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24: 일본/사람들

수상한 식사초대

윤오순 2009. 9. 29. 08:24
영국으로 떠나기 전이라서 그런지 이런저런 식사모임이 많다. 일본에서 섬처럼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내가 떠난다니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놀라는 중이다. 어제 모임은 좀 웃기면서 특별했는데 처음에 나갈까말까 망설이다 결국 나갔다. 

올해 6월에 학교에서 장학생후보로 추천을 받아 그동안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마전 영국유학을 결정하면서 장학생 사퇴서를 제출했었다. 신청서 및 관련서류는 장학재단에 이미 보내진 상태지만, 면접이 10월이고 난 곧 떠나야하니 장학생이 되든 안되든 포기한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그 장학재단에서 선고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이번에 응모자들 대부분이 훌륭한 학생들이라서 면접없이 서류로만 장학생들을 결정했단다. 그리고 재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내가 평가가 제일 좋았단다. 한국인이 일본에 와서 아프리카쪽 연구를 하는 것도 참신한데 연구내용이 너무 유니크해서란다. 게다가 나의 수상한 이력 때문에 지금 한창 바쁠 때라 생각되지만 꼭 한번 만나고 싶으니 나올 수 있느냐고 묻는 게 아닌가. 처음엔 밥 사주지말고 그냥 돈으로 주시지, 라고 속물처럼 생각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 나갔고, 도쿄에 있는동안 내가 방문한 가장 좋은 호텔일 것 같은 곳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됐다. 

이사장은 91세의 할아버지에 이사는 거의 80에 육박한 할머니였다. 이 할머니는 40대에 접어들었을 때 10년간 돈을 벌어 50대에 미국유학을 다녀오신 재미있는 분이었다. 석사부터 박사까지 미국에서 하셨다는데 박사논문 제출까지 무려 8년이나 걸렸다며 이야기내내 오랜 미국생활을 자랑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물론 나에 대한 무한애정을 드러내시며 마치 나를 당신의 손녀처럼 대해주셨다. 작년에 (럭셔리) 크루즈에서 만난 이 분들이 장학재단을 하나 만들자 의기투합을 했고, 올해 첫 결실을 맺은 거였는데, 내가 당신들의 장학재단 첫 장학생이 되지 못하는 게 몹시 아쉬워 식사초대 계획을 세웠단다. 어르신들이 연세에 비해 피부도 팽팽하고 아주 건강해보였는데, 그 이유가 돈 덕분인지 이분들의 건강한 삶 덕분인지 헷갈렸지만 나도 나이 들어 이분들처럼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학재단의 룰이 장학금은 일본에서 거주하는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거라 나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내가 가는 길을 당신네들 방법으로 응원하고 싶단다. 그래도 어차피 결정된 거 주시지, 라고 내 속마음을 드러내고 싶었는데 결국 잘 참았고, 내 코가 석자인데 앞으로도 공부만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 많이 지원해주셨으면 한다는 당부말을 날리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림자처럼 내가 모르는 자리에서 내 삶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이 두 분도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여자분은 어제가 첫 만남이었는데 돌아가실 때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책을 나한테 다 줄 테니 좋은 곳에 써 달라신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내 인생이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때문에 요즘 내 마음이 정리가 잘 안됐었는데, 우울할 틈도 불안할 틈도 없이 난 그저 닥치고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