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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29 기숙사 백태-아프리카 학생들
  2. 2010.05.15 진정한 루저란 6
  3. 2010.04.05 용감한 신입생 3
  4. 2007.10.09 기숙사 입주 보고 2

몇주 전이다. 밤늦게 도착하는 학생이 있어 다른 기숙사 사감한테 계약서 등을 인계해주고 오는데 창문까지 열어놓고 시끄럽게 떠드는 애들이 내 눈에 딱 걸렸다. 시간은 거의 자정을 달리고 있었다. 담당사감한테 연락을 했는데 마침 방에 있었다. 사감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된 친구라 좋은 샘플이 될 것 같아 같이 가주기로 했다. 현장에 당도하니 전부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로 정말 엄청나게 떠들고 있었다. 멀리서 음악소리는 못들었는데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아주 요란했다. 화장실에 숨어 있었던 학생들까지 모두 여섯이었다. 새로 와서 기숙사 룰을 몰랐다고 변명을 하는데 내 학생이 거기 둘이나 있었다. 규정을 다시 이야기해주고, 아이디를 확인하고 모두 돌려 보냈다. 그리고 끝난 줄 알았다. 


헌데 방주인이 나와 다른 사감을 못가게 막고는 아주 격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다른 애들은 떠들어도 그냥 두면서 왜 우리한테만 이러는 거냐, 이건 명백히 인종차별이다, 라는...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게 이 일을 하는 중인데 좀 쇼킹했다. 그 친구 방 바로 윗방은 거의 날마다 떠드는데 왜 단속을 안 하느냐고 그러는데 내 구역이 아니라 나는 모르는 일이었고, 새로 일 시작한 사감도 그런 일이 있는 줄 전혀 몰랐던 터라 우린 둘다 당황했다. 어쨌거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우린 규정대로 처리한다고 이야기해주고 거길 나왔다.


아 이런, 방으로 돌아가다 또 한 방이 걸렸다. 홍콩 그룹 다섯명이다. 상습범들이다. 그 중 한명은 걸핏하면 뭘 집어던지면서 화를 내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하도 시끄러워 노크를 한 후 방 주인한테 손님이 있느냐고 했더니 저 혼자란다. 방문을 열어달라고 했더니 왜그러느냐면서 주저한다. 화장실에서 네명의 학생이 커튼 뒤에 숨어 있다 멋적어하며 나왔다. 손을 씻고 나오려던 참이었단다. 넷이서? 그리고 자기네들은 방 주인의 손님이 아니고 친구이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다. 규정을 이야기해주고 아이디를 확인하고 있는데 오 이런, 좀 전에 만났던 아프리카 학생이 맞은편 방에 놀러 왔다가 멈춰 서서는 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난 규정대로 처리하는 중이었고, 아이디를 확인한 후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어제 저녁. 노이즈 이슈는 아니었고, 불쌍한 아프리카 학생들과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시간은 오후 10시. 홍콩 그룹이 파티를 하는 지 요란하게 요리를 하는 광경을 저녁 8시쯤 봤는데 그 시간까지 학생들이 공용부엌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러려니 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부엌 옆의 아프리카 학생들도 요리를 한다고 시장을 봐 온 걸 봤는데 어디서 요리를 했을까 궁금했다. 다른 부엌은 열쇠가 달라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고. 괜한 오지랖에 노크를 했더니 학생들이 아직까지 거기 있었다. 맛있게 저녁 먹었냐고 했더니 다른 학생들이 부엌을 사용하고 있어 떠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벌써 두시간째란다. 아, 이런 불쌍한 친구들. 당장 부엌에 가서 파티가 끝났는지 홍콩 그룹에게 물었다. 부엌을 쓰고 싶다면 다른 부엌이라도 열어 줄 생각에서였다. 왜 그러냐고 퉁명스럽게 묻길래, 다른 친구들이 요리를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너네들이 더 부엌을 사용하면 다른 부엌을 이용하게 해주려고 한다고 설명해줬다. 다행히 홍콩 그룹은 주섬주섬 그릇들을 챙겨 서둘러 부엌을 떠났고, 저녁 10시 반이 되어서야 아프리카 친구들은 저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냥 같이 인사하고, 요리를 하지 그랬느냐고 했더니 뭐 괜찮단다. 아프리카 지네 나라 가면 가드에 메이드가 수명이 딸린 왕자님들일 텐데 먼나라 와서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를 해야하는 데 사람들이 많아 불편하다 싶으면 우리 건물의 아무 사감이나 연락하라고 그랬다. 당장 요리를 할 수 있게 해줄 거라고. 그리고 다른 사감들에게 이런 학생들이 있으니 주의 깊게 지켜봐 달라는 메일을 띄웠다.    


좀 전에 밖에 나갔다오다가 빌딩입구의 게시판을 보는데 기숙사 사감리스트에 있는 내 사진 정 한가운데에 누가 압정을 꼽아 놓은 게 눈에 확 띄었다. 얼굴을 도려내거나 아니면 바늘을 촘촘하게 꼽아 얼굴을 분간도 못하게 만들어놓기도 하는데 내 사진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하면 스트레스가 풀리나? 사람 얼굴에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난 이해가 안되지만 그런 애들이 종종 있다. 시끄럽다고 잔소리를 했던 아프리카 학생들일 수도 있고, 홍콩 그룹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학생들일 수도 있다. 압정을 뽑아봤자 또 꼽아 놓을 것 같아 그냥 내버려뒀다. 그런 내 사진을 볼 때마다 부두인형이 된 기분이 든다. 내 코가 제자리에 제대로 붙어 있는지 궁금해 스윽 한번 문질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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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봄이 많이 온 것 같은데 여전히 춥다. 내가 아는 봄꽃들-동백, 철쭉, 벚꽃, 목련, 개나리 등-과 또 모르는 봄꽃들이 활짝 피었다 모두 지고 있는데도 밖은 여전히 춥다.

어떻게 6개월을 넘기나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6개월이 넘어갔다. 경험에 따르면 3개월, 6개월이 고비인 것 같다. 3개월쯤 되면 아는 것들이 눈에 많이 띄고, 6개월쯤 되면 어딜 가도 동네 수퍼에 갈 때 그 느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6개월을 넘기기 전에, 아직 호기심이 많을 때,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을 기록해야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게을러서일수도 있고, 정말 바빠서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목적에 충실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랄 수도 있고.

지금 사는 기숙사에 이사오고나서 죽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 하나 있다. 내 층엔 나를 포함에 6명이 살고 있다. 

1번은 파니. 홍콩에서 왔고, 영어는 느린데 광동어는 엄청 빠르고 게다가 시끄럽기조차 하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매너가 아주 그지다. 저런 걸 어떻게 애인으로 두나 싶을 그런 개차반 같은 넘이다. 파니는 졸업하고 부자가 되고 싶단다. 지금도 엄청 부잣집 딸로 보인다. 

2번 제이시. 중국인이고 이번 학기에 새로 이사왔다. 딱 봐도 공부만 할 것 같은 성실녀이다.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전에 살던 중국인 남자는 골초에 마리화나도 피는 넘(복도를 지나가다 이상한 냄새가 나서 물어봤더니 스탭 하나가 마리화나 냄새란다.)이었는데 두 학기 내내 학교를 안 나가 비자가 취소되면서 자동 귀국했다. 벽이 얇아 옆 방에 작은 소리도 다 들리는데 이 놈은 낮엔 자면서 코고는 소리로, 밤엔 메신저 채팅 소음으로 나를 짜증나게 했었다. 

3번은 나. 

4번은 앤드류. 중국인인데 아주 말끔하게 생겼고, 첫인상은 젠틀맨, 바로 그거였다. 그래서 농담으로도 이놈을 젠틀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더럽기 짝이 없는 놈이다. 늘 인스턴트 음식을 전자렌지에 데워 먹는데 식사가 끝난 후 접시에 사용한 화장지를 수북히 담아 싱크대 옆에 며칠을 묵혀둔다. 가끔 요리를 해 먹을 때도 있는데 기름 범벅 요리라 요리후 오븐 주변이 아주 난리다. 일본에 있을 때 인도네시아에서 온 페리랑 아주 똑같은 놈이다. 당근 청소는 안한다. 제발 다른 사람 위해서 청소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메시지를 붙여놔도 알았다고만 하고 달라지지 않는다. 냄비를 렌지에 올려놓고 방에서 딴짓을 하다 태워먹기를 여러번. 그럴 때마다 냄새가 다 빠지는 데 며칠이 걸린다. 매일 밤 12시 반쯤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들린 후 밖으로 나간다. 여자 친구가 근처에 사는 것 같다. 가끔 여자친구가 놀러오면 며칠 먹을 인스턴트 음식을 잔뜩 사와서 냉장고 여기저기에 넣어놓기 때문에 냉장고 칸이 모자란다. 냉장고에 인스턴트 음식이 유달리 많아지고 밤 12시 반쯤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안들리면 여자친구가 왔다고 보면 된다. 매일 울리는 알람소리도 짜증나는데 밤마다 들리는 헤어드라이어 소리는 더 짜증난다. 

5번은 맨튜, 일명 루저인데 요놈은 좀 있다 설명하겠다. 

6번은 중국인인데 밖에 나온 걸 본 적이 없다. 음식은 전부 배달해 먹는다. 방에서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 제발 그러지 말라고 사정사정을 했는데 요즘은 아예 안보인다. 가끔 친구들을 불러 요란하게 파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소음도 안 들린다. 담배 안피고, 조용히 지내니 그저 내겐 고마운 이웃일 뿐이다.


5번 루저. 아주 소설 속 주인공 같은 놈이다. 머리는 노랗게 염색을 했고, 바지는 항상 스키니 진 스타일에 구도코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신발을 타고 다닌다. 키가 내 어깨 아래에 올 정도로 작고, 뒤뚱뒤뚱 걷는 게 마치 만화 주인공 같다. 처음 오자마자 부엌이 더러워 전부 100파운드에 청소비를 따로 물리겠다고 생난리를 폈는데 1번 파니랑 5번 이놈이 내 앞에 와 살랑거리며 네가 오기 전에 우리가 주로 청소를 했으니 봐달라며 아주 친절하게 굴었다. 살다보니 알게되었는데 1번과 5번은 날마다 돌아가면서 파티를 벌였다. 얘네들이 구비하고 있는 가제도구는 거의 신혼부부 수준이다. 없는 게 없다. 냄비를 비롯해 그릇들도 전부 세트이다. 파니의 남자 친구가 루저의 친구기도 했다. 한번에 예닐곱씩 부르니 매일 파티가 끝난 후 나오는 쓰레기가 장난이 아니다. 참고로, 중국 정부는 홍콩도 중국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서 보면 홍콩과 대륙은 같은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사용하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같은 층에 살면서 전혀 교류하지 않는다. 이들이 새벽까지 마시고 떠들어도 아무도 시끄럽다고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나 말고는.

이놈과 그리고 이놈을 찾아 오는 '것'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거짓말도 했는데 요즘은 아예 대들기까지 한다. 어제는 친구 생일이었다, 친구가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 그랬다, 뭐 이런 핑계들이었는데 그러려니 하고 위에 보고도 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도가 지나쳐 경비를 불러 해산시켜야 할 때도 있다. 음악소리도 줄어들지 않고, 복도며 부엌을 왔다갔다하면서 떠들며 파티를 지속할 때이다. 내 경고에, 술이 취한 체 너 자꾸 그러면 고소를 해버린다며 말도 안되는 소리로 나를 협박할 때는 어이가 없다. 어떤 날은 경비를 불러도 얘들이 경비를 속인다. 경비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조용히 있다가 경비가 문을 두드리면, 수고하십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친절하게 질문을 하기도 한다. 나만 병신 될 때다. 저도 양심은 있는지 이제는 떼거지로 애들을 부르지 않고, 달랑 여자친구만 부른다. 혹 다른 층의 친구 방에서 파티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교양없기는 여자친구도 마찬가지다. 그 나물에 그 밥이지. 벽이 얇아 소곤소곤하는 소리도 다 들리는 기숙사에서 밤마다 지 무용담을 얘기하는지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아주 미칠 지경이다. 새벽 3시, 4시에 요리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 가제도구도 사용하고 씼지도 않고 그냥 방치해두기 예사다. 담당 선생이 불러 얘기를 했는데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고 그랬다면서 선생이 얘가 정말 그랬냐고 몇번이나 확인을 하는 메일을 받았다. 녹음이라도 해서 들려줘야 한단 말인가. 참나원. 어젯밤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조용히 해달라고 갔다니 왜 아무도 시끄럽다고 안하는데 너만 자꾸 그러느냐, 너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며 대드는데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우발적 살인이라는 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두번째 경고를 하러 갔더니 아주 대놓고 소리를 지르며 웃고 떠드는데 똥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보란듯이 떠들며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5시까지 난 잠들지 못했다. 둘다 아주 부셔버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무슨 수를 쓰긴 해야하는데 방법이 없다. 울 엄마는 따뜻한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벗겼다고, 그저 좋게좋게 얘기하란다. 전 세계의 가난한 커피 농가들을 살리기 위한 획기적인 방법에 대해 연구하려면 일분일초도 아까운데 저런 쓰레기같은 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이 좀 쪽 팔리기도 하다.

방으로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메일로 내가 겪은 걸 써서 위에 보고하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니 지난 밤이 참 우울했다. 이런 것들이 중국의 미래라니 중국 별거 아니구나, 하는 여우의 '신포도 넋두리' 전략도 별로 위로가 안되었다. 애써 흥분을 진정시키며 다른 이웃들에게도 직접 물어봐서 나와 똑같은 반응이면 당장 얘를 쫓아내라고 써버렸다. 영국은 이런 반사회적 행동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궁금해졌다. 

*사진은 엑시터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숙소에서 학교에 가면서 찍은 사진이다. 여긴 아침이 이렇게 어두워, 궁시렁 거리면서 학교에 갔는데 시계를 잘못 맞춰서 그런 거였다. 어젯밤에는 두 쓰레기들을 저렇게 매달아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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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봄이 안 오는 줄 알았다. 아니 여긴 봄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연은 거스를 수 없는 법. 꽃망울들이 하나씩 툭툭 터지고 있다. 3월 초만해도 새파란 싹만 보여주던 수선화가 캠퍼스 곳곳에 노랗게 만개했다. 그리고 난 두번째 방학을 맞이했고, 요즘 객국생활 10년을 회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 주말에 다음학기 신입생 세명이 기숙사에 입주했다. 전부 중국인이었다. 한 사람은 영국의 다른 곳에 있다가 학교를 옮기면서 이곳으로 이사한 학생이었다. 밤 늦게 도착해 걱정했는데 만나보니 영어도 잘하는 것 같고 별로 내 도움이 필요없어 보였다. 두번째 학생은 오전에 도착했는데 영어가 완전 초보수준이었다. 계약서를 보여주면서 잘 읽어보고 싸인하라고 했더니 오케오케 하더니 바로 싸인을 해버린다. 엑시터가 아닌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 둘을 데리고 왔는데 그 둘은 영국에 좀 오래 산 것처럼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다 아는 것처럼 추임새를 넣는다. 그래 얘네들이 이 친구를 도와주면 되겠다 싶어 안심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의 학생이다. 밤 10시가 다 되어 긴급할 때만 연락하는 번호가 뜨면서 전화가 왔다. 학생 하나가 택시를 타고 기숙사로 가고 있으니 안내를 해달란다. 서류들 들고 튀어나갔는데 택시에서 낑낑대며 짐을 내리는 몸이 갸냘픈 여학생 하나가 보였다. 택시기사가 영어를 못해 오는데 혼났단다. 사무실에서 보낸 택시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인사를 했는데 무슨 말만 하면 땡큐였다. 이 학생이 아는 유일한 영어였다.

한개에 40킬로그램은 나가는(전문가 소견이다.) 큰 짐가방이 두개였다. 그리고 작은 가방 세개. 그 중 두개는 공항에서 짐이 많아 나눠 담느라 새로 산 것 같다. 짐가방은 아주 비싸보이는데 작은 가방들은 깨끗한데다 상표도 안 떨어져있었다. 이것들을 다 들고 혼자 여기까지 어떻게 왔나 참 대견했다. 중국 대도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직항으로 왔더라도 런던에 내린 후 기차를 몇번 갈아타야 했을 텐데 참 대단하단 생각뿐이었다.

이 학생이 새로 살 집은 3층이었는데 큰 짐가방 두개는 둘이서 도저히 들어 옮길 수가 없었다. 작은짐도 들어보니 아주 묵직했다. 결국 다른 남자 레지덴셜 튜터를 불러 짐을 옮겨줬다. 그리고 안내를 해줬다. 그동안 중국어를 안써서 단어들이 생각이 안났는데 이 친구가 딱 감을 잡더니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제대로 된 표현을 바로 중국어로 해줬다. 그래 그래 그거. 부엌은 어떻게 사용하고 쓰레기는 어떻게 버리고 우편물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건물을 이동하면서 하나씩 설명해줬다. 설명이 끝날때마다 무조건 땡큐였다.

근처에 친구가 있느냐고 했더니 아무도 없단다. 다음주 화요일까지는 부활절 휴가기간이라 학교도 문닫고 시내 대부분 가게들이 문을 닫는데 먹을 건 있느냐고 했더니 없단다. 내가 빵이나 라면같은 게 있는데 좀 줄까 했더니 머뭇거린다. 그러더니 사무실에서 받은 과자가 좀 있고, 오늘만 버티면 내일 다른 도시에서 오는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고 하고 내려오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안 편했다. 다시 올라가 옆방의 중국인을 미안하다면서 깨운 후 새로 온 사람이라고 신입생을 소개해줬다. 문제가 생기면 네가 선배니까 직접와서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기랑 다른 친구들이 오리엔테이션 해줄테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자란다.

마지막에 도착한 여학생을 보면서 10년도 전에 중국에 처음 유학갔을 때 생각이 났다. 나도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혼자 북경에 도착했었다. 물론 나는 고맙다는 의미의 씨에씨에도 몰랐으니 이 여학생이 나보다 좀 낫다고 할 수 있다. 어제 저녁 혹시나 해서 안심이 안되는 그 여학생한테 가보려고 했더니 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자는 건지 아니면 친구들을 만나 안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오늘은 좀더 일찍 들러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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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사를 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를 떠나 학교의 기숙사로 방을 옮겼습니다. 거리는 살던 곳과 멀지 않은데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히토쓰바시대학 코다이라 기숙사에는 4개 학교의 유학생들이 모여 삽니다. 전기통신대학교, 농업대학교, 학예대학교, 그리고 히토쓰바시 대학입니다. 히토쓰바시 대학 선배들이 쟁쟁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현재 도쿄 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도 여기 출신이라네요.) 학교 기숙사도 크고 좋습니다. 여기에 400명 정도의 유학생들이 삽니다. 저는 8층에 살고 있는데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중국인들이 자기 어필에 아주 뛰어나 공모 같은 데 당선이 잘 됩니다. 수가 많기도 많지만 자기 어필하는 부분에서는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방값이 대폭 절감이 되는 기숙사 입주 경쟁은 무지하게 치열하거든요. 저는 자기 어필이라기보다는 소설 한 편을 써서 입주에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무슨 소설이냐고요? 비밀입니다.

중국인들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친구들과 같이 살면 일단 지저분한 걸 감수해야 합니다. 부엌과 샤워실은 공용으로 쓰는데 날마다 기름에 볶아먹고 튀겨먹는 음식이 많고 위생 개념이 투철한 사람들이 드물어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일본도 우리처럼 쓰레기 분리수거가 아주 철저한데 아무데나 버리는 습관들이 있어서 분리수거하라고 표딱지 다 붙여놓은 쓰레기통 앞이 무지하게 지저분합니다. 그냥 계속 섞여서 살아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기숙사는 방도 크고 넓어 좋은데 아쉽게도 인터넷이 안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피씨방이 흔한 곳이 아니라 인터넷이 방에서 안되면 접속할 수 있는 곳을 찾기가 힘듭니다. 무선랜카드를 사용해도 남의 회선 그냥 쓸 수가 없는 곳이라 무용지물입니다. 인터넷을 신청하면 보통 한달이 걸린다는데 오늘 업자랑 전화를 몇 번이나 해서 저는 다음주 쯤이면 문명세계와 조우할 것 같습니다. 인터넷이 안되니 단전, 단수될 때 꼭 그 느낌입니다.

오늘 모처럼 인터넷 접속한 김에 포스팅 합니다. 이제 수업 들으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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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