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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07 일본문화기행(1)-나가사키 1
  2. 2007.06.11 2007년 5월 나가사키(3) 2
  3. 2007.06.09 2007년 5월 나가사키 (2) 4
  4. 2007.06.03 2007년 5월 나가사키 (1)

이국적인 정서가 출렁이는 일본 남부 항만 도시, 나가사키(長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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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라, 나가사키짬뽕, 그리고 원폭투하지

비행기가 도쿄의 하네다 공항을 출발할 때만 해도 하늘은 그리 험악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시간 반만에 도착한 나가사키에서는 기어코 쏟아지기 시작해 온 종일 비와 안개에 싸인 나가사키를 지치도록 보여주었다. 그러다 비가 그친 후에는 높은 습도에 눅진거리는 날씨로 쉴새 없이 땀을 훔쳐내게 만들었다.


나가사키하면 폭신폭신한 카스텔라”, 희멀건하지만 국물맛 하나는 끝내주는 나가사키짬뽕”, 그리고 "지구상의 마지막 원폭투하지"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는
분메이도(文明堂)의 카스텔라는 전국에 지점이 있어 일본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다. 현지에 가면 15대에 걸쳐 카스텔라만을 만들어온 후쿠사야(福砂屋)에 입이 떡 벌어지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전국 어디에서나 전주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나가사키 이외의 도시에서도 식당 메뉴판에서 나가사키 짬뽕을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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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세가지가 나가사키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곳을 떠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나가사키가 왜 일본 3대 관광지의 하나로 꼽히는지, 왜 일본이 똑같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중국이나 한국이 아닌 유럽을 지금도 동경하고 있고, 또 배우자고 외치는지도 알 것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국적 불명의 마을은 혹시 이곳, 나가사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유럽 어느 마을인 것 같은데 사람들은 전부 아시아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러나 일본은 아닌 그 마을.

어디를 가나 이국적인 정서가 출렁이는 일본 남부의 항만 도시, 나가사키(
長崎)는 한국에서 배로도 올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일본이다.

 

나가사키의 시내 여행은 동선을 고려했을 때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나가사키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가지 쪽으로, 일본이 어떻게 바깥 세상과 조우했는지에 대한 변천사와 일본 기독교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또 하나는 바로 평화공원 구역으로 원폭투하지로서의 피해 실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는 곳이다.

 

쇄국시대 문화의 거점, 데지마(出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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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년 에도막부는 포르투갈인에 의한 기독교의 포교를 막기 위해 나가사키의 평민들로 하여금 약 1 5천평의 인공섬을 축조하게 한다. 그리고 그곳에 포르투갈인들을 수용하게 되는데 펼친 부채 모양의 이 인공섬이 바로 데지마이다. 1639년에는 쇄국령으로 포르투갈 상선의 내항이 금지되어 데지마는 일시적으로 무인도가 된다. 그러나 1641년에 히라도(平戶)에서 데지마로 네덜란드 상관이 이전한 덕분에 1859년까지 무려 218년 동안 데지마는 바깥을 향해 열려있는 일본 유일의 교류창구로서 일본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
 

일본이 쇄국시대에 데지마를 통해 다양한 해외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였듯이 네덜란드는 또 이 곳을 거점으로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문물과 정보를 수집해 서양의 또 다른 나라들로 확산시켰다. 이런 면에서 데지마는 서양과 동양의 국제교류의 장소 역할을 톡톡히 했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이후 데지마 주변은 매립이 진행되는데, 1904년의 제2기 항만개량공사로 인해 바다에 뜬 부채꼴 모양의 데지마는 그 원형을 잃고 영원히 역사 속에 그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1996년부터 데지마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고자 구체적인 복원정비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한창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 당시의 생활모습을 식탁에 오른 반찬까지 참으로 꼼꼼하게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나가사키의 해외문물교류사가 궁금한 분들에게 복원중인 데지마 이외에 나가사키역사문화박물관을 추천한다. 이곳에서는 일본이 포르투갈, 네덜란드 이외의 나라들과 어떻게 친구가 되는지, 그리고 조선통신사를 비롯해 임진왜란 이후 국교를 재개한 한국과 어떻게 문화교류를 진행했는지 흥미진진하게 살펴볼 수 있다.

 

기독교의 전래와 탄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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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 문물의 전래와 함께 일본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일찍 기독교가 전파된 곳도 바로 나가사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기독교의 전파가 초기에는 순조롭지 않았던 것처럼 일본도 초기 기독교는 탄압과 수난의 역사였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금교령이 공포되고 니시자카(西坂)에서는 26인의 성인에 대한 처형이 집행된다. 이들은 수레에 실려 이곳 저곳을 끌려 다니다가, 육로로 나가사키까지 흘러와 결국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사건은 일본 최초의 대규모 순교 사건이면서 그 후로도 계속되는 기독교 박해와 수난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1864, 순교한 26인의 성인을 위한 기도를 목적으로 프랑스 신부에 의해
오우라 대성당(大浦天主堂)이 건립된다.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해 무려 300여년 동안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던 우라카미(浦上)지구의 그리스도교도의 자손들이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기독교가 인정되지 않던 시절에 신도들에 대한 탄압은 잔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신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성물을 훼손하게 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수법들이 지극히 일본스럽다. 300년간 기독교 신자임을 드러낼 수 없었던 이 시기에 만들어진 불상들은 부처의 얼굴이 마리아의 얼굴과 묘하게 겹친 형태를 띠고 있다.

 

전쟁에 대한 반성은 없고 평화만 있는 평화공원 

1945 8 9 11 2, 나가사키에 한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당시 원폭투하지 후보에 올라있던 도쿄, 교토, 오사카 등의 대도시를 제치고 지구상 마지막 원폭투하지로 선택된 나가사키는 어마어마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게 된다. 당시 약 24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나가사키에 원폭피해로 인한 사망자는 약 73,000, 부상자도 이와 비슷한 규모인 약 74,000명이 발생했다. 나가사키 대부분이 이때 파괴되었는데 지금은 원폭자료관에 오지 않고서는 불과 몇 십 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도시는 완벽하게 재건되었다.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 후유증으로 죽은 한 소녀가 만들기 시작해 유행처럼 번진 종이학은 평화공원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기념 조형물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평화메시지들은 이방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으며, 원폭자료기념관 안의 원폭 피해 사진들은 경험하지 않은 그 사건의 참상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곳엔 히로시마의 평화공원과 마찬가지로 온통“평화”뿐이었다. 왜 일본이 원폭 피해국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고, 우린 억울한 희생양이며 평화의 소중함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있었다. 반성없는 역사도 그저 비극일 뿐이다.

 

근대 서양풍 건물의 견본시, 글로버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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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버 정원(グラバ)은 막부 말기에서부터 메이지시대에 이르기까지 외국인 거류지였던 미나미야마테(南山手)에 있는 일종의 테마공원이다. 나가사키 시내에 흩어져 있던 메이지시대의 서양풍 저택들을 모아 정원으로 조성한 것으로 당시 외국인들의 생활양식을 완벽하게 복원해 놓았다.

공원 내에는 무역을 통해 일본 근대화에 공헌한 스코틀랜드의 무역상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의 저택이 있는데 이 건물은 1863년에 건립된 것으로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자 일본 국가지정 중요문화재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공원 안에는 나가사키에 살면서 일본 산업에 공헌하고 신문물을 전래했던 외국인들의 유서 깊은 저택 8채가 더 자리잡고 있다.
 

이 저택에 살던 사람들을 비롯해 나가사키를 찾아온 외국인들이 가지고 온 선진 문물 덕분에 일본은 일찍이 아시아에서 과학과 기술 선진국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겁 없이 러시아, 중국을 침략했고, 나아가 미국까지 넘보다가 결국은 전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원폭피해국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공원 한가운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미우라 타마키(三浦環)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저택 한 곳에 그녀의 출연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나가사키를 무대로 한 오페라 <나비부인(Madame Butterfly)>에서 미우라 타마키는 아메리카의 해군병사 핑커톤을 기다리던 나비부인의 역할을 수 차례 맡으면서 유명해졌다.


글로버 정원을 나와서 오우라대성당(
大浦天主堂), 중국인거리, 코우후쿠지(興福寺), 오란도자카 (오란도 언덕)등은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오란도’는 일본어로 네덜란드를 뜻하지만 당시는 동양인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오란도 사람이라 불렀다.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아직도 외국인 거류지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그 옛날 이곳에 살던 외국인들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

                                      

나가사키를 즐기는 법

나가사키 시내는 그리 넓지 않아 도보 여행도 무난하지만 노면전차나 버스를 이용해 좀더 쉽게 여행할 수 있다. 커뮤니티버스인 란란(らんらん)버스는 1회에 무조건 100엔이지만 1일 무제한 승차권은 300엔이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도 위치추적이 가능하다. 그리고 나가사키 시내 한복판에는 트램이 달리고 있다. 란란 버스처럼 1회에 무조건 100엔이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15분에서 20분 간격으로 도심부를 순환 운행중이므로 주요 여행지를 둘러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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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패스포트를 구입할 경우 글로버 정원, 데지마, 나가사키역사문화박물관, 이 세 곳을 입장할 수 있고 란란버스는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어차피 나가사키에 와서 이 세 곳은 지나쳐서는 안되는 곳이니 강추.


한국에 네덜란드 마을로 잘 알려진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는 나가사키 시내에서 기차를 타고 두시간 정도는 가야 한다. 테마파크로 운영되다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지만, 리조트로 운영을 재개하고 있다. 일본에서 전혀 일본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일찍 국제화가 되어서인지 외국인들에 대한 안내가 아주 친절하므로 혼자 떠나는 나가사키 여행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중국인 거리에 들러 중국을 느껴보고, 글로버 정원에 들러 유럽의 19세기를 경험해보는 건 어떨까. 케이블카를 타고 이나사야마(
佐山) 정상에서 나가사키 사람들이 천만불 짜리라고 자랑하는 야경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세종문화회관 발행 <문화공간> 2007년 8월호

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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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회관 벽에 걸린 마리아 상이다. 아, 지극히 일본스럽지않은가. 무라사키시키부가 쓴 <겐지모노가타리>에 나오는 그림들이랑 아주 닮았다.


나가사키를 떠나오던 날 세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첫번째 친구
짐을 다 꾸린 후 유스호스텔 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그 많은 자리를 놔두고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옆에 앉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계속 이것저것 묻는데 일본에 와서 참 낯선 경험이었다. 좀처럼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이지 않는가. 가족이 다 있는데 주말에는 이렇게 혼자 산으로 들로, 때로는 좋은 온천을 찾아 여행을 한단다. 나이는 한 50대 정도. 그동안 여기저기 여행하면서 한국의 50대 아주머니가 호텔이 아닌 유스호스텔에 묵으면서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경우를 아직 못 만나서 이 아주머니가 하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좀 끌렸다. 감성이 여전히 살아있었다. 호기심 천국에 사는 소녀처럼 이것저것 묻는 게 처음엔 어색했는데 나중엔 나도 여유를 부려가며 이렇게저렇게 대답해줬다. 우린 서로 약속하지 않았지만 천천히 보조를 맞추며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고 커피까지 다 마신 후 헤어졌다. 느낌이 아주 좋았다.

두번째 친구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맡기고 평화공원 구역(나가사키 시내 여행은 동선을 고려했을 때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하나가 나가사키역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과 또 하나가 바로 평화공원 구역이다.)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나가려는데 한 일본인 친구가 말을 건다. 거참 아침부터 이상하네. 도쿄 근처의 가마쿠라에 살며 현재는 오하이오주립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란다. 애들이 자꾸 일본에 대해 묻는 경우가 많아 방학을 맞아 본격적으로 여행을 하는 중이란다. 배낭을 딱 보니 두 서너달 짜리 여행자 같았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 떨어져 실의에 젖어 있다가 혼자 영어공부를 해서 대학에 붙었다며 그 부분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내가 봐도 그건 기특하네.
 
일본이 선진국이긴 한데 여러가지로 미국의 안 좋은 부분을 닮아가는 게 안타깝단다. 그건 나도 동감하는 바야. 약속한 건 아니었지만 이 친구와 평화공원 구역에 있는 여러 관광지를 같이 여행했다. 원폭자료관에 가서는 부탁하지 않았는데 이런저런 설명까지 곁들여줬다. 외국에 가서 현지인을 만나면 무조건 칭찬일색으로 가자, 가 내 신조였는데 이 친구랑 원폭자료관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일본에 대해 힐난을 해버렸다. 이 친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원폭 자료관이랑 이런 저런 기념관에 갔는데 이런, 온통 주위에 '평화' 밖에 없는 거였다. 왜 일본이 원폭참사의 피해국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평화가 소중하다는 이야기 밖에 없는 거라. 그 친구도 동감은 한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또 다른 기념관에 갔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아쉽게도 이 친구와 헤어지고 말았다. 아직도 여행중일까. 아니면 미국으로 돌아갔을까. 이 친구는 나가사키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돌아갔을까. 교토에서 무려 12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나가사키에 왔다고 했는데...

세번째 친구
평화공원 구역 여행을 끝내고 점심은 나가사키역 쯤에서 먹어야지 하고 카톨릭 회관에다 맡긴 짐을 찾는데 전화가 왔다. 확인해보니 이 전화가 처음이 아니고 같은 전화번호가 여러개 찍혀 있었다. 전날 스시집에서 만난 벨로루시 청년 '파샤'였다. 학교가 지금 끝났는데 괜찮으면 나가사키 시내를 안내해주겠단다. 계획한 여행은 이미 거의 끝났는데. 자전거가 있으니 금방이라고 해서 그럼, 금방 오라고 그랬다. 그리고는 파샤의 안내를 받으며 현지인만 아는 나가사키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었다. 날씨는 어찌나 덥던지. 난 crazy wheather을, 파샤는 stupid wheather를 외치며 무슨 숙제하듯이 시내를 훑었다. 첫날 비가 와서 안개 속에 묻혀 잘 볼 수 없었던 바다를 마지막 행선지로 잡았다.

바다를 향해 가면서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의 애환, 외국인 유학생으로 사는 사람의 애환,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게 된 사람의 애환에 대해 들어줬다. 앞으로 국제관계를 공부하려는 파샤는 내가 벨로루시란 나라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단다. 그리고 EU에 27개 나라가 가입되어 있다는 걸 안다는 사실도 좀 의외였단다. 그러나 어쨌거나 국제개발을 전공하는 사람을 이 나가사키에서 만나 아주 반갑단다.

일본어는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가장 높은 등급인 1급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대학교에 아시아 언어과가 있었는데 자기는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어를 선택했고 당시 선생은 벨로루시 사람이었단다. 배우는 데 한계가 있어 일본대사관에 연락을 해서 사정을 이야기하며 일본어가 너무 배우고 싶으니 선생과 교재를 좀 보내달라고 했단다. 대단한 열정 아닌가.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쳐 일본인 선생이 파견되었고 딱 두명의 학생이 그 선생한테 일본어를 배웠단다. 이것 보면 일본도 또 대단한 나라다. 그 후 자기는 일본어를 열심히 배웠고 일본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지금 일본에 와 있는 거란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 온 사람들은 잘 모르겠는데 생긴 모습이 전혀 아시아쪽이 아닌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공부를 하든, 직장 생활을 하는 것 보면, 그 인연이 참 궁금해진다.

바다를 보고 난 후 우린 헤어졌다. 본의 아니게 시간을 많이 뺏어 미안하다고 했더니, 나가사키에서 자기를 찾아 온 손님에게 나가사키를 안내할 일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없을 거라 괜찮단다. 너네 학교에 꼭 갔으면 좋겠다, 고 해서 꼭 그러라고 했다.

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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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다녀온 지 벌써 2주가 지난 것 같다.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제 그곳에서 만난 친구한테 메일이 왔다. 내용인 즉슨 지금쯤 메일을 한 번 보내야 내가 그 친구를 잊지 않을 거래나 뭐래나.

마지막날은 호텔에서 묵지 않고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두 곳의 유스호스텔 중 카톨릭센터라고 하는 곳에서 묵었다. 이미 돌아가신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묵었던 곳이란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아주 조용하고 정갈하며, 무엇보다 아침을 공짜로 준다.

일단 짐을 풀고 저녁을 어디서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데스크에 앉아 있는 복스럽게 생긴 아가씨한테 물어봤더니 스시집을 하나 추천해줬다. "미노부스시'라는 곳인데 한 접시에 100엔이라고 해서 처음엔 회전초밥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일반 스시집 같은 곳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스시는 무조건 한 접시에 100엔이라는 거.

아직 일본 스시 이름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막 고민하고 있는데 외국인 하나가 자리도 많은데 굳이 내 옆에 앉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막 잘난 척을 하면서 스시를 고르더니 종이에 스시 이름을 쓰는 게 아닌가. 다행이다. 영어로 쓰고 있었다. 참치 스시면 "MAGURO", 요렇게. 뭐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 나도 한 두어개를 그런 식으로 시켰다. 그러나 스시 두 개로 한끼를 떼우기엔 난 너무 허기져 있었다.

내가 주문에 허우적대는 걸 보고 이 친구는 내가 외국인인 걸 바로 알아차렸다. 친절하게 스시는 말이지...일장 연설을 해준 덕에 겨우 4개를 더 시킬 수 있었다.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해서 한국이라고 했더니 아주 반가워 하면서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맞춰 보라는 거 아닌가. 바로 그냥 "Where are you from?" 해버릴 생각이었는데.

딱 생긴게 유럽풍이다. 그것도 저 동유럽풍이다. 러시아 쪽 냄새도 좀 나고. 그래서 일단 발틱 3국부터 훑어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내 입에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라는 나라 이름을 듣고 이 친구 좀 놀라는 거 아닌가. 그래서 조금 더 내려 오려고 하던 차에 그냥 "나 벨로루시에서 왔어." 실토를 하는 거 아닌가. 일본에서 아직 한번도 자기 나라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댄다. 이런... 내가 그 심정 좀 알지. 모자에 태극기를 박아 넣고 아래에 KOREA라고 씌어 있어도 내가 한국 사람임을 모르던 나라에 내가 있어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대화의 물꼬가 스르르 풀리던 차에 일본에서 뭐하냐, 학교 다니냐, 어느 학교 다니냐까지 왔다. 그리고 내 입에서 히토쓰바시라는 얘기가 나오자 그냥 놀라더니 자기 친구한테 전화를 하는 게 아닌가. 러시아 말 같기도 하고. 나중에 물어봤더니 벨로루시 말이란다. 그리고는 10분도 안 되어 또 한 명의 벨로루시 청년을 만났다. 히토쓰바시라는 대학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않았었는데 5명의 사람한테 추천을 받았고 이제 한번만 더 인연을 만나게 되면 이 학교에 원서를 넣을 생각이었단다. 이런.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첫번째 만난 친구는 'IIYA'라는 친구로 현재 나가사키 의대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고 두번째 만난 친구는 'PASHA'라는 친구로 일본에서 대학원을 가기 위해 올해 4월에 나처럼 일본에 왔다. 우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아주 수다스럽게 떠들었고, 스시집에 왔으면서 스시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학회가 끝나 나른하던 차에 실컷 떠들어 피곤하기까지 해 그만 헤어지자고 했더니 내일 또 보자는 게 아닌가. 그것도 '이이야'가 조용히 있는 '파샤'를 가르키며 이 친구는 늘 한가하니까 내일 네가 나가사키를 여행하는 걸 도와줄 수 있다는 거 아닌가. '파샤'가 당황해하는 것 같아 혼자 여행해도 된다고 했는데도 그게 아니란다. 그래서 뭐 시간되면 그렇게 하라고 하고 자리를 떴다.

교황이 머문 곳도 내가 머문 이 다다미방 같은 곳일까 생각하며 그날 아주 푹 잤다.
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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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일본 저 남쪽 큐슈에 있는 나가사키에 다녀왔다. 홋가이도, 오키나와까지 구경을 했는데 큐슈는 영 기회가 없다가 이번에 학회를 한다고 하기에 그냥 냅다 티켓을 끊었다.

44회째 아프리카 관련 정기학술대회를 열고 있다는 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40년 전이면 1960년대 초반에 이미 아프리카 관련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는 거 아닌가. 그러니 아프리카 여기저기에 일본인들 없는 곳이 없지. 이틀 동안 진행된 학회에서는 발표자만 150여 명이 넘었고 분야는 농업, 지역개발, 문화예술, 교육, 젠더, HIV/AIDS 등 엄청 다양했다. 우리나라는 아프리카 대륙 54개 나라 중에 연구자가 하나도 없는 곳도 있을 텐데 여기는 내가 본 것만 해도 한 나라에 수십명의 연구자들이 있다. 자기 돈 주고 연구하기는 힘들테고 어딘가에서 지원을 한다는 건데 참 부럽다. 내가 연구하는 에티오피아 쪽에도 연구자가 기대 이상으로 많았다. 그 분야가 참으로 다양해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엎고 다시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들었다.

이틀은 학회 대회장에서 보내고 이틀은 나가사키 여행을 했다. 출발하기 전에 별로 정보를 얻을 시간이 없어서 여행사 앞에 꽂힌 팜플렛에 큐슈 혹은 나가사키라고 적힌 것들을 챙겨 공항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새벽 4시 근방이었지만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6시 55분 비행기를 타고는 비행기 앞 좌석에 꽂힌 나가사키 관련 자료들로 대충 지리적인 위치와 관광지 파악을 끝냈다. 그리고 다시 나가사키 공항에서 나가사키 중심에 있는 나가사키 역까지 리무진을 탔다. 편도는 800엔인데 왕복으로 끊으면 1200엔이라는 고급정보를 비행기에서 얻었기 때문에 시키는대로 했다. 나가사키역에 도착해서는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데스크에 앉아 있는 아가씨와 가급적 동선을 짧게 하는 여행일정을 도라도란 짰다. 맛집 정보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정말 정신없이 관광을 했다. 이 얼마만인가. 여행이 아닌 관광이. 우울했던 5월을 확실하게 마감하기 위해 습도가 70%가 넘는, 가히 동남아시아의 그 어디를 방불케하는 나가사키 시내를 종횡무진했다. 첫날 오전에는 비가 쏟아졌는데 3일 동안 비 예보가 없다는 말에 그냥 비를 맞으며 쏘다녔다. 무슨 숙제하듯이 나가사키를 구석구석 훑고 다녔는데 이틀 후 나는 누구를 만나도 나가사키에 관해 잘난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