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말 업데이트
1.
어제 아침 엑시터에 소낙눈이 내렸다. 자목련이 개화준비를 '완전히' 마친 이 시기에 말이다. 좀 이른 시간이었는데 한 시간쯤 내렸나? 이게 눈일까 꽃가루일까 궁금해하며 창밖을 지켜보다 검색신공을 발휘했지. 눈이 맞댄다. 소낙눈을 보니 일본 유학시절 봄이 되면 학교 앞 가로수길에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내리던 풍경이 떠올랐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 궁금한 분들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 (4月物語)>를 감상하시라. 주인공 우즈키가 자전거를 끌고 내려오던 나선형 육교가 내가 다니던 학교 정문에서 아주 가깝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무사시노(武蔵野)나 학교가 있는 쿠니다치(国立)가 그리 멀지 않고, 영화 속의 꽃비 풍경이 딱 내가 기억하는 4월의 일본이다.
2.
한국에서 비가 오는 날이면 잊지 않고 챙겨먹는 음식이 있었으니 바로 짬뽕과 부침개. 이상하게 그런 날 얼큰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이 땡기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유학을 왔다지만 맛에 관한 취향은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비가 올 때면 그 놈의 짬뽕과 부침개 때문에 한국을 몹시 그리워하곤 했다. 대방역에서 여의도 가는 버스 정류장 맞은 편 중국집이 내가 자주 찾던 곳이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 집은 배달을 안 해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가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 가끔 머리카락도 나오고, 뭐 딴 것도 나온 적이 있지만 난 그집 짬뽕과 일반짜장을 아주 좋아했고, 비가 많이 오던 날의 일본, 영국, 에티오피아에서 몇천원 안되는 그 짬뽕이 많이 생각났었다. 유학 초창기 여러 사람이 부엌을 공유해야할 때 냄새 피우는 음식은 하기를 꺼려 비 오는 날이면 대개 도너츠 가게에 가서 도너츠 몇개를 사먹는 걸로 향수병을 달래곤 했었다. 스튜디오로 이사 오고 이것저것 요리를 하면서 부침개 정도는 금방 해먹을 수준이 되었지만 짬뽕만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비 오는 날 짬뽕이 너무 먹고 싶어 구글 이미지를 정말 한시간도 넘게 넘겨보다 드디어 그 미지의 영역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거창하게 고추기름 내고 뭐 그런 건 안했다.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냈고, 슈퍼에서 파는 냉동모듬해물(오징어 다리, 새우, 홍합이 들어 있음), 양배추, 양파, 파, 버섯 같은 재료들을 털어 넣어주었다. 나중에 고춧가루를 조금 풀었지만 미리 쌈장을 한스푼 넣었고, 화룡점정의 의미로 남은 라면 스프를 넣어 짬뽕국물을 만들었다. 역시 맛의 완성은 MSG라고 해야 하나. 맛이 아주 비슷해졌다. 짬뽕면은 스파게티 면을 사용했다. 국물 내는 동안 면을 삶아 주고 적당할 때 건져내어 미리 만들어 놓은 국물에 투척. 유학생표 짬뽕이 드디어 탄생한 것이다. 거의 날마다 비가 오는 영국에 살면서 이곳에서의 유학생활은 짬뽕과 부침개와의 사투라고 혼자 생각했는데 이제 드디어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3.
패자부활전을 구경하기 힘든 나라에서 한방에 훅 가면 재도전할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최근 잇달아 어그로 관리에 실패한 사람들의 사례들을 보면서 트위터 계정을 아예 없애버렸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가끔 가서 뉴스도 챙겨 읽고, 거기서 놀면서 친구들도 만들었는데 네임드들의 '민낯'과 소모적인 논쟁에 정이 딱 떨어졌다. 포털은 작년 대선이후 안들어갔고, 이제 뉴스도 잘 안챙겨보니 한국사회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새 대통령이 선거운동 할 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모르겠고. 뭐 별로 크게 기대도 안하지만 말이다.
4.
난 종교나 인종, 국적 등에 큰 편견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인도, 파키스탄 사람들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많이 가지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게 자꾸 쌓이니 개인의 일인데도 그 나라 전체로 이슈를 확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대표적인 게 거짓말. 들킬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완전 돌아버릴 지경이다. 내가 일본에서 만났던 애들도 그랬고, 에티오피아, 영국에서 만났던 애들도 그렇다. 전에 같이 일했던 인디언 친구에 관한 일이다. 밤 늦게 보스가 어디를 둘러보라고 연락을 했다고 해서 시키는대로 다하고 짜증 내는 메일을 보스에게 보냈다. 난 여자고 밤늦게 그런 일은 부탁 안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보스가 깜짝 놀라며 자기는 그런 일 내게 시킨 적이 없단다. 그리고 부탁을 할 거면 내게 직접했지 왜 남을 통해 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 후의 연속되는 거짓말에 비추어보면 그 인디언 친구가 나를 속였던 게 분명하다. 물이 샌다고 학생이 급하게 와서 방을 둘러보는데 천장도 아니고 문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상해서 윗층으로 올라갔더니 인디언 아가씨가 남자친구랑 화장실에서 딴짓을 오래했는지 카펫이 흥건할만큼 물이 넘치는 중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자기네들은 몰랐다는데 할말이 없었다. 설비담당하는 분이 지나가는 말로 그런다. 인디언 애들의 거짓말은 역겹다고. 뭐 난 그러려니 했다. 문옆에 달아놓은 우편함 열고 닿는 소리가 들려 누가 불만을 제기하나보다 싶어 열어봤더니 쓰레기가 한가득이었다. 어떤 미친새끼야, 하면서 쓰레기를 조사하는데 멍청한 친구가 인디언음식 배달시킨 영수증을 거기에 그냥 쓸어넣었던 거라. 느낌이 확 오는 놈이 있어 난 바로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다른 사감이 영수중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그 놈이었다. 자기 영수증은 맞는 데 자기가 한 짓은 아니란다. 결국은 잘못했다, 다음부터는 안그러겠다고 해서 마무리를 했는데 이런 개차반들이 그 나라에 돌아가 몇십년 후 오피니언 리더나 장관내정자가 되어 순진한 사람들을 호도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확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