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24: 네팔/사람들2016. 2. 18. 23:19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2013년 한국의 국제협력단(코이카, KOICA)과 성공회대학교가 ‘대학을 통한 민간협력사업’으로 설립한 사회적기업 활성화센터(Social Enterprise Activation Center, 일명 ‘SEA센터’)라는 곳이 있다. 


2015년 1월에 파견되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네팔 남자 평균보다 키가 훌쩍 큰 수련 씨(당시 나이 50세, 본명은 ‘수련 아자리’인데 한국에서도 네팔에서도 다들 ‘수련’이라고 부른다고 했다)를 센터에서 우연히 만났고, 그분이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귀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2000년대 초반 지방의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약 3년 정도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일명 ‘불법체류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아시아의 이주 노동자들이 그들의 고향에 돌아가서 과연 어떻게 살까?’ 늘 궁금했었다. 수련 씨를 설득해 인터뷰에 성공했고, 혼자만 알고 있기는 아쉬워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는데 지진이 나는 바람에 늦어지고 말았다.


수련 씨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네팔에 머무는 동안 귀환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 그분들이 사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수련 씨만 소개하지만 기회가 되면 다른 분들 이야기도 소개하려고 한다.


지난 네팔 지진 피해 지역 중에서 언론에 가장 많이 소개된 곳 중 하나가 바로 ‘고르카(혹은 구르카, Gurkha)’ 라는 곳인데, ‘구르카 용병’으로도 유명한 바로 그 지역이다. 


구르카 용병은 선발 기준이 몹시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현재도 영국, 인도, 싱가포르 군대에서 네팔의 구르카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다. 내가 만난 귀환 이주 노동자 중에 구르카 용병 출신이 여럿 있었는데 수련 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수련 씨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한 경비업체의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다. 소속 직원이 약 700명 정도 되는 그리 작지 않은 규모의 회사로, 씨센터의 경비도 수련 씨가 소개했다고 한다. 인터뷰는 내가 일하는 센터에서 진행했다.


수련 씨는 걸프전 참전으로 이라크에 갔다가 거기서 1년 정도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캠프에서 한국인을 만났고, 한국에 대해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수련 씨는 한국에 직접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용병 임무가 끝나자마자 집안 사정으로 한국으로의 이주 노동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한국에 이주 노동을 하러 가려면 한국어능력시험(일명 EPS시험)에 통과해야 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어 시험 없이도 한국에 갈 수 있어 준비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2001년 3월 7일 수련 씨는 드디어 한국에 도착한다. 수중에 18만 루피(한화로 180만 원 상당)가 있었고, 한국에 체류하는 데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산업연수생 비자를 가지고 있었다.


“비행기는 그때 처음 타신 거 아니죠?” 라는 질문에 “용병 생활 하면서 이스라엘, 영국, 태국,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등에 체류한 적이 있고, 유고슬라비아, 터키, 사이프러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요르단 등지를 여행한 적도 있어 비행기 여행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요.”라고 하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2000년대 초반에 네팔 사람이 여행을 해봐야 얼마나 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이 주최하는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대전의 신탄진으로 이동, 파란만장한 수련 씨의 이주 노동자 생활은 시작된다.


수련 씨의 한국에서 첫 직장은 신탄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이었고, 거기서 연수생 비자가 끝날 때까지 3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첫 월급으로 110만 원을 받았고, 신탄진을 떠날 때쯤에는 150만 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연수생 비자가 끝나고 본격적인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면서 수련 씨는 파주로 이동한다.

“한국말을 금방 배워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파주에서 머물렀던 열흘 동안 정말 나쁜 일을 했어요. 휘발유를 훔쳐다가 길거리에서 파는 일을 했거든요. 남의 나라까지 와서 그런 일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해서 다시 이주한 곳이 한국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보성의 양계장이었다. 차밭으로 유명한 그 보성이다. 네다섯 명이 해야 하는 일을 혼자 척척 해내고, 기계 고치는 일까지 해버리니 양계장 사장은 수련 씨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 양계장에서 키우던 닭이 10만 마리가 넘었는데, 나중에 일머리를 알게 되니 사장이 중요한 일까지 다 맡겨 그 양계장에서 무려 7년을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휴가도 없이 매일 20시간을 넘게 일했다고 하니 그 고충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그렇게 일한 덕에 양계장에서 첫 월급으로 190만 원 정도를 받았지만, 보성을 완전히 떠날 때 수련 씨의 월급은 27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2만 평이 넘는 규모의 양계장은 총 22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병아리부터 토종닭까지 닭을 키워 양계장에서 직접 팔기도 했고, 장에 내다 팔기도 했는데 그 일이 전부 수련 씨 몫이었다고 한다.


물론 닭똥을 치우고, 닭을 잡는 일까지도 수련 씨가 할 일이었다고 한다. 수련 씨가 일을 워낙 잘해서 당시 보성 인근에서 ‘네팔 사람, 수련’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수련 씨에게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고 물었다. “재미있어 보였어요. 제가 걸프전 참전 때문에 스위스에서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의 스위스보다 한국의 첫인상이 저는 더 좋았어요.” 라고 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이 수련 씨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한국 떠나오고 나니 아쉬운 점 같은 것 없으셨어요?”라고 물으니 “일할 때 일 열심히 했고, 놀 때 열심히 놀아서 별로 아쉬운 점은 없어요.”라고 했다.


한국에서 좋았던 점으로 남을 친아들이나 딸 같이 가족처럼 잘 대해주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들었다. 2003년에 아직 합법적인 비자가 5개월 남았을 때 수련 씨는 네팔을 한번 방문했었다고 한다. 한국의 겨울이 너무 추웠고, 힘든 일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당시 모아놓은 200만 루피 상당의 돈을 들고 네팔에 돌아갔었다고 했다.


아내와 가족이 그동안 보내준 돈으로 땅도 사고, 금붙이도 사모았으니 이제 다시는 떠나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결국 다시 한국에 가게 되었고, 수련 씨가 10년간의 이주 생활을 청산하고 완전히 네팔로 귀국한 것은 2010년 4월 14일. 양계장 사장은 귀국을 말렸지만, 수련 씨는 빨리 네팔에 돌아가 한국에서 경험한 것들을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고 한다.


“2010년 4월에 여기 카트만두 도착했는데 먼지도 너무 많고,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10년을 떠나 있었는데 나라가 하나도 바뀐 게 없잖아요. 그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노인들이 대중교통에 무료로 승차하고, 연금이나 농협의 편리한 시스템, 농촌의 퇴비 만드는 방법 같은 것들을 네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주고 싶었어요. 친척들이나 국회의원들, 만나는 사람들한테 우리도 한국처럼 해야 한다고 많이 소개했는데 안 먹히더라고요. 제가 이런 걸 빨리 알려주고 싶어서 네팔에 왔는데 말이죠.”


이 이야기를 하면서 수련 씨는 많이 아쉬워했다. 네팔에 도착하자마자 카트만두에서 오토바이로 한시간 거리의 시골에 농사지으면서 염소도 키우고 싶어 철망을 만드는 등 3~4개월 준비를 했는데, 그때쯤 친구들 6명과 의기투합해 지금의 경비업체를 만들게 되었고, 농사일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양계 기술이 있으면서 왜 네팔에서 써먹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닭은 이제 쳐다도 보기 싫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수련 씨는 이제 나이 50이니 앞으로 5년 정도 더 경비업체 일을 하고 은퇴할 예정인데 가족들과 한국에 여행을 갈 계획이고, 가게 되면 보성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다.


네팔의 귀환 이주 노동자들이 모두 수련 씨처럼 잘 정착해 사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거라 생각하는 네팔의 가족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돈을 보내라고 하면 한 푼 두 푼 보내서 돈을 제대로 못 모은 사람들도 많고, 한국에서 번 돈을 잘 모아 네팔에 돌아왔지만 제대로 운영을 못 해 파산을 한 사람들도 많다.


불법체류 신세로 임금체불에 시달리고, 산업재해를 입어 일도 제대로 못 하고 강제 귀국을 당한 네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물론 네팔에 살아 돌아온 사람들 이야기다. 주검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경우도 많아 네팔의 사회적인 문제가 된 지 오래다.


매일 1천500명이 넘는 네팔의 청장년층 인구가 다른 나라로 이주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유학이 목적이든, 취업이 목적이든,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할 경우 오래 준비하는 걸 당연시하는데 네팔은 이주가 일상이 되어서인지 점심 잘 먹고 와서 퇴사를 하는 직원들을 만나기도 한다. 호주 가는 비자가 나와서 그날 저녁 비행기로 떠나야 한다고.


네팔에 귀환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협의체들이 여러 개인데 수련 씨도 한 달에 한번 그런 모임에 참석한다고 했다. 한번에 15명에서 20명 정도 모인다고 하는데 처음 취지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이런 모임들이 잘 운영이 되어 이주를 떠나기 전, 이주 후, 그리고 고향에 다시 돌아온 네팔 사람들이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단체로 성장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은 2015년 9월에 발행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뉴스레터에도 실렸다. 참고: http://snuacnews.snu.ac.kr/?p=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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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