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통무대예술 장르 중 하나인 노(能)를 처음 감상했을 때 그 느림에 충격을 받았다. 극도로 절제된 배우의 움직임에 침을 삼키기도 힘들 정도였다. 느려도 너무 느린 내용에 대개 객석엔 좌우로 머리를 흔들며 코까지 골고 자는 관객들이 한둘이 아니다. 노(能)에 등장하는 다양한 가면들과 복색들, 몽환적인 분위기도 인상적이지만 난 무엇보다 그 느림이 좋다. 일본이 자랑하는 전통문화들에 그런 정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있다. 화도, 서도, 다도, 정원양식 등등. 전국시대에 사무라이들이 이런 예술장르를 즐겼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피철갑 전투를 끝내고 마음을 다독일 이런 것들이라도 없었다면 사람으로서 그런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겠나. 매일 같이 전투를 치러내는 심정으로 사는 요즘 현대인들에게 해독주스보다 더 필요한 게 결국 마음을 다독일 시간 같은 게 아닐까. 창밖의 파란 하늘에 유장하게 흐르는 구름들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 열심히 할 때 하루 중 내가 나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란 게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잠깐, 샤워하면서 잠깐, 전철타고 이동하면서 잠깐, 그리고 잠들기 전 잠깐이었다. 그나마 정신없이 일어나는 날은 샤워할 때도 비몽사몽, 전철에서도 비몽사몽, 그러니 깨어있을 때 나와 대면할 시간을 전혀 못 만들고, 그런 날은 대개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내 내면은 점점 마른 북어를 닮아갈 수밖에 없었다. <카모메 식당>으로 유명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안경めがね>이라는 작품에서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 한테 묻는다. "사색이란 게 뭐죠?" 일상에서 속도가 완전히 제거된 이 영화에서는 독서도 불가능하다. 사색이 특기가 아닌 사람들은 버티기 힘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냥 멍하니 사색을 즐기는 일일 뿐. 영화를 보면서 바빠서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이상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그러나 사실은 이해가 되는) 내 가족들, 친구들에게 이런 심심한 시간과 공간을 선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에는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식사를 했는데 언젠가부터 노트북 화면을 덮고 밥을 먹기로 했다.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 하늘도 보고 구름도 보고 바람에 춤을 추는 장대같은 소나무들도 구경한다.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얻었다. 가로로 된 창틀, 세로로 된 창틀, 두개의 창틀을 통해 본 바깥 풍경들은 볼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가로로 보다 지겨우면 의자를 옮겨 세로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땐 어린왕자가 자리를 옮겨가며 해가지는 걸 감상하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생텍쥐 페리도 사색이 특기였던 것 같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이 쏟아낸 바람에 너무 일찍 바닥을 마주한 친구가 있어 메일을 썼다. 내가 좀더 일찍 마음을 다독일 시간을 가져보면 어떻겠니, 라는 말을 해줬더라면, 하고 후회했다. 허긴 한창 승전보를 울리는 전쟁터에 있을 때는 친구도 가족도 잘 안 보이고, 그런 충고도 잘 안들린다는 걸 내가 더 잘 알지 않나. 슬기롭게 해결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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