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많이 온 것 같은데 여전히 춥다. 내가 아는 봄꽃들-동백, 철쭉, 벚꽃, 목련, 개나리 등-과 또 모르는 봄꽃들이 활짝 피었다 모두 지고 있는데도 밖은 여전히 춥다.

어떻게 6개월을 넘기나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6개월이 넘어갔다. 경험에 따르면 3개월, 6개월이 고비인 것 같다. 3개월쯤 되면 아는 것들이 눈에 많이 띄고, 6개월쯤 되면 어딜 가도 동네 수퍼에 갈 때 그 느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6개월을 넘기기 전에, 아직 호기심이 많을 때,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을 기록해야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게을러서일수도 있고, 정말 바빠서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목적에 충실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랄 수도 있고.

지금 사는 기숙사에 이사오고나서 죽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 하나 있다. 내 층엔 나를 포함에 6명이 살고 있다. 

1번은 파니. 홍콩에서 왔고, 영어는 느린데 광동어는 엄청 빠르고 게다가 시끄럽기조차 하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매너가 아주 그지다. 저런 걸 어떻게 애인으로 두나 싶을 그런 개차반 같은 넘이다. 파니는 졸업하고 부자가 되고 싶단다. 지금도 엄청 부잣집 딸로 보인다. 

2번 제이시. 중국인이고 이번 학기에 새로 이사왔다. 딱 봐도 공부만 할 것 같은 성실녀이다.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전에 살던 중국인 남자는 골초에 마리화나도 피는 넘(복도를 지나가다 이상한 냄새가 나서 물어봤더니 스탭 하나가 마리화나 냄새란다.)이었는데 두 학기 내내 학교를 안 나가 비자가 취소되면서 자동 귀국했다. 벽이 얇아 옆 방에 작은 소리도 다 들리는데 이 놈은 낮엔 자면서 코고는 소리로, 밤엔 메신저 채팅 소음으로 나를 짜증나게 했었다. 

3번은 나. 

4번은 앤드류. 중국인인데 아주 말끔하게 생겼고, 첫인상은 젠틀맨, 바로 그거였다. 그래서 농담으로도 이놈을 젠틀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더럽기 짝이 없는 놈이다. 늘 인스턴트 음식을 전자렌지에 데워 먹는데 식사가 끝난 후 접시에 사용한 화장지를 수북히 담아 싱크대 옆에 며칠을 묵혀둔다. 가끔 요리를 해 먹을 때도 있는데 기름 범벅 요리라 요리후 오븐 주변이 아주 난리다. 일본에 있을 때 인도네시아에서 온 페리랑 아주 똑같은 놈이다. 당근 청소는 안한다. 제발 다른 사람 위해서 청소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메시지를 붙여놔도 알았다고만 하고 달라지지 않는다. 냄비를 렌지에 올려놓고 방에서 딴짓을 하다 태워먹기를 여러번. 그럴 때마다 냄새가 다 빠지는 데 며칠이 걸린다. 매일 밤 12시 반쯤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들린 후 밖으로 나간다. 여자 친구가 근처에 사는 것 같다. 가끔 여자친구가 놀러오면 며칠 먹을 인스턴트 음식을 잔뜩 사와서 냉장고 여기저기에 넣어놓기 때문에 냉장고 칸이 모자란다. 냉장고에 인스턴트 음식이 유달리 많아지고 밤 12시 반쯤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안들리면 여자친구가 왔다고 보면 된다. 매일 울리는 알람소리도 짜증나는데 밤마다 들리는 헤어드라이어 소리는 더 짜증난다. 

5번은 맨튜, 일명 루저인데 요놈은 좀 있다 설명하겠다. 

6번은 중국인인데 밖에 나온 걸 본 적이 없다. 음식은 전부 배달해 먹는다. 방에서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 제발 그러지 말라고 사정사정을 했는데 요즘은 아예 안보인다. 가끔 친구들을 불러 요란하게 파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소음도 안 들린다. 담배 안피고, 조용히 지내니 그저 내겐 고마운 이웃일 뿐이다.


5번 루저. 아주 소설 속 주인공 같은 놈이다. 머리는 노랗게 염색을 했고, 바지는 항상 스키니 진 스타일에 구도코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신발을 타고 다닌다. 키가 내 어깨 아래에 올 정도로 작고, 뒤뚱뒤뚱 걷는 게 마치 만화 주인공 같다. 처음 오자마자 부엌이 더러워 전부 100파운드에 청소비를 따로 물리겠다고 생난리를 폈는데 1번 파니랑 5번 이놈이 내 앞에 와 살랑거리며 네가 오기 전에 우리가 주로 청소를 했으니 봐달라며 아주 친절하게 굴었다. 살다보니 알게되었는데 1번과 5번은 날마다 돌아가면서 파티를 벌였다. 얘네들이 구비하고 있는 가제도구는 거의 신혼부부 수준이다. 없는 게 없다. 냄비를 비롯해 그릇들도 전부 세트이다. 파니의 남자 친구가 루저의 친구기도 했다. 한번에 예닐곱씩 부르니 매일 파티가 끝난 후 나오는 쓰레기가 장난이 아니다. 참고로, 중국 정부는 홍콩도 중국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서 보면 홍콩과 대륙은 같은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사용하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같은 층에 살면서 전혀 교류하지 않는다. 이들이 새벽까지 마시고 떠들어도 아무도 시끄럽다고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나 말고는.

이놈과 그리고 이놈을 찾아 오는 '것'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거짓말도 했는데 요즘은 아예 대들기까지 한다. 어제는 친구 생일이었다, 친구가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 그랬다, 뭐 이런 핑계들이었는데 그러려니 하고 위에 보고도 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도가 지나쳐 경비를 불러 해산시켜야 할 때도 있다. 음악소리도 줄어들지 않고, 복도며 부엌을 왔다갔다하면서 떠들며 파티를 지속할 때이다. 내 경고에, 술이 취한 체 너 자꾸 그러면 고소를 해버린다며 말도 안되는 소리로 나를 협박할 때는 어이가 없다. 어떤 날은 경비를 불러도 얘들이 경비를 속인다. 경비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조용히 있다가 경비가 문을 두드리면, 수고하십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친절하게 질문을 하기도 한다. 나만 병신 될 때다. 저도 양심은 있는지 이제는 떼거지로 애들을 부르지 않고, 달랑 여자친구만 부른다. 혹 다른 층의 친구 방에서 파티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교양없기는 여자친구도 마찬가지다. 그 나물에 그 밥이지. 벽이 얇아 소곤소곤하는 소리도 다 들리는 기숙사에서 밤마다 지 무용담을 얘기하는지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아주 미칠 지경이다. 새벽 3시, 4시에 요리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 가제도구도 사용하고 씼지도 않고 그냥 방치해두기 예사다. 담당 선생이 불러 얘기를 했는데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고 그랬다면서 선생이 얘가 정말 그랬냐고 몇번이나 확인을 하는 메일을 받았다. 녹음이라도 해서 들려줘야 한단 말인가. 참나원. 어젯밤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조용히 해달라고 갔다니 왜 아무도 시끄럽다고 안하는데 너만 자꾸 그러느냐, 너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며 대드는데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우발적 살인이라는 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두번째 경고를 하러 갔더니 아주 대놓고 소리를 지르며 웃고 떠드는데 똥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보란듯이 떠들며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5시까지 난 잠들지 못했다. 둘다 아주 부셔버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무슨 수를 쓰긴 해야하는데 방법이 없다. 울 엄마는 따뜻한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벗겼다고, 그저 좋게좋게 얘기하란다. 전 세계의 가난한 커피 농가들을 살리기 위한 획기적인 방법에 대해 연구하려면 일분일초도 아까운데 저런 쓰레기같은 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이 좀 쪽 팔리기도 하다.

방으로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메일로 내가 겪은 걸 써서 위에 보고하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니 지난 밤이 참 우울했다. 이런 것들이 중국의 미래라니 중국 별거 아니구나, 하는 여우의 '신포도 넋두리' 전략도 별로 위로가 안되었다. 애써 흥분을 진정시키며 다른 이웃들에게도 직접 물어봐서 나와 똑같은 반응이면 당장 얘를 쫓아내라고 써버렸다. 영국은 이런 반사회적 행동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궁금해졌다. 

*사진은 엑시터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숙소에서 학교에 가면서 찍은 사진이다. 여긴 아침이 이렇게 어두워, 궁시렁 거리면서 학교에 갔는데 시계를 잘못 맞춰서 그런 거였다. 어젯밤에는 두 쓰레기들을 저렇게 매달아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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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