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오순 2013. 4. 29. 22:19

생판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 가장 걱정되는 게 숙소와 먹거리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예약할 수 있는 사이트가 많아 숙소의 경우 예약을 하고 떠날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도착해서 구해야할 경우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숙소는 정말 운에 맡겨야 한다. 근사한 사진들로 꾸며놓은 홈페이지를 보고 실물도 그럴 거라 예약하면 실패할 공산이 크다. 별 네개짜리 호텔을 예약했는데도 막상 현지에 도착해 후회막급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물이 귀해 탱크에 받아놓고 사용하는데 물탱크 청소를 제대로 안해 일주일 내내 냄새나는 물을 사용해야했을 때라던지, 체인 스모커가 방금 떠난 방이라 머무는 내내 담배 냄새로 고생을 해야한다던지...거세게 항의를 해도 대개는 이미 방이 차서 옮길 방이 없고, 환불도 안된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먹거리의 경우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정보를 가지고 있어도 운에 맡겨야한다. 한국 비빔밥이 밖에 많이 소개되었어도 막상 외국인이 한국에 가서 먹게 되면 복불복인 거와 마찬가지다. 게다가 말도 안 통하는 곳에 가면 원하는 걸 설명하기도 어려우니 주는대로 먹을 수밖에 없다.


작년 크레타에 갈 때 내가 가진 정보는 <그리스인 조르바>, 달랑 그것 뿐이었다. 학회가 끝나고 여행일정이 있었지만 상황봐서 그냥 호텔에서 쉬어야지 하는 생각도 있어 깐깐하게 여행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내에 정보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건 내 꿈이었고, 다행히 옆자리에 앉은 부부 덕분에 꼭 챙겨먹을 음식들 목록은 만들어볼 수 있었다. 대신 난 그 사람들이 몇년간 여행하면서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다 봐줘야했다. 짬짬이 자식자랑, 사위자랑도 들어줘야 했고.


막상 도착한 크레타의 수도 헤라클레온은 좀 황량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어딜 가서 허기를 채우나 둘러 보다 어느 골목에 접어 들었다. 그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이 딱 한군데 뿐이어서 그 앞에서 얼쩡거려봤다. 나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말고는 아는 그리스어가 없었고, 식당 주인도 할 줄 아는 영어가 없는 눈치인데 이상하게 그곳이 끌려 아무 데나 자리를 잡았다. 엄마랑 아들이 번갈아가며 메뉴판을 가지고 오는데 좀 당황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허나 앉았다 그냥 일어나기도 뭐해 기내에서 부부에게 들었던 크레타 음식이름을 몇개 얘기해줬다. 두 사람들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테이블 한가득 음식들이 나왔는데 돼지고기 요리도 있었고(밥이 있으면 맛있게 먹었을 음식인데 그냥 먹기에는 너무 짰다.), 달팽이 요리도 나왔다. 빵요리도 있었고, 샐러드 요리도 있었다. 아주머니가 샐러드, 라고 직접 물어보셔서 반가운 마음에 시켰는데 큰 볼 한가득 크레타 스타일 샐러드가 나왔다. 와인도 한 잔을 시켰는데 유리주전자로 한가득 담아 오셨다.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걸 다 먹을 수는 없었다. 내 옆에 뒤늦게 자리잡은 프랑스 그룹도 나랑 사정이 비슷해 보여 내 자리에 온 음식들을 절반씩 덜어 그 자리로 넘겼고, 그 사람들도 괜찮다고 몇번이나 거절하는 내게 자기네가 주문한 음식들을 큰 접시에 담아 보내줬다. 환할 때 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사를 끝냈을 때쯤 밖은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계산을 하려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잠깐만 기다리란다. 유명한 그리스의 가정식 디저트가 연이어 나왔다. 메인 요리는 배가 불러 다 못 먹었는데 서너가지의 그 달달한 디저트는 다 먹을 수 있었다. 계산할 즈음 주인아저씨가 어딘가에서 오셨고, 짧은 영어로 네가 여기 문화를 잘 몰라 이것저것 많이 시킨 것 같은데 남김없이 다 먹은 샐러드 값만 내고, 나머지 음식은 자기 집에 온 손님한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겠단다. 내가 와인도 시켰고, 디저트도 너무 맛있게 먹어서 값을 드리고 싶다고했더니 그걸로 충분하다면서 받지 않으셨다. 


크레타에 일주일 머물면서 그 집을 자주 갈 기회는 없었다. 학회장소가 호텔이랑 떨어져있었고, 대부분의 식사가 다른 곳에서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는 날 비행기를 타기 전 시간이 남아  그 집에 잠깐 들러 그릭 스타일 커피와 디저트를 다시 대접받았다. 내가 커피관광을 공부하는 사람인데 그릭커피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느냐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친히 부엌으로 초청을 해주셔서 '레알' 그릭커피를 구경해볼 수 있었다. 다시 크레타에 올 기회가 있으면 그 집에 들르겠다고 했지만 그럴 날이 내 인생에 또 있을까, 싶다. 그리스 샐러드를 만들려고 수퍼에서 두툼한 페타치즈를 살 때마다 그 골목식당 가족들이 생각난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으니 그렇게 우연히 우린 만났을 테지. 크레타에서 처럼 아무 준비없이도 그렇게 잘 챙겨먹고 온 여행이 있는 반면에 준비를 잘 하고도 정말 쫄쫄 굶고 여행을 하게되는 경우도 있으니 여행엔 정답이 없다는 게 정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