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24: 네팔/사람들2016. 2. 18. 23:19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2013년 한국의 국제협력단(코이카, KOICA)과 성공회대학교가 ‘대학을 통한 민간협력사업’으로 설립한 사회적기업 활성화센터(Social Enterprise Activation Center, 일명 ‘SEA센터’)라는 곳이 있다. 


2015년 1월에 파견되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네팔 남자 평균보다 키가 훌쩍 큰 수련 씨(당시 나이 50세, 본명은 ‘수련 아자리’인데 한국에서도 네팔에서도 다들 ‘수련’이라고 부른다고 했다)를 센터에서 우연히 만났고, 그분이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귀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2000년대 초반 지방의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약 3년 정도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일명 ‘불법체류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아시아의 이주 노동자들이 그들의 고향에 돌아가서 과연 어떻게 살까?’ 늘 궁금했었다. 수련 씨를 설득해 인터뷰에 성공했고, 혼자만 알고 있기는 아쉬워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는데 지진이 나는 바람에 늦어지고 말았다.


수련 씨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네팔에 머무는 동안 귀환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 그분들이 사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수련 씨만 소개하지만 기회가 되면 다른 분들 이야기도 소개하려고 한다.


지난 네팔 지진 피해 지역 중에서 언론에 가장 많이 소개된 곳 중 하나가 바로 ‘고르카(혹은 구르카, Gurkha)’ 라는 곳인데, ‘구르카 용병’으로도 유명한 바로 그 지역이다. 


구르카 용병은 선발 기준이 몹시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현재도 영국, 인도, 싱가포르 군대에서 네팔의 구르카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다. 내가 만난 귀환 이주 노동자 중에 구르카 용병 출신이 여럿 있었는데 수련 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수련 씨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한 경비업체의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다. 소속 직원이 약 700명 정도 되는 그리 작지 않은 규모의 회사로, 씨센터의 경비도 수련 씨가 소개했다고 한다. 인터뷰는 내가 일하는 센터에서 진행했다.


수련 씨는 걸프전 참전으로 이라크에 갔다가 거기서 1년 정도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캠프에서 한국인을 만났고, 한국에 대해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수련 씨는 한국에 직접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용병 임무가 끝나자마자 집안 사정으로 한국으로의 이주 노동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한국에 이주 노동을 하러 가려면 한국어능력시험(일명 EPS시험)에 통과해야 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어 시험 없이도 한국에 갈 수 있어 준비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2001년 3월 7일 수련 씨는 드디어 한국에 도착한다. 수중에 18만 루피(한화로 180만 원 상당)가 있었고, 한국에 체류하는 데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산업연수생 비자를 가지고 있었다.


“비행기는 그때 처음 타신 거 아니죠?” 라는 질문에 “용병 생활 하면서 이스라엘, 영국, 태국,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등에 체류한 적이 있고, 유고슬라비아, 터키, 사이프러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요르단 등지를 여행한 적도 있어 비행기 여행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요.”라고 하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2000년대 초반에 네팔 사람이 여행을 해봐야 얼마나 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이 주최하는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대전의 신탄진으로 이동, 파란만장한 수련 씨의 이주 노동자 생활은 시작된다.


수련 씨의 한국에서 첫 직장은 신탄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이었고, 거기서 연수생 비자가 끝날 때까지 3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첫 월급으로 110만 원을 받았고, 신탄진을 떠날 때쯤에는 150만 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연수생 비자가 끝나고 본격적인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면서 수련 씨는 파주로 이동한다.

“한국말을 금방 배워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파주에서 머물렀던 열흘 동안 정말 나쁜 일을 했어요. 휘발유를 훔쳐다가 길거리에서 파는 일을 했거든요. 남의 나라까지 와서 그런 일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해서 다시 이주한 곳이 한국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보성의 양계장이었다. 차밭으로 유명한 그 보성이다. 네다섯 명이 해야 하는 일을 혼자 척척 해내고, 기계 고치는 일까지 해버리니 양계장 사장은 수련 씨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 양계장에서 키우던 닭이 10만 마리가 넘었는데, 나중에 일머리를 알게 되니 사장이 중요한 일까지 다 맡겨 그 양계장에서 무려 7년을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휴가도 없이 매일 20시간을 넘게 일했다고 하니 그 고충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그렇게 일한 덕에 양계장에서 첫 월급으로 190만 원 정도를 받았지만, 보성을 완전히 떠날 때 수련 씨의 월급은 27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2만 평이 넘는 규모의 양계장은 총 22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병아리부터 토종닭까지 닭을 키워 양계장에서 직접 팔기도 했고, 장에 내다 팔기도 했는데 그 일이 전부 수련 씨 몫이었다고 한다.


물론 닭똥을 치우고, 닭을 잡는 일까지도 수련 씨가 할 일이었다고 한다. 수련 씨가 일을 워낙 잘해서 당시 보성 인근에서 ‘네팔 사람, 수련’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수련 씨에게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고 물었다. “재미있어 보였어요. 제가 걸프전 참전 때문에 스위스에서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의 스위스보다 한국의 첫인상이 저는 더 좋았어요.” 라고 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이 수련 씨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한국 떠나오고 나니 아쉬운 점 같은 것 없으셨어요?”라고 물으니 “일할 때 일 열심히 했고, 놀 때 열심히 놀아서 별로 아쉬운 점은 없어요.”라고 했다.


한국에서 좋았던 점으로 남을 친아들이나 딸 같이 가족처럼 잘 대해주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들었다. 2003년에 아직 합법적인 비자가 5개월 남았을 때 수련 씨는 네팔을 한번 방문했었다고 한다. 한국의 겨울이 너무 추웠고, 힘든 일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당시 모아놓은 200만 루피 상당의 돈을 들고 네팔에 돌아갔었다고 했다.


아내와 가족이 그동안 보내준 돈으로 땅도 사고, 금붙이도 사모았으니 이제 다시는 떠나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결국 다시 한국에 가게 되었고, 수련 씨가 10년간의 이주 생활을 청산하고 완전히 네팔로 귀국한 것은 2010년 4월 14일. 양계장 사장은 귀국을 말렸지만, 수련 씨는 빨리 네팔에 돌아가 한국에서 경험한 것들을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고 한다.


“2010년 4월에 여기 카트만두 도착했는데 먼지도 너무 많고,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10년을 떠나 있었는데 나라가 하나도 바뀐 게 없잖아요. 그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노인들이 대중교통에 무료로 승차하고, 연금이나 농협의 편리한 시스템, 농촌의 퇴비 만드는 방법 같은 것들을 네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주고 싶었어요. 친척들이나 국회의원들, 만나는 사람들한테 우리도 한국처럼 해야 한다고 많이 소개했는데 안 먹히더라고요. 제가 이런 걸 빨리 알려주고 싶어서 네팔에 왔는데 말이죠.”


이 이야기를 하면서 수련 씨는 많이 아쉬워했다. 네팔에 도착하자마자 카트만두에서 오토바이로 한시간 거리의 시골에 농사지으면서 염소도 키우고 싶어 철망을 만드는 등 3~4개월 준비를 했는데, 그때쯤 친구들 6명과 의기투합해 지금의 경비업체를 만들게 되었고, 농사일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양계 기술이 있으면서 왜 네팔에서 써먹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닭은 이제 쳐다도 보기 싫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수련 씨는 이제 나이 50이니 앞으로 5년 정도 더 경비업체 일을 하고 은퇴할 예정인데 가족들과 한국에 여행을 갈 계획이고, 가게 되면 보성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다.


네팔의 귀환 이주 노동자들이 모두 수련 씨처럼 잘 정착해 사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거라 생각하는 네팔의 가족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돈을 보내라고 하면 한 푼 두 푼 보내서 돈을 제대로 못 모은 사람들도 많고, 한국에서 번 돈을 잘 모아 네팔에 돌아왔지만 제대로 운영을 못 해 파산을 한 사람들도 많다.


불법체류 신세로 임금체불에 시달리고, 산업재해를 입어 일도 제대로 못 하고 강제 귀국을 당한 네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물론 네팔에 살아 돌아온 사람들 이야기다. 주검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경우도 많아 네팔의 사회적인 문제가 된 지 오래다.


매일 1천500명이 넘는 네팔의 청장년층 인구가 다른 나라로 이주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유학이 목적이든, 취업이 목적이든,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할 경우 오래 준비하는 걸 당연시하는데 네팔은 이주가 일상이 되어서인지 점심 잘 먹고 와서 퇴사를 하는 직원들을 만나기도 한다. 호주 가는 비자가 나와서 그날 저녁 비행기로 떠나야 한다고.


네팔에 귀환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협의체들이 여러 개인데 수련 씨도 한 달에 한번 그런 모임에 참석한다고 했다. 한번에 15명에서 20명 정도 모인다고 하는데 처음 취지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이런 모임들이 잘 운영이 되어 이주를 떠나기 전, 이주 후, 그리고 고향에 다시 돌아온 네팔 사람들이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단체로 성장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은 2015년 9월에 발행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뉴스레터에도 실렸다. 참고: http://snuacnews.snu.ac.kr/?p=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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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일 진도 4.x의 여진으로 건물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있지만 센터도 집도 지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변화라면 동석한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테이블을 흔들 때 또 지진이 아닌가, 잠깐 공포에 떨 때가 있고, 그리고 집에서 밥을 해 먹는다. 10년 넘게 유학생활하면서 소꿉장난하듯이 밥 해먹던 생활이 지겨워 네팔에 와서는 늘 사서 먹었다. 물이 안 좋아 그릇이나 야채손질하는 것도 일이라는 생각에 귀찮기도 했고. 지진이 났을 때 자주 가던 식당들이 문을 닫아 밥 먹을 곳을 찾아 헤매는 날이 많아지면서 결국은 사 먹는 걸 포기하고 해먹게 되었다. 야채가 워낙 싸고, 일본 슈퍼마켓에 가면 우리가 먹는 쌀도 구할 수 있는 데다, 지난 번에 네팔을 방문한 지인이 된장, 고추장, 쌈장을 선물해 웬만한 한국음식들은 요리가 가능하다. 그래서 다시 소꿉장난하듯이 밥을 해먹고 있다.  



2.

긴 공부가 끝나고 다시 해외생활을 하게 되면 자전거를 일상으로 타는 나라에 가야지, 생각했었고, 그곳이 일본이 아니라면 북유럽 어디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네팔에 오게 되었다. 그런 생각지도 못했던 네팔에서 매일 자전거를 타고 있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일본식당 '코테츠(こてつ)' 쉐프한테 임기가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자이카(JICA, 우리나라 한국국제협력단/KOICA 같은 단체) 단원들 중에 자전거를 처분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고 했는데 쉐프가 즉석에서 집에서 노는 자전거가 있으니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라는 게 아닌가.그때 선물로 받은 자전거를 지금도 타고 다닌다. 센터에서 집까지 걷기에는 좀 멀고, 택시를 타면 10분 정도 걸리는데 매번 가격을 흥정해야한다. 자전거로는 15분 정도 걸리는데 그중 절반이 비포장 도로라서 매일 출퇴근 시간에 어드벤처 트레킹을 하는 느낌이다. 출근하고나서 자전거는 센터 직원들 차지가 되는데 가드 할아버지가 점심드시러 가실 때, 카페 스탭들이 식료품을 사러 다닐 때 다들 내 자전거를 타고 나간다. 무단으로 자전거를 타는 대신에 갑자기 비가 오는 날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가드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실내에 들여놓고,바람이 빠지면 알아서 바람도 넣어놓고, 집에 갈 시간이면 자전거 키 비밀번호를 풀어서 내가 타고 가라고 대문 앞에 세워놓으신다. 참, 같은 날 파견되어 끈끈한 전우애(?)를 느끼는 중인 한국인 동료가 내 강요에 못 이겨 자전거 헬맷을 선물했고, 나는 그 동료의 강요에 못 이겨 결코 싸지 않은(?) 자전거 전용 라이트를 선물했다.두 가지 자전거 액세서리는 지금도 잘 사용 중이다. 



3.

카트만두에는 아직 본격적인 몬순이 온 것 같지 않은데 가끔 천둥을 동반한 비가 쏟아지곤 한다. 출근하는 시간에 비가 쏟아진 적은 한번 뿐이라서 아직까지 네팔 날씨에 우호적이다. 일본에서 학교 다닐 때는 비가 오면 한 손에 우산을 들고 곡예를 하듯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여기는 도로가 위험천만해서 그런 짓은 엄두도 못낸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비가 오면 그냥 택시를 탈 생각이다. 지난 번에는 비가 약해 우비를 입고 출근을 했었다. 여름으로 진입한 것 같긴 한데 한낮에는 날이 몹시 뜨겁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다. 날이 뜨거워도 다른 동남아국가들처럼 습하지않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또 시원하다. 카트만두 날씨가 좋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겪어보니 겨울은 난방시설이 없는데다 고산지대라 정말 짜증이 날만큼 추웠는데 여름은 견딜만하다. 아니 다른 어떤 동남아국가들보다 좋다. 겨울에도 아침저녁은 뼈가 사무치도록 춥지만 대낮의 썬샤인은 네팔이 가히 자랑할만하다. 예정대로라면 이번 주에 한국에 가야했는데 그놈의 메르스 때문에 당분간은 카트만두를 지켜야할 것 같다. 오늘도 대낮의 카트만두는 몹시 뜨겁다.   

Posted by 윤오순
채널24: 네팔/사람들2015. 5. 19. 22:38

지진으로 자주 다니던 식당들이 문을 다 닫아 네팔에 와서 처음으로 밥을 했다. 눈물 젖은 빵 이야기가 나오면 난 오늘이 생각 날 것 같다.

첫번째 지진 나고 자주 다니던 일본 식당의 쉐프가 저녁 초대를 해서 몇 번 간 적이 있다.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설 때면 다음날 아침에 먹으라고 주먹밥을 두 개씩 싸줬더랬다. 내가 점심에 갈 때마다 스탭들이 보던말던 "오겡키데스카?"라고 인사하던 게 참 고마웠댄다.

1월 20일부터였던가. 그 식당에 가면 변함없이 런치박스를 시켰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먹은 갯수를 모두 센다고 했다. 여기서 내 별명이 스티브 잡스인데, 옷 차림도 늘 비슷하고, 식당도 같은 식당에, 게다가 같은 메뉴만 시켜서라고...

어쨌거나 내가 그 식당 사람들에게 그냥 점심 고객이 아니라고 했는데 주먹밥을 먹으면서 그 생각을 많이 했었다. 여기 네팔에 와서 내가 단골로 자주 이용하는 카페나 음식점들이 몇 곳 있다. 다들 나를 자기네들 음식 팔아주는 고객 정도로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인지 일본 식당 '코테츠' 스탭들의 친절함과 태도가 참 고맙다.

두 번째 지진을 이 식당에서 겪었는데 새로 문을 열어도 같은 건물이라면 다시는 못 갈 것 같다. 그래서 더 슬픈 저녁이다.

Posted by 윤오순

지진이 난 후 3일 째인 4월 27일 월요일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시카고에서 볼 일을 보고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타려던 날 지진 소식을 들었고, 한국에서는 카트만두 공항이 폐쇄되었으니 당장 한국으로 귀국해 추이를 지켜보자는 연락이 왔다. 네팔 현지 대표가 다음 날 공항이 열릴 것이고 큰 문제 없어보인다며 일단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씨센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네팔 와서 처음으로 무섭고 외롭고 아무튼 복잡한 감정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씨센터가 있는 라짐팟은 외교공관도 많고, 주변에 고급주택도 많은 곳이다. 밖에서는 지진이 났었는지 감도 안 오는 곳이지만 워낙 강진이었던 터라 씨센터도 이번 지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장 직원들 소재파악을 해야했고, 센터에 작동이 안되는 것이 없는지 살펴야했다.

전기는 발전기가 있어 내가 도착한 날부터 쓸 수 있었는데 옥상의 물탱크가 무너져 당장 물을 사용할 수 없었고, 전화와 인터넷은 먹통이었다. 내 기준으로 도착 3일째 유선전화가 연결되었고, 5일째 물탱크 일부를 수리해 임시방편으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직원 소재 파악하는데 5일이나 걸렸다. 피해의 경중은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전부 무사했다.

폭우가 내리던 이튿날 아침에 센터에 직원들 일부가 도착했다. 평소 꾸미기 좋아하는 카페 여직원이 세수도 안한 남루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감정을 어떻게 추스려야할 지 몰랐다. 직원들에게는 그냥 5월 15일까지 쉬라고 했다. 센터를 탄력적으로 운영할 테니 나올 수 있는 사람은 나와서 센터에서 진행하는 아무 일이나 무조건 도우라고 했다.

내가 살던 집도 당장 들어가 지낼 수가 없어 며칠을 남의 집 신세를 져야했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마르지 않은 수건을 싸들고 돌아다니다 지난 금요일에 원래 지내던 집에 들어왔다. 수도 꼭지에서는 물이 나오는데 샤워기에서는 아직 물이 안 나온다. 화장실에 전기가 안 들어오는데 다 견딜만하다. 매일 저녁 한두번의 여진으로 건물이 조금 흔들리고 있는데 그것도 견딜만하다.

지난 수요일부터 센터에 나오는 직원들 위주로 날마다 팀을 새로 짜서 복구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네팔에서 활동하는 한국 단체들의 네팔 재난 대응 상황이 날마다 업데이트 되어 SNS에 올라온다고 하는데 씨센터에는 당장 일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고, 현재 씨센터 규모로 다른 단체들이 하듯이 현금구호나 인력파견 활동도 할 수가 없다. 나이든 가드 아저씨는 날마다 내가 센터에 도착하면 문을 따주고, 오후 6시쯤 내 자전거를 타고 식사를 하러 가신다. 쉬시고 싶으면 쉬라고 했는데 계속 센터에 나오시겠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했다. 아저씨가 식사를 하고 오시면 주섬주섬 정리해 퇴근을 했다.

카트만두 도착 후 날마다 씨센터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고, 무조건 사람들이 센터를 다시 찾아 올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오늘 드디어 센터에 인터넷이 복구되었다. 이제 뭔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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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은 네팔에 와서 가장 성취감을 느낀 하루였는데 요즘 머리 아픈 사건(?)이 있어 제대로 기념을 못했다. 2월이 시작되고 며칠 안되었을 때다. 카페 미뜨니의 매니저가 창고 정리를 하는데 S.E.A Center의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예전에 수업했던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중 에코백이 매니저에게 간택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간 카페 어디서고 숍의 물건들이 전시되는 일이 없었다는데 카페와 숍 사이의 복도 끝에 있는 빈 벽에 에코백과 앞치마를 전시해 팔아보기로 했다. 우리 매니저가 친히 패키지에도 관여를 하면서 그냥 쳐박혀있던 평범한 에코백이 미뜨니 브랜드로 변신, 로컬에서 작은 반향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지난 주말 현지조사 일환으로 센터를 방문했던 전북대 학생들이 이 에코백을 발견, 미뜨니 브랜드 출시 이후 첫 '해외 주문'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처음에는 200개를 의뢰했는데 새로 천을 살 여유도 없고, 사람을 급하게 구하기도 힘들고, 어쨌거나 마감을 못 지킬 것 같아 일단 남아 있는 천으로 만들어도 좋다고 하면 70개 제작이 가능하다고 했다. 마감은 지난 화요일 오후 2시.


그동안 교육했던 학생들 중 솜씨가 가장 좋은 7명의 아줌마들로 '미뜨니 팀'이 구성되었고, 집에도 가져가 작업을 해서 무사히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처음에 대충 만들어 박스에 담아주면 어쩌지 하면서 공정을 계속 체크했는데 에코백 주변의 실밥들을 일일이 다 손질했고, 다림질까지 해서는 세 장씩 비닐 팩에 담는 게 아닌가. 학생 사장이 기분이 좋아 이날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 점심 초대를 했고, 카페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미뜨니 팀으로부터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미뜨니 팀이 생산했던게 에코백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고, 그간 만들었던 다양한 작업물들을 구경해 볼 수 있었다. 미뜨니 에코백은 앞으로 미뜨니 카페에 오면 항상 구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당장 만들었고, 내친 김에 나도 하나 구입했다.


각설하고, 부엌에서 사용하는 앞치마, 냄비받침 등등의 세트, 침구세트, 커텐 등을 네팔 느낌 나는 디자인으로 만들고 싶어하시는 분들, 각종 이벤트에 다량의 기념 에코백이 필요한 분들, 홈데코레이션에 네팔의 미뜨니 제품이 필요하신 분들은 기초 디자인 작업부터 모든 공정에 이 몸이 직접 참여하고 있으니 품질은 걱정 마시고, 빨리빨리 주문 넣으시라. 우리 집 이불은 표준 사이즈가 아닌데, 이런 분들도 고민하지 마시고 사이즈를 그냥 알려 주셔! 미리 주문하시면 여행 끝나고 비행기 탈때 들고 가실 수 있다는...


주문은 이쪽으로: nepalseacenter@gmail.com / +977 1 4002068 / +944 1 400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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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채널24: 네팔/사람들2015. 1. 23. 13:22

카트만두에 도착해 며칠 묵었던 호텔 'Tings'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의 플랫 방 한 칸을 빌려 살고 있다. 전임자가 나가면 그 친구가 살던 플랫에 내가 입주할 계획인데 출국이 다음주라서 며칠은 더 신세를 져야 한다. 잠은 그렇게 해결되었는데 매일 아침을 챙겨먹는 일이 영 신경이 쓰였다. 아침부터 뚜닥뚜닥 소리를 내기도 미안하고. 결국에 이전에 묵었던 호텔의 아침 조식을 먹기로 하고 요 며칠 그쪽으로 출근 중이다. 


어제는 스위스에서 온 실비아, 덴마크에서 온 연구자 루니, 홍콩에서 온 메리를 거기서 만났는데 오늘은 현지인과 결혼해 사업을 하고 있는, 덴마크에서 온 마이클을 만났다. 짧은 아침 시간이지만 외국인으로서 겪는 네팔 생활, 각자 하고 있는 일들, 다른 나라에서의 경험들이 빠른 속도로 교환되어 좋다.


네팔에 사는 외국인 장기 체류자들의 최대 이슈 중 하나가 비자문제인데 오늘 마이클한테 두 가지 팁을 얻었다. 현지의 친절한 사람과 결혼하는 방법, 그리고 사업을 하는 방법이다. 마이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침조식을 서비스하는 종업원이 차를 내왔고, 마이클의 농담에 종업원은 즉석에서 결혼 프로프즈를 했다. 네팔에서 받은 첫 프로포즈이니 기념으로 그 친구를 내 '이것저것 리스트'의 1번으로 올려주기로 했다. 


전임자의 인수인계가 어제 끝났고, 오늘부터는 혼자 처리할 일들이 많은데 좀 걱정이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니, 하는 마음으로 버텨보겠다. 

Posted by 윤오순

지난 주말 무사히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짐을 어떻게 싸야 초반에 고생을 많이 안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매연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않아 도착하자마자 인후통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카트만두 시내의 공기오염은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마스크로 해결될 수준은 이미 넘었다. 


각설하고, 관광과 쇼핑의 중심지인 카트만두 시내의 타멜에서 택시로 약 15분 정도 걸리는 라짐팟(Lazimpat)이라는 곳에 우리나라 세 개의 사회적기업들(오요리아시아, 트래블러스맵, 페어트레이드코리아그루)이 S.E.A Center라는 사회적기업활성화센터를 만들었다(참고: http://www.seacenternepal.com). 바다가 없는 네팔에 바다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염원을 담아 센터 이름을 지었다고 들었는데 영어 이름 '씨 센터'는 한국어 설명 그대로 Social Enterprise Activation Center(사회적기업활성화센터)를 줄인 표현이다. 2015년 5월 4일 2주년이 된다고 하니 아주 젊은 조직이고, 실제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대개 젊다. S.E.A Center는 다시 4개의 부서 - 카페 미뜨니, 수공예품 숍, 디자인 아카데미, 맵 네팔이라는 여행사 - 로 나뉜다. 각 부서에는 매니저 역할을 하는 분들이 따로 있고, 네팔 현지에서 이 프로젝트 전체를 매니징하는 일을 이번에 내가 하게 되었다. 내 전임자는 사회적기업과 비영리기구의 현장활동 경력만 11년이 넘는, 이 분야의 완전 베테랑으로 현지에서는 타멜의 여신으로 통하는 분이다. 앞으로 일 하려면 이것저것 챙길 게 많은데 전임자 근무 날짜가 내일까지라는...ㅠㅠ 인수인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꼼꼼한 전임자가 매뉴얼을 잘 만들어 둔 덕분에 요즘 그 매뉴얼들을 들여다보며 내가 할 일들을 공부하는 중이다.


내가 한국에 없으면 에티오피아에 있겠지 하는 분들이 많을 텐데 앞으로는 이곳에 네팔 소식을, 네팔의 사회적기업활성화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소개하려고 한다. 기대들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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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이번엔 네팔이다. 지인들 중에 죽기 전에 꼭 가고 싶은 여행지 혹은 나라로 네팔을 꼽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난 여행하고 싶은 곳 리스트에 네팔을 포함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네팔에 가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3개의 사회적기업들이 네팔에 만든 또 다른 사회적기업 활성센터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가게 되었다. 막상 가기로 했지만 제안이 왔을 때 많이 흔들렸던 게 사실이다. 공부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1년 동안 헤매긴 했지만 뭔가 다시 시작해도 아프리카 지역연구와 관련된 일일 거라 내심 믿고 있었는데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네팔이라고 해서 고민을 안할 수가 없었다. 허나 가는 지역이 에티오피아가 아닐 뿐 기회가 되면 에티오피아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회사라 결국 가기로 했다. 다음 주 출국 예정이라 이번에도 여유있게 준비하긴 그른 것 같다. 회사에서 티켓은 끊었다고 연락이 왔고, 전임자가 사는 숙소를 내가 쓰기로 해서 일단 한시름 놓은 상황이다. 


중국으로, 일본, 영국, 에티오피아로 처음 출발할 때 무슨 준비를 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예방접종은 필수사항이 아니고 권장사항이라고 해서 구충제나 준비할 생각이다. 개도국의 경우 뭘 신청하는 데 사진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사진은 넉넉하게 준비해야 할 것 같고, 우편으로 보내는 짐을 까다롭게 체크해서 얼토당토않은 세금을 물리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이번엔 할 수 없이 3단 이민가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야 할 것 같다. 보통은 국제우편이나 선편으로 짐들을 보내놓고 공항에는 간편하게 갔었는데 이번에는 귀찮아도 어쩔 수가 없다. 공용어가 네팔어라고 하니 네팔어를 배워야 하는데 가기로 결정하고부터 기본적인 표현들과 네팔어 자모음을 매일 공부하는 중이다. 취미나 시험이 아닌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우는 내 인생 다섯번째 외국어이다. 문자가 완전 예술이라서 '옴마니반메훔' 하면서 한자한자 쓰다보면 수행하는 느낌이 든다.


에티오피아나 중국 갈 때와 비교하면 네팔 관련 자료는 넘치고 넘쳐 네팔이 어떤 나라인지 찾아보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 사이 히말라야 트레킹, 자원봉사 등을 통해 네팔에 다녀 온 사람들이 많고, 그 사람들이 쏟아낸 자료들이 아주 유용해 보인다. 그런 정보에 따르면 음식도 밥을 먹는 데다 다른 아시아 지역 보다 향신료를 덜 쓴다고 하고, 게다가 현지에는 한국 식당도 여러 곳 있는 것 같아 먹는 걱정도 덜었다. 베이스 캠프가 수도 카트만두라서 탁한 공기가 걱정이지만 지방 보다는 살기가 수월할 것 같다. 거기서 3년을 지낼 예정이다. 어떤 일들, 어떤 사람들이 네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학생 신분이 아니라서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지지만 히말라야 정기를 받으며 내 인생 2막을 잘 준비하고 싶다. 



*지도정보: http://www.worldatlas.com/webimage/countrys/asia/np.htm 

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