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24: 한국/사람들2007. 11. 9. 12:35
자전거 패달을 힘껏 밟아 학교에 도착했는데 외국인 선생이 감기 때문에 학교에 못나와 휴강한다는 메시지가 교실문 앞에 붙어 있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데 꼭 해야 할 일을 몸이 아파 못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이제 몸 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지에 시간이 떠 버려서 그 기념으로 포스팅한다. 어제에 이어 내가 만난 아름다운(내 맘이다.) 인연 3탄이다.

일본국제교류기금 초청으로 2005년 10월부터 2006년 5월까지 간사이에서 체류하면서 일본 축제 공부를 아주 실컷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이었다. 3개월 후인 8월에는 에티오피아에 갈 계획이라 이 기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하던 참에 화천 나라축제조직위 기획팀장인 어랍쇼라는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사람이 많으니 특별히 할 일은 없지만 알바거리는 있단다. 그렇게 해서 강원도 화천에 가게 됐다.

정말 특별히 할 일은 없었지만 아주 바빴고 그 와중에 내가 꼭 해야하고 나밖에 못하는 일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았다. 화천 사람들은 어랍쇼를 비롯해 마치 동화 속에 있는 사람들 같은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 어디에도 없고 화천에만 있는 그런 사람들 덕분에 나의 3개월은 참으로 유익했고 또 행복했다.

화천에 갈 때까지만 해도 내가 여관살이를 그렇게 오래할 줄 몰랐다. 콘서트를 할 때는 유명 아티스트들과 함께 가기 때문에 지역에서 제일 좋은 호텔에서 머물렀는데 화천엔 호텔 자체가 없었다. 장급 여관이라고 강조를 했지만 나한테 여관은 참으로 낯선 곳이었다. 군장병들이 군민 수보다 많은 화천이라는데 여관을 드나드는 군인아저씨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어쨌거나 알바생 주제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그냥 조직위에서 정해주는 <용화장>이라는 여관에 짐을 풀었다. 조직위에서도 나 같은 사람을 채용해 쓰는 게 처음이라 처우를 어떻게 해 줘야 할 지 모르겠다면서 나한테 물을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여관 독방도 과분했던 것 같다.

그냥 배낭여행을 하는 중에 잠시 들른 곳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면서 여관살이가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장님(주인 아주머니)이 어찌나 친절하신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세탁물이 싹 개어져 방 앞에 놓여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꼭 먹어보라고 방문을 두드리셨다. 여관의 벽 때문에 인터넷 사용하는데 무려 한달이 걸렸고 내가 지내던 방이 좀 습한 것 말고는 여관에서 석달을 보내는 데 큰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일이 잘 끝나서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화천 군수님이 밥을 사신다고 하셨는데 그냥 순대국밥 한 그릇으로 떼우게 되었고, 그러고나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릴 생각이었는데 그날 하필 춘천으로 나들이를 가셨단다. 졸지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핸드폰으로 대신하고 쓰던 짐들은 알아서 처분해 주세요, 하고 화천을 떠났다.

조직위 장석범 본부장님이 겨울에 또 올거지, 이 말씀을 안 하셨으면 다시 화천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에티오피아에 있으면서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 결국 작년 겨울에 다시 화천으로 향했다. 여름의 쪽배축제보다 규모가 훨씬 큰 대한민국 제1의 겨울축제인 산천어축제를 홍보하는 일이 내가 할 일이었다. 조직위가 아닌 화천군에서 지난 여름에 불편하셨던 것 같은데 이번 겨울에는 다른 곳에서 묵는 게 어떠냐고 의향을 물어와 춥지만 않으면 그냥 <용화장>에서 묵을 거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하고 동서울에서 버스를 탔다.

화천에 가던 날 눈이 살짝 내렸던 것도 같고 아무튼 그날 몹시 추웠다. 조직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용화장>으로 귀가를 했다. 아주머니가 어찌나 반가워 하시던지 그 겨울에 대한 예감이 아주 좋았다. 여름에 책상이 없어서 밥상을 하나 사서 노트북을 올려놓고 사용했는데 그걸 박스에서 꺼내 주시면서 다시 오실 것 같아 보관해 두고 있었다, 고 하셔서 감동을 흠뻑 먹었다. 또 내가 쓰던 샴푸며 비누며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것도 그대로 주시는 게 아닌가. 감동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아침 8시만 되면 전화를 해서 얼른 와서 한술 뜨고 가쇼, 이 말씀을 하고는 대답도 안 듣고 끊으시는 통에 일주일을 버티다 여관집 안방에 들어가 아침까지 얻어 먹게 되었다. 내 밥그릇의 밥은 늘 막내 아들 밥보다 양이 많았는데 바깥 밥은 기름기를 걷어내서 영양가가 없으니 밖에서는 무조건 많이 먹어둬야 하니까 사양하지 말라시며 늘 산처럼 밥을 퍼 주셨다. 밥그릇에 밥이 거의 비워질 때쯤이면 아주머니는 옆에서 요쿠르트랑 이런저런 과일을 섞은 야채주스를 만드신다. 내가 밥상에 숟가락을 딱 놓으면 주스 한잔에 알로에 정제된 걸 더도 덜도 아닌 딱 여섯 알을 세어서 주셨다. 그리고 출근을 했다.

시골에서 고생한다고 친구들이 자원방래 할 때가 몇 번 있었는데 여관에서의 아침 식사는 친구들에게도 제공이 되었다. 이 친구들 왈, 여관에서 아침까지 얻어 먹을 줄 몰랐다면서 넌 어딜 가도 너한테 맞춰서 생활을 하는구나, 이러는 게 아닌가. 봉황이었던 사람들을 닭으로 만드는 건 많이 봤는데 넌 여관도 호텔로 만드는구나, 라고 덧붙이면서...

날씨가 많이 춥지 않아 축제가 잘 될 지 걱정을 했는데 산천어축제는 올해도 방문객 100만이란 숫자를 아주 가볍게 넘겼고 전세계 수십여개의 미디어에 화천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홍보하면서 한국의 재미있는 겨울 축제로 대서특필 되었다. 축제 일도 재미있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 화천에서의 겨울나기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용화장 사장님을 다시 만나 따뜻한 인간미를 체험할 수 있어 참으로 좋았다. 서울로 돌아와 감사하다는 기념으로 뭔가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칼날 튼튼한 믹서기를 하나 사서 택배로 보내드렸다. 다시 올거지유, 하셨는데 그냥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화천 갈 일을 못 만들었고 여전히 난 일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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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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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몇 개나 넘어 오오이타현(大分県)의 나카츠에(中津江) 마을을 찾아갔다. 나카츠에 마을은 2002년 월드컵으로 유명해진 마을이다.

당시 나카츠에는 아프리카의 카메룬 선수들이 5일 동안 묵으면서 훈련을 할 곳이었다. 그러나 카메룬 축구협회와 선수단 간의 승리수당 문제로 오기로 한 날에 선수단은 도착하지 않았다.

간신히 돈문제가 해결 된 후 선수단은 비행기에 올랐지만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영공 통과 허가를 얻지 못해 방콕에서 하루 이상을 더 머물러야 했다. 결국 5일이 아니라 하루를, 그것도 잠도 안자고 마을 사람들과 인사만 한 채 카메룬 선수들은 떠났다.

인구 1,600명(2007년 현재는 1,200명 정도)이 사는  나카츠에 마을은 선수들이 오기 전까지 아주 분주했다. 그러나 선수들은 오기로 한 날 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묵묵히 선수들을 기다렸고 마침내 도착한 선수들을 온 마음으로 환영했다.

마을의 촌장이었던 사카모토 야스무(坂本 休)씨를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었는데 올해 77세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분이었다.

훈련을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들이 유명무실해질 순간이었지만 신은 나카츠에를 버리지 않았다. 당시 이 웃기지도 않은 헤프닝을 찍기 위해 미디어란 미디어가 이 마을에 다 모였고, 그들이 먹고 쓰고 간 돈이 한 두푼이 아니었단다.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나카츠에 마을을 보러 오는 행렬이 끊이지 않아 그때 올린 수입만 약 1억엔 정도란다. 경제적인 효과는 그 몇 배이고. 일부는 시설 짓는 데 끌어 들인 빚 갚는 데 쓰고 나머지로 재단을 만들었는데 주민의 참여 의식을 높이기 위해 두당 천엔씩을 걷었단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나카츠에마을 지구재단(中津江村地球財團)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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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2일 오오이타현의 석유 돔에서 일본국가 대표팀과 카메룬 팀의 A매치 경기가 열렸었는데 경기 유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사카모토 씨였다.

4만명 수용 인원에 이날 공식 입장객은 37,240명이었다. 돔에서 이 정도 규모의 행사가 거의 열리지 않기 때문에 이날 경기만으로 1년 장사를 끝낸 셈이라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 열릴 뻔한 경기를 카메룬이 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카츠에 마을이 있는 오오이타에서 열어야 한다고 사카모토 씨가 강력히 주장했단다.

운동장 한켠에는 지역주민 약 400여 명이 카메룬의 유니폼을 입고 카메룬을 응원했다. 경기는 아쉽게도(?) 2:0으로 카메룬이 졌다.

현재 시설들은 전지훈련 캠프로 이용되고 있었다. 혹시 유소년 축구팀 중에서 훈련 캠프장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하셨다. 후쿠오카까지만 오면 나머지는 나카츠에 마을이 다 해결한다고. 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정도는 괜찮단다. 카메룬에 초등학교를 수십개 지어줬는데 앞으로도 계속 지어주겠단다.

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유명한지 '일본 나카츠에 마을 사카모토 씨'라고 쓰면 전세계 어디에서나 배달이 된단다.

최근 일본은 지역간의 합병이 활발하게 추진 중이다. 인구 10만이 안되는 곳은 마음에 드는 옆 동네를 찾아가 합치자, 이런 식이다. 합병이 되고 나면 지역 정체성이 없어지는 건 당연지사. 나카츠에도 옆 동네와 합병이 추진 되었지만 마을 이름만은 살아남았다. 브랜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어질 때 일본에 나카츠에 마을이 있다면 한국에는 화천이라는 곳이 있다면서 슬그머니 산천어축제 홍보 리플렛을 내밀었다. 어떤 마을이냐고해서 5년 전만 해도 사람,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곳인데 그 사람, 물이 한해에 관광객을 100만씩 불러 들인다고 소개했다.

사카모토 할아버지는 시간이 되면 화천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오마이뉴스 민족국제 2007.9.5)

Posted by 윤오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겨울축제로 자리 잡은 ‘2007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가 “얼지않은 인정, 녹지않는 추억”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난 2007 16()부터 1 28()까지 총 23일간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화천천 일대에서 개최되었다. 산천어축제는 1급수 어종인 산천어를 얼음낚시와 루어낚시 등으로 잡으며 즐길 수 있는 이색 체험 축제로 40cm 이상 꽁꽁 언 얼음판 위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참여 수 있는 ‘산천어 얼음낚시’, ‘산천어 루어낚시’, ‘산천어 맨손잡기’등의 산천어 체험 프로그램들과 ‘얼음썰매’, ‘눈썰매’, ‘눈조각’, ‘얼음축구’등의 겨울 체험 프로그램들이 다채롭게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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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제5회째를 맞이한 이번 축제는 총 방문객 약 125만여명, 지역경제 파급효과 약 450억원(직접유입액 추정치), 축제 공식 홈페이지 접속자수 약 50만을 기록하며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산천어 얼음낚시를 비롯한 산천어 프로그램 체험시 제공했던 ‘농촌사랑나눔권’ 발행액은 총 51백여만원, 썰매 체험시 제공했던 '화천사랑상품권' 발행액은 총 36백여만원으로 최종 집계되었다. 특히 농촌사랑나눔권은 화천의 지역 농민들에게, 화천사랑상품권은 화천의 지역 상인들에게 그 혜택이 되돌아간다.

 

산천어축제는 2005, 2006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문화관광축제의 ‘예비축제’ 부문에 선정된 데 이어 2007년에는 문화관광축제 중 ‘유망축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이렇듯 3회 연속 정부가 공인한 산천어축제를 올해는 전 세계가 주목했다. AP, AFP, EPA 등 세계적인 통신사가 앞 다퉈 산천어축제를 소개했고, 영국 BBC, 독일 슈피겔 등 유명 언론 매체의 국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Hwacheon(화천)' 'Sancheoneo(산천어)’를 해외에 확실하게 알렸다. 산천어축제의 개최목적이 청정지역 화천을 홍보하고 어려운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였는데 이번 축제를 통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평가한다.

 

산천어축제가 열리는 강원도 화천군은 북한강의 최상류지역으로 상수도보호구역, 군사보호구역, 산림보호구역 등 각종 개발금지구역으로 묶여 있던 인구 25천의 작은 마을이었다. 80%이상이 산과 물로 이뤄져 있던 이곳에 북한의 금강산댐에 대응하기 위한 평화의 댐 공사를 하게 되면서 낚시의 메카로 불리던 파로호가 서서히 말라갔다. 자연히 낚시 이용객은 줄어들었고, 한 술 더 떠 군장병의 외출외박 정량제까지 시행되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1차 산업과 군장병 면회객, 낚시객을 대상으로 하는 3차 산업이 전부였던 화천의 지역경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생계가 막막해진 지역주민들은 하나둘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2002년 가을, 산천어축제의 모태(母胎)이자 화천의 지역축제였던 ‘낭천얼음축제’를 준비하고 진행하던 민간인 3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각종 규제(수도권 상수원 보호법, 군사시설보호법, 고도제한법 등등)에 묶여 개발되지 못한 청정한 자연과 사람뿐이었다. 화천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원인 자연을 보호하면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당시 이들이 내린 결론은 결국 자연과 생태만이 화천이 살 길이라는 것이었다. 화천만이 가지고 있는 자연생태에 대한 이해와 상생(相生)이 바로 답이었다. 그날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그냥 지나는 길에 들렀어.”라며 합석해 묵묵히 자리를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정갑철 화천 군수(현재)였다. 화천에 공장이 들어올 수 없다면 ‘굴뚝없는 공장’인 관광상품을 개발하자, 그것으로 지역 활성화를 꾀할 수 있음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그에게 지역주민들의 이런 자발적인 움직임은 큰 힘이었다.  

 

1회 산천어축제의 개최결과로 축제의 성공가능성을 확인했고, 진정으로 화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축제의 기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실질적으로 화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축제가 되려면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담당부서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개최 주기가 1년인 축제가 끝이 나면 다음년도 축제를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결국 1회 축제 때 주축이 되었던 민간추진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재단법인을 설립하게 되었다. 산천어축제를 기획하게 된 장석범 운영본부장을 주축으로 산천어축제를 경험한 홍보, 운영부분의 담당자로 구성된 나라축제조직위원회는 화천군의 행정적인 협조를 받아 그때부터 민과 관이 함께 하는 축제를 기획해 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축제조직위는 화천군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축제 기획들을 추진하며 화천 경제에 가시적인 효과를 이뤄 내고 있다. 올해의 경우 역사나 규모에 있어 그 차이가 확연한 중국 하얼빈의 빙등축제, 일본 삿뽀로의 눈축제간의 겨울축제 상생 네트워크를 마련하기 위한 국제 심포지엄을 축제기간에 개최한 바 있다. 게다가 지역축제에서는 처음으로 축제에 상품권을 도입함으로써 지역농민과 상인들에게 경제적인 힘을 실어줄 수 있게 했고축제장과 인근 산농촌지역의 연계프로그램인 ‘농촌사랑방마실’을 운영함으로써 화천 전체가 축제장이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산천어축제는 군에서 혹은 민에서 혼자 만들어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얼곰이부대(산천어축제의 공식 캐릭터이며 산천어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을 지칭한다.)라고 하는 화천군민 전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축제 기간 내내 온몸을 아끼지 않고 축제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한마음으로 똘똘 뭉친 얼곰이부대가 바로 산천어축제의 성공을 가져 온 힘이다. 이제 다섯 돌을 맞이한, 아직은 가야할 길이 많은 산천어축제지만 지금의 숫자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초심을 잃지 않고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축제가 되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월간 '자치행정' 2007년 3월호)
Posted by 윤오순


화천은 축제의 도시다. 화천을 아직도 군인이 많이 사는 그런 군사도시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줄로 안다. 그러나 청정지역 화천에는 군대만 있었던 게 아니라 화천만의 문화가 있었고 무엇보다 축제가 있었다. 화천을 대표하는 축제로는 1월의 산천어 축제, 6월의 비목문화제, 7월의 토마토축제, 7월에서 8월로 넘어갈 때 열리는 쪽배축제가 있다. 이 중 비목문화제와 토마토축제는 화천군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고, 겨울의 산천어 축제와 여름의 쪽배축제는 ‘화천군나라축제조직위원회’라는 축제조직위원회가 따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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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위원회와 관의 유기적 관계를 배우다

화천에서 축제란 그 힘이 아주 막강하다. 지난 1월에 있었던 산천어축제는 인구 25천이 사는 소읍인 화천에 무려 100만이 넘는 사람을 다녀가게 했다. 강원도 그 곳에 화천이 있는 줄도 몰랐던 시절이 있었지만 축제를 통해 이제 적어도 100만인의 사람이 ‘화천’이란 곳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천에서 이런 축제가 있기 전에 고향인 화천을 소개하기가 힘들어 ‘춘천’에서 가까운 곳, 혹은 그냥 ‘춘천’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는 분을 만났었다. 그 분은 지난 겨울 화천에 100만이 다녀가면서 각 종 매체에 화천이 나올 때마다 친구들을 불러 술을 사셨단다. 지역축제의 힘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올 여름 두 달 동안 화천에서 쪽배축제 일을 할 기회가 있었다. 축제일을 하면서 화천이란 곳을 다시 알게 되었고 화천에서 진행되는 축제의 특징을 체감할 수 있었다. 전국적으로 1,000여 개의 지역축제가 쉴 새 없이 오늘도 진행되고 있지만 해를 거듭해도 다 거기가 거기인 축제가 많은 게 사실이다. 화천 축제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에 대해 몇 가지 소개하면서 지역축제의 발전방향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나라축제조직위원회는 화천군의 예산으로 움직이지만 군청과 독립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축제를 만들고 있어 이는 여타의 지방축제와는 다른 운영상의 큰 차이점으로 보였다. 그러나 축제의 전반적인 기획은 조직위원회에서 나오지만 본 축제는 실과별로 담당부서가 있어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자치행정과에서는 축제 종합안내센터를 운영하고, 주민봉사과에서는 캠핑촌을 운영하는 식이다. 홍보의 경우 축제조직위원회에 홍보팀이 따로 운영되고 있지만 군청에서 매체의 언론취재활동에 대해 다각도로 지원해주고 있었다.

 

지역사랑상품권으로 먹고 쓰고 가세요
쪽배축제는 창작 쪽배 콘테스트가 주축이기 때문에 매년 기상천외한 쪽배를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겨울의 산천어 축제에는 창작 썰매 콘테스트가 있기 때문에 해마다 다른 프로그램을 만나볼 수가 있다. 이렇게 참가자가 주도적으로 변화를 주는 프로그램 이외에 기획자들이 머리를 굴려 만들어내는 참신한 프로그램들이 화천 축제에는 많이 보인다. 올해의 경우 1월 산천어 축제 때 사용했던 화천사랑 상품권 제도를 쪽배축제에서도 응용해 사용했다. 콘테스트의 상금 일부(10%)와 캠핑촌 이용료 등에 전부 이 상품권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화천지역사랑상품권은 화천지역에서는 현금과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지역화폐로 식사는 물론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서 넣을 수도 있다. 일반 축제장의 바가지요금을 경험하고 압력밥솥에 마실 물까지 다 싸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화천에 와서 최소한은 먹고 쓰고 가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주 획기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자원봉사자가 없으면 문화행사가 안될 정도라는 얘기가 들리고는 하는데 축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화행사에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많이 늘어나는 추세다. 행사에 자원봉사자를 활용할 경우 경제적인 이유 이외에도 긍정적인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화천에서는 축제에 참여하는 모든 도우미들에게 무료가 아닌 일당을 지급하면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제공하고 있었다. 대학생 도우미들에게 있어 축제는 사회생활의 예비과정으로서의 역할도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또 여름과 겨울에 축제가 개최되고 있기 때문에 방학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고향인 화천으로 오게 만드는 역할도 축제가 담당하고 있었다.

 

위기관리 대처 능력은 단연 탁월

올해는 여름에 비가 많아 쪽배축제의 경우 개최까지 세 번의 준비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애초에 붕어섬이란 곳이 축제 개최지로 결정돼 이곳에 축제 상황실을 비롯해 프로그램 관련 시설을 마련했지만 집중호우로 축제장소를 옮기는 게 불가피했다. 강원도 일부 지역이 비로 인해 축제 전면 취소를 결정했지만 화천은 개최지 변경만으로 또 다시 축제진행을 강행했다. 짧은 시간 내에 변경된 개최지에서 축제를 준비 중이었으나 또 다시 내린 폭우는 거의 절망 수준이었다. 이때도 신속하게 결정해서 시설을 철거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고 다시 주민이 합세해 결국 세 번째 준비한 프로그램으로 올 여름 쪽배축제를 진행할 수 있었다. 개최장소 변경이나 개최여부에 관해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은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순식간이었다. 하늘이 도와 축제 개막일 오전까지 내렸던 장대 같은 비는 오후부터 그쳐 축제가 끝나는 날까지 하늘은 맑음, 그 자체였다.


농촌체험 프로그램 연계,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참가 

올 여름 쪽배축제는 제한된 축제장에서만이 아니라 5개 읍면 7개 마을과 연계해서 운영되었다. 축제 본 행사장에도 30여 가지의 프로그램을 기획해 운영했지만 7개 마을에도 다양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해 외지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일부 마을에서는 강의실과 첨단 프리젠테이션 시설 장비도 마련해 워크숍이나 강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나라축제조직위원회에서는 축제 공식 홈페이지에 마을에 대한 안내는 물론 운영 프로그램까지 관리해주고 있었다. 내년은 좀 더 확대해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화천 축제의 최대 강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누구라도 만나면 소개하고 싶고, 축제에 관심있는 사람으로서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한 부분이었다. 화천엔 재주꾼이 많았다. 나라축제조직위원회의 본부장을 비롯해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들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많다보니 뭘 하나 만들어도 지역 안에서의 해결이 가능했다. 축제 참가자들을 위해 내 놓은 평상은 화천에 있는 황토한옥전수학교 전수생들이 만들었다. 평상이라고는 하지만 예술품으로 보였다. 이번 축제 때 화천천에는 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다리가 놓였는데 이 다리도 전부 지역주민들이 손수 놓은 다리들이다. 현재 하는 일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축제기간이 되면 이렇게 알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다. 목공에 재주있는 분들은 목공으로, 배선에 재주가 있는 분들은 배선으로 축제에 기여하고 있었다.

 

사실 축제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축제를 왜 할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하면 답이 보일지 모르겠다. 축제가 더 이상 지역만의 잔치가 아닌 시절은 벌써 지났다. 그렇다고 기획자들만의 시험 무대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축제를 참가하는 사람들만의 일인가. 그것도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을 힘 빠지게 하는 일이다. 축제는 장소를 제공해 준 사람, 또 만드는 사람, 그리고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 모두가 즐거워야 의미가 있다. 그래야 한해 한해 그 축제가 기다려지고 또 힘을 가지고 오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현대적인 축제들 중에서도 일본 시코쿠 고우치켄의 요사코이 마츠리나 삿뽀로의 유키 마츠리,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페스티벌 같은 것은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이제 그런 축제 하나 가져도 좋지 않겠나.

(월간 '너울' 2006년 8월호-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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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