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사람의 이름이 리스트에서 지워졌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마음의 여유가 있기를 바라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안되는 것 같다. 시간관념이 없는 사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 예의가 없는 사람, 폭력적인 언사를 아무렇지도않게 자행하는 사람과는 좀처럼 잘 지내지 못한다. "저렇게 못 생긴 사람은 내 기준에는 인간이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싶지만 정말 있다. 게다가 가방 끈도 엄청 길다. 지금 보다 훨씬 어릴 때는 마음고생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해보려고 아둥바둥했었던 것 같은데 이젠 그런 게 다 귀찮다. 나이를 먹은 게지. 여러사람으로 마음이 번잡해지기보다 단 한 사람이라도 편한 마음으로 오래오래 좋은 시간을 쌓고 싶다.
에티오피아에 있을 때 킨들에 담아간 책을 다 읽어 버리고 책장 한장한장 넘겨가며 한국어로 된 책을 정말 너무너무 읽고 싶을 때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의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만났다. 다음 날 돌려주겠다고 하고는 밤새 읽고, 그 다음 날 또 읽고 돌려줬더랬다. 아무도 날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만난 그 책은 마치 엄마가 차려준 맛있는 밥상 같아 아무렇게나 읽을 수가 없었다. 장정일 씨가 <생각>이란 책에서 그랬지. 자기는 두번 본 영화만 영화라고. 난 그런 철학은 없지만 어쨌거나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연이어 두번이나 읽은 덕분에 내 소중한 책 목록에 오르게 된다. 며칠 전 그 생각이 나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 새로 나온 책이 없나 찾아봤더니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라는 다소 밋밋한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걸 알았다. 아이패드로 읽을 수 있는 버전이 있어 얼른 대출해 읽었다. 선생님 작품은 몇 개 안 되고 큰 딸인 호원숙씨, 그리고 주변 사람이 기억하는 박완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해산바가지',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내가 참 좋아했던 작품들이었는데 이 책에 수록되어 있었다. 개인사를 작품에 많이 노출시켜 마치 내가 잘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을 선생님 생전에도 많이 받았는데 전쟁 때 잠깐 말고는 돌아가실 때까지 참 여유롭게 사셨던 분인 것 같다. 안정된 가정생활 - 남편의 사랑, 자식들의 존경 - 이 늦은 등단이었지만 선생님의 오랜 작품활동의 버팀목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언제나 당당했던 작가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의 분신 같은 주인공들이 작품 속에서 내뱉는 까칠한 대사들, 그러면서도 몹시 쿨한 태도들이 결국은 그런 여유로운 배경에서 탄생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위선적인 주인공의 뒤틀린 모습도 너무 가난해서 배배꼬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뭔가 달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난 오히려 박경리 선생보다 박완서 선생의 작품들이 좋은 것 같은데 평단은 박완서 선생을 늘 두번째로 쳐주는 것 같아 좀 서운하다. <토지>의 위력이겠지만...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산책을 미루고 있었는데 결국엔 우산을 들고 나갔다. 아직도 바람은 쌀쌀한데 달빛 사이로 목련이 개화를 준비하고 있는 게 보였다. 빗물을 흠뻑 머금은 저(?) 목련들이 곧, 정말, 엄청나게 필 것 같다.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