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오순 2008. 12. 18. 01:27
하도 오랜만에 들어오다보니 비밀번호도 헷갈린다.

바야흐로 논문을 마무리해야 할 시절이 도래했다. 아주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일본에 유학을 왔으니 당연히 일본어로 논문을 써야하는데 상황이 그러지를 못하고 영어로 쓰고 있다. 올봄에 불기시작한 요상한 바람이 한몫을 단단히 했는지도...지도교수는 대 환영이란다.

'제미ゼミ'라고 하는 수업이 있다. 일본대학에서 세미나 형태로 진행되는 수업을 이렇게 부르는데, 소속된 제미에는 비슷한 연구주제의 학생들이 모인다. 내용은 제미마다 다르며, 보통 주(主)제미의 선생이 지도교수가 되는 시스템이다. 부(副)제미까지 두개의 제미를 듣는 학생들도 있는데 석사과정 학생에게 부제미는 의무가 아닌 옵션이다. 난 주제미 하나만 듣고 있다.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될 텐데 내 경우는 하나 더 듣는 제미가 별로 영양가가 없는 것 같아 부제미는 듣지 않았다. 내 주제미에서는 외부에 발표할 논문을 위한 리허설을 해보는 학생도 있었고, 책을 하나 정해 같이 읽을 때도 있었고, 쓰고 있는 논문에 관해 서로 토론을 주고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어로 토론한 걸 다시 번역해서 영어로 작업하는 게 번거로워 이번 학기에는 아예 제미에 나가지도 않고 있다. 그만큼 내 논문에 활발하게 코멘트를 해 줄 학생들도 없는 것 같고. 내 제미는 국제개발을 연구하는 학생들이 주이며 연구지역도 대개가 개발도상국이다. 내가 관심가지고 있는 것이 문화, 관광 쪽인데 개발학 쪽에 아직 문화, 관광이라는 이슈가 대세가 아니라서 그런지 발표를 해도 별 소득이 없어 제미를 포기해버렸다.

지도교수만 믿고 논문을 쓰고 있는데 신경에 문제가 생겨 현재 입원 중이시다. 기숙사에서 병원까지의 교통편이 안좋아 자전거를 타고 누워있는 환자를 찾아가 논문 지도를 받고 있다. 오른 팔 쓰는 게 힘들어 원고에 직접 체크를 못해주시는 상황인지라 마구 쏟아내는 일본어를 주섬주섬 담아 오는데, 돌아오는 발걸음이 항상 무겁다. 본인도 미안한 지 새벽부터 문자를 몇 개씩 날려주신다. 오늘 새벽을 여는 문자메시지는 "논문 쓸 때는 다들 불안해 해. 그러니까 그것으로 스트레스 받지 말고 쓸 수 있는 데부터 써서 마무리를 해 나가요.!!" 요거였다.

밤에 집중을 잘 하는 편인데 지난 달부터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위층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난다. 뭐가 부딪히는 것 같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 놈의 소리가 어떤 날은 1시간 정도 지속되기도 한다. 돌아버리겠다. 하도 짜증나서 한번은 위층에 전화를 걸었더니 주인이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 뗀다. 그럼 뭐냐고. 분명 위에서 나는 소리였는데...내 층은 방이 8개가 쭉 이어져 오다 2미터 정도되는 폭의 통로가 있고 다시 3개의 방이 이어지는 구조인데 나는 그 8번째 방에 살고 있어 옆집에 사람이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위니 범인은 그 인간인데.

오늘은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데 또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24시간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는' 수위실에 전화를 했다. 해결을 해달라고, 돌아버리겠다고. 누가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공부에 방해가 되니 조치를 취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다.

조금 전 수위실 아저씨가 다녀가셨다. 윗층의 어떤 여학생이 통로 쪽에서 후지산을 바라보며 줄넘기를 하고 있더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뛰어 올라가 그 여학생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었다. 한달을 넘게 날 괴롭힌 게 줄넘기였다니. 앞으로 다시는 거기서 운동하지 않기로 약속을 받았단다. 훌륭한 동문들이 지어준 폼나는 체육관을 곁에 놔두고 이 새벽에 줄넘기라니.

남의 나라 와서 논문 하나 쓰는 게 참 쉽지가 않다. 그래도 써야하니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