유학을 떠나는데 난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그간 준비한 교토대에는 못가게 되어 미안하다는 연락을 정중히 해 놓고 도쿄에 있는 학교를 거의 날마다 검색해서 결국 찾아 낸 게 신기하게도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이었다. 당시는 몰랐는데 내 지도교수는 위키피디아 검색으로도 튀어나오는 아프리카 전문학자이다. 한국에서는 발음하기도 힘든 이 학교가 일본에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다니는 명문학교라는 것도 오고 나서야 알았다. 분위기는 우리나라 카이스트나 포항공대 이미지다. 지도교수와 첫 면담하는 자리에서 바보처럼 이 학교가 그렇게 유명하다면서요, 이런 질문을 날렸다. 몹시 난처해 하면서 많이 유명하지, 이러시는 게 아닌가. 내 지도 교수는 정치하는 것도 싫어하고 학생밖에 모르는, 그냥 현대판 선비 이미지의 교수다. 이것도 다 내 복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 선배가 얘기하기를 내가 합격했다는 소식에 지도교수가 몹시 기뻐했다는데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지난 10월 31일이 입학금, 수업료 마감일이었다. 이 학교는 입학금 수업료를 좀 늦게내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버텼는데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다는 최후의 통첩이 날라왔다. 유학 와서 생활비 대느라 아주 정신이 없어 그냥 입학금 수업료는 남의 이야기처럼 살았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게 됐다. 동전까지 탈탈 털어 일단 입학금이 아닌 수업료를 먼저 냈다. 그걸 내면 이번 학기 수업료 면제 대상 심사를 받을 수 있단다. 그런데 사실 순서로 치면 입학금을 먼저 내야 말이 되는 거 아닌가. 아무튼 그냥 학교를 때려 칠 판이라고 생각해서 내 맘대로 그래버렸다.

지도교수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는데 뜬금없이 상담을 하고 싶으니 오란다. 뭐 때문일까 머리를 굴리다 갔더니 입학금 얘기를 하신다. 바보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그냥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그랬다. 그만 두면? 돈 벌어서 다시 오던지 아니면 뭐 다른 일을 해야겠죠. 지금까지 딴 학점이랑 아깝지 않아? 방법이 없네요.

10월 31일 오전에 다시 오라고 하셔서 갔더니 잔돈까지 딱 맞춰서 입학금 금액을 내 손에 쥐어주시는 게 아닌가. 일단 이걸로 입학금을 내고 그 다음을 생각하자고 그러셨다. 그러면서 입학금 내러 가면서 돈 잃어버리지 않게 가방에 잘 넣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난 또 바보처럼 그 앞에서 웃고 말았다. 하도 걱정을 하셔서 영수증을 들고 지도교수를 다시 찾아 갔다. 돈 잘 냈다고. 돈을 어떻게 갚을까요, 조심스럽게 여쭈었더니 통장으로 입금하면 수수료 드니까 매달 말일에 직접 10,000엔씩 갚으란다. 곧 받게 될 장학금 두달만 모으면 갚을 수 있다는 것 아실 텐데도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별로 부끄럽지도 않았고, 알았다고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자리를 떠났다.

교수한테도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고 나한테도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다. 그냥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부모님한테 받은 사람 같았다. 이 교수와 나와의 만남도 분명 인연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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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