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24: 영국/영국유학이야기

영국의 의료 서비스

윤오순 2011. 3. 26. 07:16
작년 여름 한국에 가면 눈치료를 제대로 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비행기표를 끊기 전 문제가 생겨 영국에서 어쩔 수 없이 응급처치를 해야했다. 병원에 가기 전 혼자 바짝 쫄았는데 현재상태가 그리 심각한 게 아니니 다녀올 때까지 괜찮을 거라고 해서 일단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에 갔다.  도착 후 바쁜 일들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귀국을 얼마 안 남겨놓고 안과에 들렀다. 의사한테 그간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모국어로 된 진찰결과를 속시원히 듣고 싶었다.

그런데 의사는 내가 자기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무슨 볼일을 보는지 나를 아는 척도 안하는 거였다. 급한 일도 없어 그냥 무작정 기다렸는데 한 20분쯤이 지났나 드디어 끝났는지 몸을 내쪽으로 돌리며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대뜸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가끔 눈 주변에 뭐가 생겨서 불편한데 일본에서도, 영국에서도 이유를 모른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왔다고 그랬다. 내 얘기를 들은 의사는 화장실 변기보다 더 더럽다는 키보드를 내가 본 것만해도 20분 넘게 주물럭거리던 그 손으로 예민하기 이를데 없는, 문제가 있다고 한 내 눈을 그냥 들여다 보는 거였다. 의사가 그렇게 개념이 없어서야 원. 거기다 한술 더떠 이런 건 병명이 이러저러한데 어떻게 넌 네 병명도 모르면서 의사를 찾아왔느냐고 언짢아했다. 아주 지랄이 풍년인 의사였다.

오늘 에티오피아 가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안과에 다녀왔다. 내 주치의가 이미 예약이 꽉차 돌봐 줄 수가 없다고 해서 응급센터를 찾았는데 의사가 엄청 친절해 까딱 잘못했다가는 그 앞에서 울 뻔했다. 손을 수시로 닦는 건 물론이요 허리춤에는 아예 손세정제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영국에서 만나는 오랜만의 친절이었다.

영국은 알다시피 의료비가 무료이다. 대신에 많이 기다려야한다. 2009년 10월에 영국에 도착해 뭐가뭔지 정신도 못차리다가 생활에 적응할 때쯤 눈이 다시 불편해져 학교 구내병원을 찾았다. 접수창구의 아줌마는 당장 거기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치료가 가능한 후보 안과 리스트를 내 주소로 보낼 테니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리스트는 빨리 오지 않았다. 후보 안과 리스트를 받은 후 그 중의 한 병원에 연락해 내가 직접 예약을 했다. 안과에서는 언제까지 어디로 오고 못 올 경우 꼭 취소를 하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내게 보내줬다. 그걸 들고 병원에 가야했다.

연말쯤 학교 구내병원을 처음 찾았고, 그 사이 긴 겨울 방학/휴가가 있었고,  예약에 필요한 서류들을 기다려야했고, 예약후 내가 최종적으로 병원에 간 게 작년 4월이었다. 응급환자는 병 때문이 아니라 기다리다 지쳐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과의 내 주치의(영국에 머무는 동안 눈에 관한한 이 사람이 내 담당이다. 어느 병원에서 검색해도 이 사람 이름이 뜨고, 이 사람이 그동안 치료한 내역을 다른 의사가 볼 수 있었다.) 는 영 익숙해지기 힘든 스코틀랜드 악센트의 영어를 구사하며 내가 그 사람 말에 집중을 못하게 하는 것 빼고는 한마디로 무난한 의사 선생님이었다. 무뚝뚝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않은 사람을 만나기가 더 힘드니 그런 건 흠도 아니었다. 치료 후에 처방전을 들고 아무 약국에나 가 NUS (National Union of Students)가 적힌 학생증을 제시하면 약도 공짜였다. 오래 기다려야했지만 나같은 가난한 유학생들한테는 이만저만 고마운 일이 아닌 영국의 의료 서비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1월말쯤 다시 안과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상담창구에 전화를 했다. 지금 예약을 해야 적어도 3월쯤 치료를 받고 그 후에 에티오피아를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미 4월까지 예약이 꽉차 있으니 응급센터를 찾아가라고 했다. 응급센터는 숨넘어가는 사람만 가는 곳인줄 알았는데 나도 해당되느냐고 했더니 그게 현재로서는 제일 좋은 방법이고 거긴 예약이 필요없다고 했다. 기다릴 필요없이 가면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가서 바로 치료를 못 받으면 어쩌나 하는 스트레스를 거의 두달 동안 받았다. 그러다  결국 도저히 못 버티고 오늘 다녀왔다. 전부 기우였다.

응급센터에 도착해 접수를 하고 앉아 있었더니 간호사 하나가 와서 뭐 때문에 왔느냐고 물은 후 바로 안과 의사를 연결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사정이 다급하면 이런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담당 의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치료받은 후 당분간은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심각한 것 같지 않은데 왜 오늘 응급센터에 왔느냐고 해서 곧 현지조사를 떠나 당분간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했더니, 어디로 가느냐, 무슨 공부 하느냐, 재미있겠다, 이 병원의 의사 하나도 지금 에티오피아에 파견나가 있는데, 하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듯이 해줬다. 검사하는 내내 생글생글 웃어줘서 기분이 좋았는데 치료가 다 끝난 후 네가 하는 여행에 행운을 빈다고 격려까지 해준 덕분에 집에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완전 봄이었다. 몇달 눈 때문에 영 찜찜했는데 오늘은 잠을 아주 잘 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