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7.04.27 내몽고 그 사람들
채널24: 중국/사람들2007. 4. 27. 21:32

내몽고에서의 숙소잡기 전쟁

방에 쳐 박혀 아무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도 좋아하지만 배낭을 짊어지고 어딘가로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 셋이서 배낭이랑 텐트를 짊어지고 청량리역에서부터 걸어서 강원도를 한 바퀴 돈 적이 있다. 미시령도 한계령도 우린 걸어 넘었다. 출발할 때 만났던 여행객들이 휴가를 다 끝내고 한계령을 넘어 오면서 이제 오느냐며 반갑게 손 흔들어 주던 그 시절엔 정말 겁나는 게 없었다. 물소리를 따라 설악산을 내려오면서도, 떨어지는 유성을 보며 8km나 되는 백담사를 걸어올라 가면서도 무서운 게 없었다. 말 안 통하는 곳 어디를 가도 다 사람 사는 덴데 뭐,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내몽고에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제까지 혼자 여행 다니면서 그런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두려움 같은 걸 느꼈었다.


새벽 두시 근방에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에 도착했다. 예의 호객행위를 하는  ‘삐끼’들이 달려들었다. 북경이나 상해처럼 큰 도시에서 떼로 몰려드는 삐끼들도 겁이 안 났었는데 새벽에 만난 내몽고의 삐끼들은 제대로 걸음을 떼 놓을 수 없을 만큼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왜 그런지는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공포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다 누가 그랬던가. 빨리 숙소를 찾아야 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하나 고민이었다. 하나를 찍었다. 여기서 흥정을 해서 하룻밤 묵어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맘처럼 잘 안됐다. 배낭을 메고 다시 나와 두 번째로 간 여관에서 다시 흥정을 시작했다. 말이 먹히지 않았지만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그러나 그냥 묵기에는 하룻밤 방값이 너무 비쌌다.


초대소(招待所)라는 데가 있는데 이런 데는 가격은 저렴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허용이 안 된다. 그래서 대부분 빈관(賓館) 같은 데서 묵게 되는데 법적으로 외국인은 내국인과 같이 잘 수가 없다고 그런다. 결혼허가증이 없으면 남자랑 여자도 같이 묵을 수가 없단다. 저~~~ 지방 시골 변두리는 초대소에서 외국인도 내국인과 같이 묵을 수 있고 한 방에 다국적으로 남녀노소 다 잘 수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무조건 안 된단다. 법적으로 그렇다는데 할 말 없지. 혼자 다니는 여행이 편하기는 하지만 숙소 잡고 뭐 먹는 데는 이래저래 여럿이 가는 게  편하다. 특히 중국은 아직은 혼자 다니기에 불편한 게 너무 많은 곳이다.

 

혼자서 자는 건 35원인데 침대가 세 개짜리니 105원을 내란다. 그 새벽에 저걸 다 내고 자야 되나 갈등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배낭을 메고 나오려는 데 주인이 잡는다. 여자 혼자 여행 하는데 경우가 아닌 것 같다면서 90원만 받겠단다. 다시 배낭끈을 잡는 시늉을 하자 60원까지 내려왔다. 미안하다 그러면서 나가려고 일어서자 마지못해 40원에 자란다. 사실 중국 배낭여행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도시도 아닌 그곳에서 40원은 정말 비싼 거다. 그날 공포감에 휩싸이지만 않았으면 그냥 밀고 나가는 건데. 결국 40원에 배낭을 풀었다. 초원과 사막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데 이까짓 쯤이야 뭐.

빵차 타고 초원으로 출발
아침에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참으로 요상도 하지. 새벽에 느꼈던 공포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내가 아주 잘 아는 어느 동네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초원을 어떻게 갈까 궁리를 하고 있던 차에 두 총각을 만났다. 두리번거리며 초원까지의 안내자를 찾았는데 결국엔 이들과 동행하게 됐다. 이미 초원을 보는 철이 아니라서 삐끼가 아쉬운 게 아니고 나 같이 초원에 가려는 사람들이 아쉬워할 때라는 걸 잘 모르고 흥정을 좀 쎄게 했더니 처음엔 도무지 씨가 안 먹혔다. 초원을 보겠다고 온, 역 주변에서 만난 한국 아가씨들 둘과 그 총각들 둘, 이렇게 다섯이서 빵차(우리나라 승합차 보다는 작은데 모양이 구운 식빵모양이라며 중국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부른다.)를 타고 초원을 향했다.

간단한 자기소개 끝에 형이라는 사람은 현재 친척 일을 도와주고 있고, 동생은 그 형이란 사람을 도와주고 있다고 그랬다. 결국은 가족끼리 하는 장사였다. 여행 내내 일만 터졌다 하면 아르바이트라고, 그 놈의 아르바이트라고 계속 변명을 하는 통에 복장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동생은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지만 할 줄 아는 말이 별로 없다면서 몹시 부끄러워했다. 전공이란 게 다 그렇지 뭐. 그러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고,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내몽고만 해도 한국에 대해 관심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럴만한 창구가 없다면서 많이 아쉬워했다.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도 대학에 개설된 한국 관련 학과도 없고 마땅히 배울 만한 데가 없단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한국말도 가르쳐 주고 한국문화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고도 그랬다. 지금은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그랬다.

 

중국 대도시에 가 보면 한국 제품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들어오는지 알 수가 있다. 옥외광고판에서 한국 대기업의 광고를 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중국말로 더빙이 되어 방영을 하지만 텔레비젼에서 한국 드라마를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다. 몽고(내몽고는 중국 자치주이지만 내몽고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몽고는 중국 내에서 외몽고라고도 부르며 수도는 울란바토르이다) 에서 정부차원에서 한국문화를 배우겠다고 정부 각료가 한국에 다녀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류가 거품이라는 사람도 많지만 이 청년의 얘기를 들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몽고 그 청년들한테 처음부터 믿음이 간 건 아니었지만 일단 차를 출발시켰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초원일 줄 알았는데 가는 도중에 계속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타고 가는 차가 불법이라서 운행을 못 한다는 거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냐고 그랬더니 조금만 기다리란다. 조금만이 두 시간은 좋히 걸렸던 것 같다. 포장도 안 된 길가에 쭈그려 앉아 바람에 이는 먼지를 다 맞아가며 일이 해결되기를 기다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파란 하늘과 초원, 경찰차, 그리고 빵차 뿐이었다. 결국 경찰서까지 가서 경찰이 지정해 주는, 합법적으로 운행이 가능한 차를 타고서 말도 있고, 몽고 파오도 있고, 노래하는 몽고 아가씨도 있는 그 초원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문제 다시는 없지요, 했더니 걱정하지 말란다. 그런 말을 떠나올 때까지 계속 들어야 했다. 문제는 이걸로 끝이다, 믿어 달라, 우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라고.

가도가도 끝없는 몽고 초원에서의 하룻밤
1년에 4개월 정도만 일을 해서 나머지 계절을 먹고 사는 이 사람들한테는 초원의 풀색들이 남아 있는 그 기간은 어찌 보면 대목이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는지 파오의 온 가족이 나와 우리를 반겼다. 자주 손을 씻는 습관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물이 워낙 귀하다 보니 먹는 것 이외에는 제한적으로 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위생을 걱정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닦는 일은 오히려 사치였다. 양 한마리를 통째로 잡는 데도 그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물을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처럼 펑펑 수돗물을 틀어 쓰는 사람 입장에서 몹시 부끄러웠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랑 생긴 모습뿐만 아니라 비슷한 문화가 많았다. 옆자리에서 구토를 하면서 계속 술을 마시는 것도 똑같고 안 먹겠다는데 자꾸 술을 권하는 것도 똑같고 부르기 싫다는데 죽어라고 노래를 시키는 것도 똑같다. 먹기 싫다는데 먹던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서 접시에 올려 놔주는 것도 한국에서 흔히 봤던 풍경들이고 아직 멀었는데도 다 됐다고, 계속 그러는 것도 낯설지 않은 모습들이다. 일행 중에 하나가 <소양강 처녀>를 불렀는데 그 리듬을 알고 있다면서 몽고 전통악기로 비슷한 연주를 해 주었다. 어디서 이 노래를 들어봤냐고 그랬더니 너네가 부르는 노래의 리듬들이 몽고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의 리듬과 비슷하기 때문이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자리에 같이 있던 그 곳의 아가씨가 일어나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했다. 이 아가씨의 노랫소리는 귀를 즐겁게 해주지 못했지만 춤만은 눈을 충분히 즐겁게 해주었다. 노래가 끝나자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한 잔을 권하는데 이걸 거절하면 절대 안 된단다. 안마시겠다고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알코올 도수가 60도나 되는 이 술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나면 목이 타는 건 둘째 치고 남자도 굵은 눈물이 쑥 나온다. 어쩔 수 없이 한 잔을 털어 넣고 나도 눈물을 쏙 뺐다. 이게 얼마나 독한 술인지 한 잔 담아 불을 붙여 봤더니 파란색 불이 20분을 넘게 탄다. 그걸 여기 사람들은 탁탁 연거푸 목에 털어 넣었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려 가면서.


비록 규모가 넓지는 않았지만 낙타가 돌아다니는 사막에도 갔었는데 내 머릿속에 사막은 아주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고 푸른 초원만 계속 영화필름처럼 돌아가고 있다. 지평선을 따라 몇 시간이나 말을 타고 달려도 초원은 끝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 말 위에서 하는 게임 같은 걸 구경했는데 경기 모습은 스포츠 보다 전투에 더 가까웠다. 이제 초등학교나 다닐까 싶은 꼬마도 아주 능숙하게 말 위로 몸을 날려 사뿐히 말안장에 앉는 거 아닌가. 초원에서는 아이들이 그렇게 길러지나 보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의식세계는 문명의 혜택을 듬뿍 받고 살아 온 이쪽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뒤꿈치만 들면 별이 한 움큼
여행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초원 구경을 많이 했는데 몽고 초원에 비하면 그건 초원도 아니었다. 그냥 풀밭 정도라고 해야지. 초원도 초원이지만 밤에 올려다 본 밤하늘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정말 발뒤꿈치를 들면 별을 한 움큼 딸 수 있을 만큼 하늘이 낮고 또 맑았다. 유성이 주욱주욱 선을 긋고 떨어지는데 60도짜리 초원 소주를 마시고 대취한 내가 그때 그 유성을 보고 뭘 빌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어린 베토벤이 아버지한테 혼나고 나서 호숫가로 뛰어나가 누워서 바라본 밤하늘의 그 별보다 훨씬 더 많은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평선이 안 보일 만큼 드넓은 초원은 밝은 대낮에 나를 미치게 만들었는데 내몽고의 밤하늘을 수놓은 그 많은 별들은 파오에서 솜이불을 끌고 나와 한겨울 같은 여름밤의 초원에 나를 벌러덩 드러눕게 만들었다.

떠나 올 때 그들이 우리한테 사기를 쳤다는 걸 알았지만 셋 다 합의를 봤다. 별을 그렇게 봤는데 돈 몇 푼이 대수냐. 끝없는 초원을 보러 내몽고에 갔다가 나는 원없이 별을 보고 왔다.


(여행시기: 2001.8~)

'채널24: 중국 >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같은 이야기  (3) 2013.03.10
계림 양수오의 뱀부하우스 가족  (4) 2007.05.13
독일에서 온 카티아  (1) 2007.05.03
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