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24: 한국/2014

늙음에 대한 존경이 없는 시대에

윤오순 2014. 4. 23. 23:47

나이가 나 보다 서른 살, 마흔 살 이상 차이 나는 친구들이 여럿 있다. 한국인도 있고, 외국인도 있는데 그 중 두 명과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려 한다.


2008년이었던 것 같다. 에티오피아 볼레공항에서 두바이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에 오사카 대학의 노교수님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나는 두바이에서 간사이, 간사이에서 다시 도쿄행 비행기를 타야했지만 어쨌든 간사이까지는 교수님과 같은 비행기를 탈 판이었다. 탑승수속을 각자 한 터라 좌석은 떨어져있는 상태였고, 우린 탑승 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교수님은 최근 교토대학과 에티오피아 관련 공동연구를 진행하게 되었고, 이번에 현지조사차 방문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탑승 전 교수님이 일본인답지 않게(?)아주 친한 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연은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나와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시는 교수님을 위해 나는 승무원에게 '엄만데 좌석이 떨어져 있으니 같이 앉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승무원의 배려로 우린 간사이까지 오는 동안 붙어 앉을 수 있었고 나는 싱글인 여자 교수의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연구이력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짧은 인연을 계기로 우린 친구가 되었고, 나는 도쿄에서 그분은 나라에서 이메일로 서신을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다. 교수님은 한국인 친구들이 보냈다며 된장같은 한국음식을 얼음팩이 들어있는 택배서비스로 보내주시기도 했고, 학회에 참여해 나를 아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있으면 꼭 내 안부를 물으신다는 이야기를 다른 연구자들에게 들었다. 나라에 자주 놀러 오라고 하셨는데 일본에 있는 동안 갈 기회를 못 만들었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도 이메일은 주고 받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뜸해졌고, 이제는 완전히 끊어졌다. 돌아가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도쿄에 사는 친구에게 들었는데 연락할 방법이 없다. 세대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들은 연락이 뜸하면 대개가 그렇다. 한국산 홍삼절편을 유난히 좋아하셨는데 광고에 홍삼제품들이 나오면 그 교수님 생각이 많이 난다. 


2011년에 에티오피아에서 현지조사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와 엑시터가 아닌 워릭이라는 곳에 잠깐 머문 적이 있다. 한국인 가족이 사는 집이었는데 당시 한국에 사시는 할머니가 방문 중이었고, 할머니 덕에 머무는 내내 손수 담그신 김치와 함께 집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커피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셔서 아침 일찍 일어나 나는 빨래를 돌리고 할머니는 아침식사 준비를 하실 때 가끔 이야기꽃을 피울 때가 있었다. 워릭이 엑시터 보다 위쪽에 있어 이왕 올라 온 김에 여행이나 하고 가자고 생각을 했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워릭 근교로 혼자 여행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옥스포드에 한번 가보자고 마음을 먹었고 가족들에게 '오늘은 옥스포드에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도 혼자 갈 생각이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아들과 손녀들이 할머니께 뜬금없이 "옥스포드 가 본 적 있지?" 이렇게 물었고, 할머니는 "캠브리지였지!"라고 강조하시는 게 아닌가. 대화는 금새 "그럼 같이 가."(가족들), "그러세요."(나)로 이어졌고, 그러나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이랑 여행가면 피곤하지. 혼자 잘 다녀와요."(할머니)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래서 난 당연히 할머니는 안 가시는 줄 알았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나오는데, 그 사이 아들은 우리 둘의 옥스포드행 기차표 예약을 마쳤고, 가면 꼭 볼 것들에 대한 자료까지 칼라 프린트를 해서 유용할 테니 잘 챙기라고 주는 게 아닌가. 할머니는 벌써 여행준비를 끝내고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할머니는 정말 잘 걸으셨고, 옥스포드 시내 여기저기를 걸으면서 우린 오랜 친구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우리가 다시 또 언제 만날 기회가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했고, 80이 얼마 남지 않은 그 할머니와 그날 나는 친구가 되었다. 


다시 못 만날 거라는 기대와 달리 작년 겨울 2년만에 대전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났고, 그날 긴 이야기는 못 나눴지만 그 후 우린 간간이 메일이나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사이 눈 수술을 하셨고, 검진을 위해 서울을 방문할 계획인데 자녀들이 전부 직장생활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오신다고 했다. 서울 간다면 바빠도 내가 나올 것 같아 그동안 연락을 안했는데 시간되면 보자고 하셔서 반가운 마음에 나갔다. 할머니는 검진이 끝나면 절에 들르신다며 무거운 보따리를 하나 메고 오셨는데 뭐냐고 여쭸더니, 쌀을 사면 늘 맨 처음 한 주먹은 따로 덜어 모아 놨다가 절에 가져가시는데 가방 속에는 그 쌀이 들었다고 하셨다. 자녀분들이 다 잘된 게 이 쌀 덕분이냐고 했더니 그런 건 아니고 우리나라 엄마들은 다들 당신들 방식으로 그렇게 나름의 기원을 할 거라고, 그리고 본인은 그렇게 하면 전생의 나쁜 업이 소멸될 거라는 믿음에서 젊을 때부터 그렇게 해오셨다고 하셨다. 문득 요즘 우리가 잃고 있는 게 쌀자루에서 첫 쌀을 한 주먹씩 덜어 모아 기원을 하는 이런 마음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검진을 하는 동안 주변 맛집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고맙게도 바로 피자를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늘 댁에서 밥을 드실 테니 색다른 음식을 대접해드리고 싶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고민 중이던 차였다. 피자와 덤으로 스파게티, 커피까지 풀로 먹고 마시며 우린 지난 이야기를 오래오래 했다. 할머니는 무릎도 아프고, 귀도 잘 안 들리고, 앞으로 얼마나 살 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다.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안전하지않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증명이 되었으니 누구를 만나도 이 만남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해주고, 좋은 음식 먹으면서 좋은 이야기만 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말씀 드렸고, 할머니도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하셨다. 연락오지 않는 오사카 교수님처럼 이 분도 어느 순간 연락이 끊어질 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까지는 내가 동년배 내 친구들을 떠올리면 언제나 마음이 푸근하듯이 그렇게 마음 푸근한 친구로 오래 우정을 잘 쌓았으면하는 바람이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표현이 있다. 늙음에 대한 존경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살다보니 이 속담이 더 와 닿는다. 내가 만일 80까지 산다면, 그 나이에 아무것도 바라지않고 순수하게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젊은 친구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과연 있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