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오순 2008. 2. 24. 00:37


에티오피아 다녀와서 파행을 거듭했던 영어 수업이 이제 끝났다. 바쁘고 아프고 이래저래 사연이 많았다. 오늘 수업에서 샘의 말씀은 구구절절 옳아 감히 금과옥조로 삼을만했다. 무엇보다 모국어가 탄탄해야 좋은 외국어 문장이 나올 수 있다는 말씀.

며칠 전 한국어를 일본어로 번역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나 받았다. 일본에서 취업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번역 내용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였다. 나이는 많지 않은데 이력이 참으로 화려했다. 중학교 때부터 유학으로 단련돼서 세계 문화와 일찍부터 교류했고, 경제관념을 잃지 말라는 부친의 가르침으로 10대 때부터 이미 주식투자와 펀드를 했단다. 외국에 개인 소유의 갤러리도 있고, 능숙한 영어로 유명인의 동시 통역은 물론 우리나라 유명 언론사의 뉴스 기사 번역 일도 전문적으로 하고 있단다. 이력서에 따르면.

다 좋다. 다 좋은데 아쉽게도 의뢰인은 자기 자신을 아주, 그것도 잘 소개해야 하는 자기소개서 마저도 모국어로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문맥이 엉성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말할 것도 없고 어휘력 부족 때문인지 단어 선택도 한참이나 미흡해보였다. 대학원까지 마친 사람이라는데 나를 살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영어는 얼마나 능숙한가 하고 같이 따라 온 이력서를 보는데 학교 이름조차 제대로 철자 체크를 안 한 건 물론이고 읽어보지 않아도 오타 때문에 읽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지금 살고 있는 같은 층에 중국 심양에서 온 조선족이 있는데 저녁에 같이 밥 먹다가 이 번역 얘기를 하게 되었다. 결론은 '모국어의 힘'으로 수렴이 되었는데 중국의 조선족들도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한단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어를 학교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학교 교육을 받은 조선족들 대부분은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를 할 줄 안단다. 그런데 문제는 중심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언어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중국 한족들과 이야기 할때는 중국어가 부족하고, 한국인과 이야기 할 때는 조선어로 안 통하는 이야기가 많고, 그러니 일본어는 말해 무엇 하겠느냐는 것이다.

새 정부가 영어주입식 교육을 강도 높게 추진하려는 분위기인데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은 입장이다. 도대체 말이 안된다. 모국어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는 걸 객국에 살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로 생활하던 사람이 외국어를 잘 하려면 무조건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 아무리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지 출처: 인터넷에 아직도 떠돌아 다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