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24: 중국/사람들2013. 3. 10. 01:01

그 애는 수업시간에 늘 딴짓만했다. 레벨테스트 결과가 이상하게 나와 분반이 잘못되는 바람에 나처럼 실력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반에서 공부를 하게 된 애였다. 뭐 그렇다고 엄청 어려운 반은 아니고 완전 바닥 다음 단계였는데 그래도 외국어인지라 도통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결국 우린 실력이 완전히 드러나는 바람에 일주일 후 정상적(?)인 바닥반으로 이동을 할 수 있었다. 바닥반으로 옮겨오고 나서도 그 애의 딴짓은 계속되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는 일 이외에는 모두 딴짓이니 그애가 했던 짓들은 지금 생각해도 딴짓이 맞다. 미국에서 온 이 베트남 애는 옥스포드에서 나온 영중사전도 껍데기 제목이 한자로 되어있다고 믿을 게 못되는 중국산이라고 우기고, 영어로 일대일 대응이 안되는 단어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막 우기는 완전 또라이였다.


이 친구한테 백인 형이 하나 있었다. 밥도 함께 먹고, 자주 같이 다니는 데 친형이라고 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지도 않고, 아, 백인인 저 친구네 부모가 이 베트남 애를 입양을 했구나, 하고 혼자 상상을 했었다. 애초 우리 셋은 같은 반이었는데 나와 또라이가 바닥반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같이 공부할 기회는 딱 일주일밖에 없었지만, 그런 이유로 백인 친구와 만나면 목례정도는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 근데 이 백인 친구가 언제부터인가 아침마다 내 방문을 두드리며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학교에 같이 가잔 이야기지. 그 전엔 만나면 웃으며 목례도 하던 친구가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하고는 내 눈도 잘 못쳐다본다. 나, 너 좋아해, 뭐 이런 건데, 아무튼 기다리지말고 먼저 가라고 하기를 한 일주일 했더니 정말 더는 안 기다리는 사이가 되었고, 이젠 목례도 안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허나 동생인 베트남 친구와는 거의 1년 넘게 베프처럼 지내게 되었다. 여자친구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내게 와서 상담을 할 정도로. 나이는 나보다 한 열살은 어린 것 같은데 이 놈이 내 앞에서는 늘 오빠처럼 굴면서 죽는 소리도 곧잘 했었다. 어디서 보고 들은 건 있어가지고... 


내가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한 날 베트남 친구가 저녁초대를 하고 싶다고 해서 응했는데 장소가 북경의 최고급 베트남 레스토랑이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보니 여자친구와 백인 형이 거기 나와 있었다. 내가 어색해했더니 또라이가 그런다. 너 알지, 우리 형이 너 좋아했던 거. 그래서 같이 초대했단다. 베트남 쌀국수 말고는 먹어 본 베트남 음식이 없었는데 색다른 음식을 정말 많이도 시켰고, 그런 데서 먹으니 또 맛도 있었다. 형이 화장실에 간 사이 또라이가 그런다. 형이 어릴 때 부모님이 입양을 했다고. 아, 뭐야. 난 백인 집에 이 친구가 입양을 간 줄 알고, 가끔 연민같은 것도 느끼고 그랬는데 내 감정이 완전 싸구려로 전락을 해버린 순간이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그 백인 친구와 따로 술 한잔을 했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마셨는지 기억이 안난다. 물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중국 유학시절 실제 있었던 일이다. 또라이와는 그후로도 가끔 메일도 주고받고 그랬는데 언제 소식이 끊어졌는지 모르겠다. 기숙사에서 별별 소문이 많았었는데 둘 다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지. 오늘 트위터에서 어떤 아가씨가 10년도 더 전에 연수시절 만났던 어떤 남자에 대해 추억하며 올린 글을 보고 나도 이 형제들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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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북경 평양식당 해당화

북경 유학 시절, 친구를 통해 평양식당인 ‘해당화’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우리 돈으로 천 원도 안 되는 몇 원짜리 중국 음식에 길들여져 있다가 해당화에서 먹었던 북한 음식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해당화'의 ‘가재미 식혜’는 제일 좋아하는 음식 목록에 올려 놓고 있다.


북경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가끔 가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값만 비싸고 한국에서 먹었던 맛과 달라서 갈 때마다 후회를 했던 기억이 난다. 중국에서 운영하는 한국 식당은 대부분 주인만 한국 사람이고 주방에 있는 사람들이나 종업원들이 조선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들은 한국 사람과 말은 통하지만 그들은 한국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한국식 서비스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낯선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음식 맛도 대부분 중국에서 생산되는 재료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변형된 맛, 그러니까 중국스러운 비빔밥에 중국스러운 불고기가 나온다.


그러나 ‘해당화’는 달랐다. 북한에서 직접 들여온 재료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두릅나물’ 같은 경우는 향이 얼마나 진한지 모른다. ‘평양 통김치’는 한국에서 먹어 본 김치 맛 그 이상이었다. 서비스 하는 종업원들도 전부 북한의 고려호텔을 비롯한 고급 호텔에서 소양교육을 받고 파견된 사람들로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북한을 느낄 수 있다. 음식 이름들도 백두산 들쭉술, 단고기무침 등 ‘조선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해당화'를 찾는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 보다, 중국 사람들 보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한국 사람들이 '해당화'를 많이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북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해당화'의 음식 맛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음식점에서 맛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던가.

북한 문화를 파는 해당화
'해당화'는 대개 저녁 9시 반까지 영업을 한다. 손님이 많은 시간에는 홀에서 서비스를 하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종업원 몇 명이 무대에 올라가 기타와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반주에 맞춰 귀에 익은 ‘반갑습네다’ 같은 북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해당화' 버전으로 부르는 ‘아침이슬’은 들을 때마다 묘한 감동이 밀려 온다. 가끔씩 흥에 취한 한국 손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대에 올라가 같이 부르겠다고 마이크를 달라며 성화를 대거나 사진을 찍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도 일종의 공연이다. 공연이 끝나고 정중히 양해를 구해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영 보기에 민망하다.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식당, 특히 중국에 나가 있는 한국 식당은 ‘해당화’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의 비용 몇 푼을 아끼려고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곳에서 내용은 빠진 겉만 번지르르한 한국 식당이 너무 많다. 한국 음식이 그리워 마음 먹고 찾아간 식당인데 전혀 한국 음식 맛을 느낄 수가 없을 때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차라리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렴하게 먹고 나오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말이다. 한국 식당을 이용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중국에서 뭘 크게 기대하겠느냐는 거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 식당을 이용하는 중국인이나 다른 외국인이 이런 음식 맛을 한국 맛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기와 지붕에 상호만 한글 식당이면 뭐하나. 안에 들어가면 조선족 주방장이 중국산 재료로 만든 음식이 나오고, 조선족이 중국식으로 서비스를 하는데 그게 어디 한국 식당인가.

‘해당화’는 북한 음식만 파는 곳이 아니다. 북한 문화를 파는 곳이다. 우리 눈에는 낯설고 때론 촌스럽기까지 한 것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이다. 북한 문화. 우리로서는 ‘북한스럽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문화를 그들은 철저히 돈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들이다. GDP는 우리가 월등히 높지만, 문화를 파는 재주에 관한한 ‘해당화’의 그들이 한 수 위로 보인다. 오늘도 한국 사람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그들은 찌개를 나르다 기타를 메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반갑습네다’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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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채널24: 중국/사람들2007. 5. 13. 11:29
드디어 계림, 눈에 넣다

중국에서 백두산보다 더 가고 싶었던 곳이 사실, 계림이었다. 중국 역사책에서 얻은 정보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진을 통해 본 계림을 보고 그곳이 그렇게 가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뭔가 꼭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그래, 문득 들었다. 내가 가 본 그곳엔 하늘도 있었고 자연이 만들어 놓은 근사한 풍광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다.


새벽 6시에 계림역에 도착을 했다. 여행할 때 여행 책자 같은 것 없이 주로 다니는데 그렇게 다니기에 중국은 아직 많이 힘든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문화가 잘 정착된 곳도 아니라서 숙소 잡기도 너무 힘들고 호객행위가 정말 장난이 아닌 나라다. 큰 도시를 가 봐도 그렇고 관광지는 특히 정도가 심하다.

리강을 유람하고 흥평이라는 데서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게 여행 목적이었는데 새벽 6시에 도착한 계림역은 너무 황량했다. 양수오까지 가야 배를 탄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이거 참 막막하기 그지없다. 저 많은 호객꾼들 중 누구 하나를 골라야 하지만 무리수도 이만저만 무리수가 아니다. 아무나 찍었는데 바가지를 옴팡 씌우려 작정을 한 게 보인다. 계림 같은 곳도 이런데 오지는 말해 뭐하겠나. 계림역에서 양수오까지 가는 버스를 타야한다. 바가지 안 쓰고 저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 지 참으로 갈등이로다. 결국 나는 탔고 5원이면 가는 곳을 25원 부르는 바람에 새벽 댓바람부터 한 바탕 하고는 5원을 던져줬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양수오까지 가는 버스에서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계림의 냄새를 조금 맡을 수 있었다.

양수오는 이미 서양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로이름에 웨스턴 스트리트도 있을 만큼 양키화가 돼버렸다. 중국에서 중국을 잃어버린 동네에 도착한 이방인은 숙소부터 찾아야 하기 때문에 흥정을 시작하러 돌아다녔다. 10원이면 하룻밤 잔다는데 무조건 40원 50원이다. 한 집을 딱 골라, 내 오늘밤 너네 집에서 잘 테니 배낭이나 맡겨 달라고 하고는 얼른 리강 유람에 들어갔다. 대 여섯 시간씩 배를 타고 리강을 도는 사람들도 있는가 본데 두 시간 정도면 넉넉한 것 같다. 같은 풍경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한 시간 지나면 졸리기 시작한다.

400원짜리 리강 유람을 50원에
유람을 하는데 단체로 가면 싸다고 해서 프랑스 여행객들이랑 같이 움직이는데 가격을 물어보니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외국인과 내국인에게 이중요금을 적용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어쨌거나 난 50원을 냈는데 다른 친구들과 금액이 달랐다. 그 두 배인 친구들도 있었고. 중국이 이런 나라다.

이중 요금 하니까 생각이 난다. 홍콩 옆의 광주에서 계림으로 넘어 올 때다. 광주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버스 터미널이 있는 줄도 모르고 역 가까운 데에 있는 매표소에서 계림까지 버스표를 샀다. 버스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버스와 다르게 내부가 침대차로 꾸며져 있다. 한 침대에 둘씩 누워 여행을 하는데 옆 사람 잘 못 만나면 그 여행이 또 고역이다. 뭐 그렇게 말할 필요까지 있겠느냐 하겠지만 이동하는데 10시간이 넘을 때도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할 게 못 된다. 일명 닭장차를 타겠다고 90원짜리 표를 끊어서 버스를 타려다가 공용터미널에서 혹시 몰라 티켓 가격을 물어봤더니 68원이다. 또 속았다. 속지말자 아무리 다짐을 해도 중국 사람들의 상술을 당해내지 못한다. 버스를 타서는 침대칸 하나에 자리를 잡았는데 옆자리에 예쁘장한 아줌마가 탔다. 이번 여행은 편하겠다 싶었다. 언젠가 탄 버스에 아줌마가 어찌나 잠을 험하게 자는지 원. 또 궁금해서 물어봤지. 얼마짜리 표예요. 자기는 자주 버스를 이용하는데 10원짜리란다. 이건 말도 안 된다. 광주에서 계림까지 그 거리가 얼만데. 하지만 사실인걸. 혹시 중국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들이 있으면 참고하시기를.


50원짜리 크루즈를 하려고 하는데 또 그게 쉽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뜨지를 않는단다. 하늘이 저렇게 맑은데 왜 안 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관에서 나와서 위험하다고 오늘 배를 띄우지 말라고 했단다. 다들 일정이 있는지라 안 된다 사정을 해도 투어 책임자는 어쩔 수 없다는 말 밖에 안한다. 다시 사정을 했더니 하는 말이 400원을 주면 할 수 있단다. 싼 배는 못 움직이고 400원 짜리는 배를 띄울 수 있단다. 우리 팀 14명 중에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었던지라 타지말자, 라는 팀의 의지를(?) 투어 책임자한테 전했다. 그래서.... 그날 50원 짜리 리강 유람을 했다. 결국 또 바가지를 씌우려던 거였다.


양수오 뱀부하우스에서 1박 2일

리강 유람이 끝나자 또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어디서 자야하나. 배낭 맡아 준 집 가격이 영 맘에 들지가 않았다. 숙소 잡기 전쟁이다. 사정을 얘기하고는 그 집을 나왔다. 뒤통수가 부끄러웠지만 전날 좋은 잠은 다음 여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니 어쩔 수 없다. 배낭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찾다, 그러다 발견한 곳이 뱀부하우스였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곳은 한국 여행 책자에도 소개가 된 유명한 곳이었다.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깨끗한 곳이라 짐을 풀기로 했다. 매트리스가 다섯 개 놓여있는 도미토리 스타일의 옥탑방이었다.


방에 올라갔더니 스무 살짜리 프랑스 남자애가 일주일 째 묵고 있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웃으면서 인사 할 때만 해도 이 친구가 새벽까지 나를 피곤하게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저녁을 먹고 들어왔더니 이 친구가 말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거다. 일명 냉방병이었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병원은 죽어라고 안 가겠다 그러고. 영어도 못하고 중국어도 못하는 이 친구가 계속 하는 말은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질 거란다.  할 수 없이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열을 식혀보겠다고 애를 썼는데 헛수고였다. 세 시간을 그렇게 물수건으로 고열을 내려보겠다고 용을 쓰다가 뱀부하우스 식구들을 불렀다. 그래도 병원은 죽어도 안 가겠단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돈 때문이었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배낭여행객들 주머니는 늘 넉넉하지 않다. 그래서 그랬던 거였다. 중국 침 한 방이면 쑤욱 열이 내려가는 것을. 무려 세 시간이나 이방인을 간호해준 덕분에 뱀부하우스에서는 15원 짜리 방비를 10원으로 할인해 주는 호의를 내게 베풀었다.


아침이다. 떠나야 한다. 자전거를 꼭 한 번 타고 싶은데. 갈등을 했다. 산드라 블록을 닮은 여주인의 시동생이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한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자전거를 타고 양수오 일대를 다 돌았다. 엄마 사는 곳도 데려가 주고 동네 사람들 사는데도 데려가 주었다. 죽어라 사진 안 찍겠다고 했는데도 양수오를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반드시 사진을 찍는다는 곳에 나를 세워 놓고 카메라를 빼앗아 사진을 찍어줬다. 자전거를 타고 발목까지 물이 올라오는 시내를 가로 질러 본 사람들은 그 기분이 어떠한지를 알리라. 즐거웠다. 내가 여행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까맣게 다 탔다. 태양이랑 마주친 살이란 살들은 전부 타서 시뻘개져 있었다. 시장에서 수박을 두 통 샀더니 뭐하려고 두 통씩이나 사냐고 그런다. 파티를 하려면 두 통은 필요할 것 같아 큼직한 걸로 두 통을 샀다.

 

다시 뱀부하우스. 그 사이 식구들이 많아졌다. 산드라 블록을 닮은 여주인, 남편, 딸, 꼭 한국인처럼 생긴 남편 친구, 일 거들어 주는 아가씨, 주방 아줌마, 열 내려간 프랑스 친구 등등. 화상을 입어 따가워 죽겠다 그랬더니 식구들이 다 달라붙어 감자를 저며 붙여줬다. 수박 잘라서 나눠 먹자고 했더니 칼로 잘게 잘라 입에 넣어 준다. 양 팔에 감자를 잔뜩 붙여서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옆에서는 자꾸만 하루 더 묵고 가란다. 열 내려간 프랑스 남자애는 눈치만 보고 있고. 가야한다 그랬더니 샤워라도 하고 가란다. 그럴 수 없다 그랬는데 난 더 이상 이 집 손님이 아니란다. 중국이 또 이런 나라다.

 

누군가를 죽도록 그리워하면서 살 팔자

여주인 보고 산드라 블록을 닮았다고 했더니 그게 누구냐고 그런다. 내가 그 여자 나오는 영화를 선물하겠다고 하고 여기저기 VCD 파는 가게를 다 뒤졌는데도 그 여자 나오는 영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 그 흔한 ‘스피드’가 한 장도 안 보인다. 달랑 내 성만 알고 있는 그 사람들을 만나러 언젠가 또 양수오에 갈 것이다. 카펜터즈를 좋아하는 그 여주인한테 노래 CD랑 산드라 블록이 나오는 영화 CD를 들고 나의 봄날에 다시 한 번 가 보리라. 살이 벌겋게 익어도 또 가서 자전거를 타 보리라. 형이 소개시켜 주는 홍콩 회사에 취직하려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내 가이드는 홍콩에서 취직이 됐을까. 밤새 부산을 떨게 만들었던 그 프랑스 친구는 또 어떻게 살고 있나. 주소 적어 달라고 그럴 때 이메일 주소라도 알려 줄걸.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나는 누군가를 죽도록 그리워하면서 살 팔자라고 어떤 사람이 그랬었는데 그 말이 맞나.

 

(여행시기: 2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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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7개국어 구사하는 독일 소녀 카티아

카티아를 처음 본 사람은 카티아가 스물이란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 번도 몸무게를 물어 본 적은 없었지만 100kg은 충분히 넘을 거구다. 한국에서 온 친구들은 대충 마흔쯤으로 카티아의 나이를 짐작한다. 아, 정말 스물인데. 이름 만큼이나 얼굴이 예쁜 카티아는 독일에서 온 친구다. 수화까지 포함시키면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일곱 개나 된다. 독일어는 모국어니 당연하고 영어, 네덜란드어, 라틴어, 중국어, 어설픈 한국어로 자기 의사 표현을 할 줄 안다.


밖에서 만난 대부분의 외국인 친구들에게서 받은 인상 중에 하나가 모국어는 기본이고 영어를 참 잘 한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 영어 못한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만난 일본 사람들, 정말 영어 잘 한다. 자국말만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 밖에 보지를 못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인들도 프랑스어나 스페인어, 독일어와 같은 인접 국가들의 말을 할 줄 안다. 내가 만난 카티아도 그 중 하나였다.


나 같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간 사람들은 중국의 풍경들이 그렇게 많이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시대를 20년쯤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아주 못 살던 그 때를 떠올리면 된다. 사람들 생긴 모습도 비슷하고 문화가 비슷한 것도 많다. 하지만 카티아한테 중국은 새로운 문화 천지였다. 서로 얘기를 해보면서도 느낀 일이었지만 카티아가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면 그녀가 겪은 문화의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해 볼 수가 있었다. 저런 건 한국에 다 있어, 하고 카메라에 담지 않은 장면들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겨져 있었다.


중국 서민들의 아침 풍경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의 아침 시장. 내가 중국에서 머물렀던 곳의 아침 시장엔 볼거리, 먹을거리가 참 많았다. 조금 더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의 건방진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내 눈을, 내 입을 호들갑스럽게 만들 만한 것들이 정말 많았다. 저런 걸 사용할 수 있을까 싶은 데 그런 것들을 중국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산다. 그것도 깎아 달라고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 다음에 보따리에 집어넣는다. 중국 사람들이 의심 많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지퍼로 크게 주머니를 달아놓은 팬티를 보고 카티아랑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한국 사람들이야 옛날 할머니 쌈지 돈 넣어 놓는 것 보면서 자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게 낯설지 않겠지만 카티아는 볼 때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은 밖에서 식사 해결을 많이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침시장에서 죽이나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밀가루빵 같은 걸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다. 한국 김치를 중국말로 파오차이(泡菜)라고 하는데 중국에도 맛이랑 모양이 다른 김치가 있다. 한국의 김치 같은 이 파오차이를 중국사람들은 죽이랑 같이 먹는다. 가격은 조금씩 다른데 죽은 1원 안팎이고 밀가루빵인 만토(饅頭, 한국에서 말하는 만두와는 맛도 모양도 다르다)는 내가 가는 아침 시장에서 큼직한 것 네 개가 1원이었다.


중국 북부 사람들은 주식이 밀가루라서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대부분 많이 먹는데 아침을 죽이 아닌 면으로 해결하는 사람들도 많다. 가끔 시장에 가서 소고기 라면, 아니 소고기 라미엔(牛肉面, 면을 麵으로 쓰지 않고 面으로 쓴다)을 1원 씩 주고 사 먹기도 했다. 기름이 둥실둥실 뜬 그 라면을 처음엔 어떻게 먹을까 그랬는데 그곳을 떠나오고 제일 먹고 싶었던 음식 중에 하나가 1원 짜리 그 소고기 라면이다. 내가 쏠게, 라면서 눈이 많이 오던 날 카티아랑 같이 가서 먹었던 그 라면이다.


우린 라면을 먹기 전에, 혹은 라면을 먹고 나서 지단삥(鷄蛋餠)을 꼭 사서 먹었다. 그것도 1원이다. 워낙 인기가 많은 음식인지라 지단삥 파는 리어카 앞엔 늘 사람들이 많았다. 기다리기 싫은 날은 라면을 먼저 먹으러 간다. 부부랑 남편 동생이 나와서 같이 지단삥을 만드는데 동생은 안 나타날 때가 많았다. 밀가루 반죽에 계란을 깨트려 그 위에 파를 총총 썰어 부쳐 내는 건데 크기는 한국에서 파는 호떡만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맛이 참 일품이었다. 라면을 먹고 나서 먹어도 좋고 지단삥을 먹고 나서 라면을 먹어도 좋다. 한국에서 모양은 흉내를 내봤는데 맛은 도저히 흉내를 낼 수가 없었다.


공부와 놀이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서양 학생들

중국은 우리보다 더 먼저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금요일 오후부터가 주말이다. 문화가 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애들은 대부분 놀 때 확실하게 놀아준다. 주말에 공부 해야 되니까 조용히 해달라는 동양 애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파티의 종류도 많고 늘 시끄럽다. 그렇게 비교해 보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참 놀 줄을 모른다. 기껏해야 술 마시는 정도지 자유롭게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제대로 놀 줄을 모른다.


주말에 기숙사에서 파티가 없으면 비슷한 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들 나간다. 이 학교 애들이 저 학교를 찾아가기도 하고 저 학교 애들이 이 학교로 찾아오기도 하고, 아니면 자기네들만 잘 가는 그 곳을 찾아 떼지어 나가기도 한다. 카티아는 북경의 동 3환로를 타고가다 보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하드락카페나 북경의 이태원이라 할 수 있는 산리툰에 자주 갔다. 아니면 디스코텍. 술이 취할 때까지 마시는 저들의 문화가 아니라 신나게 춤추고 놀다 지치면 들어온다. 참 잘도 논다. 그리고 공부한다. 참으로, 참으로 부러운 저들 문화였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북경 왕푸징(王府井)에 있는 신동방시장 뒤쪽의 노보텔 근방에 가면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식당이 하나 있다. 가끔 텔레비젼에도 나오는 유명한 곳이다. 당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정보 말고는 채식주의자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채식주의자인 카티아 덕분에 그런 식당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또 가 볼 수 있었다. 당연히 메뉴판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싱겁게도 메뉴판에 나오는 음식들은 모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음식들이었다. 식탁에 올려진 음식들도 모양만은 우리가 아는 음식들과 별 차이점이 없었다. 다만 재료가 다를 뿐이었다. 딱 보면 돼지고기 같은데 먹어보면 버섯이나 두부 등으로 만들어지는 식이다. 맛 보다는 그 색다름이 식욕을 자극했던 것 같다. 1원에 아침을 해결하던 우리는 그 식당에 가면 1인분에 100원을 넘게 지불해야 했다.


큰 아이는 '김치', 작은 아이는 '김'

카티아는 한국 음식을 아주 좋아한다.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만든 사람까지 무안하게 혀를 쑥 내밀며 얼굴을 찡그리는데 된장찌개를 보고 그랬고 김치를 보고 또 그랬다. 먹어보지도 않고 쳐다만 봤으면서. 물론 처음엔. 하지만 한국의 김치는 카티아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밥을 이미 먹었다면서도 김치를 먹고 있으면 또 젓가락을 들고 만다. 큰 수퍼에 가면 조선족들이 공급하는, 한국 김치와는 여러모로 차원이 다른 포장김치를 사다 먹을 수 있는데 맛에 비해 가격이 너무 부담스럽다. 맛은 없지만 그래도 먹어야 하니까 종종 사다 먹곤 했다.


카티아와 한국 식당에 가서 김치를 먹은 적이 있었다. 중국은 한국과 식당 문화가 달라 기본으로 제공하는 반찬이 없고 모두 시켜야 한다. 그건 중국내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죽 한 그릇에 1원 하는데 우린 25원 짜리 김치 한 접시를 시켰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아름다운’ 김치 앞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카티아에게 김치는 ‘기무치’가 아닌 ‘김치’고 한국 사람들이 옛날부터 먹어왔고 지금도 없으면 밥을 못 먹는 한국 음식이다. 바깥에서 만난 일본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김치를 먹지 않지만 한국 사람들은 밥상에 김치가 올라 오지 않으면 밥을 못 먹는 사람들로 카티아에게 인식되었다. 한국에서 공수되어 온 김도 카티아가 젓가락을 다시 들게 만드는 음식이다. 그냥 김도 좋아하지만 김밥을 참 좋아해서 헤어지기 전에 북경의 우다코에 있는 '곰집'이란 식당에 가서 우린 김밥을 먹어야했다. 카티아는 자식을 낳으면 첫째 아이 이름은 ‘김치’로, 둘째 아이 이름은 ‘김’이라고 짓겠단다.


북경에서의 마지막 만찬

헤어지기 전에 카티아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 산리툰에 있는 독일 음식점에 갔었다. 상호가 아마 '케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섯 명이 갔는데 1인분에 7, 80원 하는 음식값을 카티아가 모두 부담했다. 서양 친구들끼리만 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한국 친구들이 포함이 되면 누군가 혼자 식사를 다 부담하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그걸 카티아가 알고 있었다.


나야 사회생활을 하다 중국에 갔기 때문에 자비 유학이었지만, 한국에서 온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학비며 생활비를 매달 부모님으로부터 송금 받는다. 서양 애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중에 하나다. 카티아 같은 친구들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학비도 자기가 벌고 생활비도 물론 자기가 번다. 두 번째 학기 때는 결국 학비가 모자라 중간에 공부를 그만 두어야 했는데 첫 학기 때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 캠코더를 살만큼 여유가 있었다. 눈동자도 머리색깔도 까만 동양애들은 아는 척도 안하고 국적이 어디가 되었든 머리색깔 노랗고 눈 파란 애들만 고용하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일당이 200위엔이었으니까 조건이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저분한 일로 그곳을 그만 둘 때까지 카티아의 주머니가 제법 넉넉했었다.


카티아가 그렇게 번 돈으로 케밥 식당에 가서 독일 음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독일 사람들이 자주 먹는다는 그런 음식들을 먹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린 정말 헤어졌다.


5월의 독일, 오 마이 카티아

상해에 있을 때 메일이 한 통 왔다. 열흘 후가 사촌 동생 생일인데 엽서를 하나 보내달란다. 깜짝 파티를 해 주고 싶으니 사촌동생 이름이랑 Happy Birthday to You! 빼고는 모두 한글로 써서 보내달라는 주문이었다. 카티아의 사촌 동생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정신지체부자유자로 물론 글을 읽을 수도 없다. 그래도 그렇게 해 주고 싶단다. 나중에 사촌 동생과 같은 애들을 가르치는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그랬는데 그 꿈에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보세요.” “나는 카티아예요.” “나는 한국말을 못해요.” 방으로 전화가 오면 한국 사람인 줄 알고 이렇게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바꿔주던 오 마이 카티아! 인도 어딘가에서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메일이 오고 소식이 끊어졌다. 메일 말미에 한국에 꼭 가고 싶은데 여전히 돈이 없다고 썼지만 선뜻 한국에 오라는 소리를 못했다. 5월의 독일과 오 마이 카티아의 안부를 묻는 메일을 띄워야겠다.


(여행시기: 200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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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채널24: 중국/사람들2007. 4. 27. 21:32

내몽고에서의 숙소잡기 전쟁

방에 쳐 박혀 아무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도 좋아하지만 배낭을 짊어지고 어딘가로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 셋이서 배낭이랑 텐트를 짊어지고 청량리역에서부터 걸어서 강원도를 한 바퀴 돈 적이 있다. 미시령도 한계령도 우린 걸어 넘었다. 출발할 때 만났던 여행객들이 휴가를 다 끝내고 한계령을 넘어 오면서 이제 오느냐며 반갑게 손 흔들어 주던 그 시절엔 정말 겁나는 게 없었다. 물소리를 따라 설악산을 내려오면서도, 떨어지는 유성을 보며 8km나 되는 백담사를 걸어올라 가면서도 무서운 게 없었다. 말 안 통하는 곳 어디를 가도 다 사람 사는 덴데 뭐,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내몽고에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제까지 혼자 여행 다니면서 그런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두려움 같은 걸 느꼈었다.


새벽 두시 근방에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에 도착했다. 예의 호객행위를 하는  ‘삐끼’들이 달려들었다. 북경이나 상해처럼 큰 도시에서 떼로 몰려드는 삐끼들도 겁이 안 났었는데 새벽에 만난 내몽고의 삐끼들은 제대로 걸음을 떼 놓을 수 없을 만큼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왜 그런지는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공포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다 누가 그랬던가. 빨리 숙소를 찾아야 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하나 고민이었다. 하나를 찍었다. 여기서 흥정을 해서 하룻밤 묵어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맘처럼 잘 안됐다. 배낭을 메고 다시 나와 두 번째로 간 여관에서 다시 흥정을 시작했다. 말이 먹히지 않았지만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그러나 그냥 묵기에는 하룻밤 방값이 너무 비쌌다.


초대소(招待所)라는 데가 있는데 이런 데는 가격은 저렴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허용이 안 된다. 그래서 대부분 빈관(賓館) 같은 데서 묵게 되는데 법적으로 외국인은 내국인과 같이 잘 수가 없다고 그런다. 결혼허가증이 없으면 남자랑 여자도 같이 묵을 수가 없단다. 저~~~ 지방 시골 변두리는 초대소에서 외국인도 내국인과 같이 묵을 수 있고 한 방에 다국적으로 남녀노소 다 잘 수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무조건 안 된단다. 법적으로 그렇다는데 할 말 없지. 혼자 다니는 여행이 편하기는 하지만 숙소 잡고 뭐 먹는 데는 이래저래 여럿이 가는 게  편하다. 특히 중국은 아직은 혼자 다니기에 불편한 게 너무 많은 곳이다.

 

혼자서 자는 건 35원인데 침대가 세 개짜리니 105원을 내란다. 그 새벽에 저걸 다 내고 자야 되나 갈등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배낭을 메고 나오려는 데 주인이 잡는다. 여자 혼자 여행 하는데 경우가 아닌 것 같다면서 90원만 받겠단다. 다시 배낭끈을 잡는 시늉을 하자 60원까지 내려왔다. 미안하다 그러면서 나가려고 일어서자 마지못해 40원에 자란다. 사실 중국 배낭여행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도시도 아닌 그곳에서 40원은 정말 비싼 거다. 그날 공포감에 휩싸이지만 않았으면 그냥 밀고 나가는 건데. 결국 40원에 배낭을 풀었다. 초원과 사막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데 이까짓 쯤이야 뭐.

빵차 타고 초원으로 출발
아침에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참으로 요상도 하지. 새벽에 느꼈던 공포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내가 아주 잘 아는 어느 동네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초원을 어떻게 갈까 궁리를 하고 있던 차에 두 총각을 만났다. 두리번거리며 초원까지의 안내자를 찾았는데 결국엔 이들과 동행하게 됐다. 이미 초원을 보는 철이 아니라서 삐끼가 아쉬운 게 아니고 나 같이 초원에 가려는 사람들이 아쉬워할 때라는 걸 잘 모르고 흥정을 좀 쎄게 했더니 처음엔 도무지 씨가 안 먹혔다. 초원을 보겠다고 온, 역 주변에서 만난 한국 아가씨들 둘과 그 총각들 둘, 이렇게 다섯이서 빵차(우리나라 승합차 보다는 작은데 모양이 구운 식빵모양이라며 중국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부른다.)를 타고 초원을 향했다.

간단한 자기소개 끝에 형이라는 사람은 현재 친척 일을 도와주고 있고, 동생은 그 형이란 사람을 도와주고 있다고 그랬다. 결국은 가족끼리 하는 장사였다. 여행 내내 일만 터졌다 하면 아르바이트라고, 그 놈의 아르바이트라고 계속 변명을 하는 통에 복장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동생은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지만 할 줄 아는 말이 별로 없다면서 몹시 부끄러워했다. 전공이란 게 다 그렇지 뭐. 그러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고,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내몽고만 해도 한국에 대해 관심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럴만한 창구가 없다면서 많이 아쉬워했다.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도 대학에 개설된 한국 관련 학과도 없고 마땅히 배울 만한 데가 없단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한국말도 가르쳐 주고 한국문화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고도 그랬다. 지금은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그랬다.

 

중국 대도시에 가 보면 한국 제품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들어오는지 알 수가 있다. 옥외광고판에서 한국 대기업의 광고를 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중국말로 더빙이 되어 방영을 하지만 텔레비젼에서 한국 드라마를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다. 몽고(내몽고는 중국 자치주이지만 내몽고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몽고는 중국 내에서 외몽고라고도 부르며 수도는 울란바토르이다) 에서 정부차원에서 한국문화를 배우겠다고 정부 각료가 한국에 다녀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류가 거품이라는 사람도 많지만 이 청년의 얘기를 들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몽고 그 청년들한테 처음부터 믿음이 간 건 아니었지만 일단 차를 출발시켰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초원일 줄 알았는데 가는 도중에 계속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타고 가는 차가 불법이라서 운행을 못 한다는 거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냐고 그랬더니 조금만 기다리란다. 조금만이 두 시간은 좋히 걸렸던 것 같다. 포장도 안 된 길가에 쭈그려 앉아 바람에 이는 먼지를 다 맞아가며 일이 해결되기를 기다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파란 하늘과 초원, 경찰차, 그리고 빵차 뿐이었다. 결국 경찰서까지 가서 경찰이 지정해 주는, 합법적으로 운행이 가능한 차를 타고서 말도 있고, 몽고 파오도 있고, 노래하는 몽고 아가씨도 있는 그 초원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문제 다시는 없지요, 했더니 걱정하지 말란다. 그런 말을 떠나올 때까지 계속 들어야 했다. 문제는 이걸로 끝이다, 믿어 달라, 우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라고.

가도가도 끝없는 몽고 초원에서의 하룻밤
1년에 4개월 정도만 일을 해서 나머지 계절을 먹고 사는 이 사람들한테는 초원의 풀색들이 남아 있는 그 기간은 어찌 보면 대목이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는지 파오의 온 가족이 나와 우리를 반겼다. 자주 손을 씻는 습관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물이 워낙 귀하다 보니 먹는 것 이외에는 제한적으로 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위생을 걱정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닦는 일은 오히려 사치였다. 양 한마리를 통째로 잡는 데도 그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물을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처럼 펑펑 수돗물을 틀어 쓰는 사람 입장에서 몹시 부끄러웠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랑 생긴 모습뿐만 아니라 비슷한 문화가 많았다. 옆자리에서 구토를 하면서 계속 술을 마시는 것도 똑같고 안 먹겠다는데 자꾸 술을 권하는 것도 똑같고 부르기 싫다는데 죽어라고 노래를 시키는 것도 똑같다. 먹기 싫다는데 먹던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서 접시에 올려 놔주는 것도 한국에서 흔히 봤던 풍경들이고 아직 멀었는데도 다 됐다고, 계속 그러는 것도 낯설지 않은 모습들이다. 일행 중에 하나가 <소양강 처녀>를 불렀는데 그 리듬을 알고 있다면서 몽고 전통악기로 비슷한 연주를 해 주었다. 어디서 이 노래를 들어봤냐고 그랬더니 너네가 부르는 노래의 리듬들이 몽고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의 리듬과 비슷하기 때문이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자리에 같이 있던 그 곳의 아가씨가 일어나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했다. 이 아가씨의 노랫소리는 귀를 즐겁게 해주지 못했지만 춤만은 눈을 충분히 즐겁게 해주었다. 노래가 끝나자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한 잔을 권하는데 이걸 거절하면 절대 안 된단다. 안마시겠다고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알코올 도수가 60도나 되는 이 술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나면 목이 타는 건 둘째 치고 남자도 굵은 눈물이 쑥 나온다. 어쩔 수 없이 한 잔을 털어 넣고 나도 눈물을 쏙 뺐다. 이게 얼마나 독한 술인지 한 잔 담아 불을 붙여 봤더니 파란색 불이 20분을 넘게 탄다. 그걸 여기 사람들은 탁탁 연거푸 목에 털어 넣었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려 가면서.


비록 규모가 넓지는 않았지만 낙타가 돌아다니는 사막에도 갔었는데 내 머릿속에 사막은 아주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고 푸른 초원만 계속 영화필름처럼 돌아가고 있다. 지평선을 따라 몇 시간이나 말을 타고 달려도 초원은 끝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 말 위에서 하는 게임 같은 걸 구경했는데 경기 모습은 스포츠 보다 전투에 더 가까웠다. 이제 초등학교나 다닐까 싶은 꼬마도 아주 능숙하게 말 위로 몸을 날려 사뿐히 말안장에 앉는 거 아닌가. 초원에서는 아이들이 그렇게 길러지나 보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의식세계는 문명의 혜택을 듬뿍 받고 살아 온 이쪽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뒤꿈치만 들면 별이 한 움큼
여행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초원 구경을 많이 했는데 몽고 초원에 비하면 그건 초원도 아니었다. 그냥 풀밭 정도라고 해야지. 초원도 초원이지만 밤에 올려다 본 밤하늘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정말 발뒤꿈치를 들면 별을 한 움큼 딸 수 있을 만큼 하늘이 낮고 또 맑았다. 유성이 주욱주욱 선을 긋고 떨어지는데 60도짜리 초원 소주를 마시고 대취한 내가 그때 그 유성을 보고 뭘 빌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어린 베토벤이 아버지한테 혼나고 나서 호숫가로 뛰어나가 누워서 바라본 밤하늘의 그 별보다 훨씬 더 많은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평선이 안 보일 만큼 드넓은 초원은 밝은 대낮에 나를 미치게 만들었는데 내몽고의 밤하늘을 수놓은 그 많은 별들은 파오에서 솜이불을 끌고 나와 한겨울 같은 여름밤의 초원에 나를 벌러덩 드러눕게 만들었다.

떠나 올 때 그들이 우리한테 사기를 쳤다는 걸 알았지만 셋 다 합의를 봤다. 별을 그렇게 봤는데 돈 몇 푼이 대수냐. 끝없는 초원을 보러 내몽고에 갔다가 나는 원없이 별을 보고 왔다.


(여행시기: 2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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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중국 원조 라면, 란저우(蘭州) 라미엔

인스턴트 라면을 비롯해 우리가 지금 먹는 라면의 원조는 일본이다. 중국의 국수가 마르코 폴로 덕분에 서양으로 건너가 스파게티가 되었고, 그 국수가 한국을 거쳐 일본에 가서는 라면이 되었다. 중국에도 맛이 다른 이 라면이 있다. 우리가 흔히 수퍼에서 사다먹는 라면도 있지만 중국에서 보통 라면(拉面, '라미엔'이라고 읽는다.)이라고 하면 손으로 뽑은 면을 각 종 재료로 끓인 걸 말한다. 소고기가 좀 들어가면 소고기 라면이고 닭고기가 들어가면 닭고기 라면이 되는 것이다. 길게 잡아 늘릴 라(拉, 한국식으로 읽으면 ‘납’), 면자는 우리가 쓰는 글자랑 다른 면(面, '미엔'이라고 읽는다.)이다.

 

이 라면이 제일 맛있는 곳이 란저우(蘭州)라는 곳이다. 베이징에서도 아침 시장에서 소고기 라미엔을 1원씩 주고 먹어 봤지만 란저우 라미엔은 정말 맛있다. 우리도 원조 원조 하는데 중국도 마찬가지다. 라미엔집 상호에 란저우가 들어가 있는 집이 많다. 물론 본고장 란저우에 가면 여기저기 원조 라미엔 천지다.

 

원조 라미엔을 먹고 란저우에서 은추완((銀川, 한글로 은천인데 이름이 참 예쁘지 않은가?)을 지나 내몽고로 향할 때였다. 서른 시간 넘게 타고 다니는 기차 여행에 익숙해지니까 열 대여섯 시간 입석은 이제 할 만하다. 청량리역에서 춘천까지 두 시간 거리, 좌석이 없으면 다음 기차로 미루던 때가 있었는데 나 원 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hoto by Yann Layma

 

은추완에서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으로

은추완에서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까지 9시간인데 발디딜틈 없이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 기대지도 못하고 꼬박 서서 가야할 판이다. 뻔뻔한 사람들은 앉아있는 아가씨 옆으로 가서 자꾸만 자기 엉덩이를 들이밀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는 사람이 없다. 참 이상한 나라다. 나 말고는 주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임어당의 글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그게 다 민족성 때문이란다. 여기저기 관심 많은 사람 치고 잘 된 경우 없고, 그냥 내 일에만 관심 갖고 살면 세상 살기 편해서란다. 

 

새벽 한 시. 낮엔 가끔 사막이라도 볼 수 있었는데, 기암절벽도 볼 수 있었는데, 푸른 초원도 볼 수 있었는데, 깜깜해지니까 창에 어린 나 밖에 볼 수가 없다. 친구도 생각하고 가족도 생각하고 옛날 생각도 하고 앞으로 살 날 생각도 하고 그러면서 달리는 기차에 나를 내버려두고 있었다.


정확한 보통화를 구사하는 아주머니가 나를 자기 옆으로 앉으라고 그런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안돼보였는지 그래도 자꾸만 부른다. 그럴 때 누가 앉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 여섯 시간 만원 기차에서 서서 가다보면 바닥이라도 앉고 싶어진다.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 본 거다. 서서 오는 내내 나를 모른 척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갑자기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정말 갑자기, 느닷없이, 순식간에.


안재욱을 얘기해 줘야 했고 김희선이 진짜 봐도 예쁜지 설명해 줘야 했고 HOT의 멤버를 얘기해 줘야 하는데 난 걔네들 이름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국 사람이면 그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희망을 이어 줘야 했다. 내가 신고 다니는 발목 올라오는 신발을 보고 한국 애들은 다 그런 걸 신느냐 물으면 대답해 줘야 했고(사실 그 신발은 중국에서 산 건데.), 쓰고 있는 모자를 한 번만 써 봐도 되겠냐는 맞은 편 남학생한테 어색해하며 그 모자를 건네줘야 했다. 이게 아닌데 속으로 계속 되뇌어보지만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순간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는.

 

자리를 양보한 아주머니는 금방 일어나셨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입석으로 표를 끊어도 왔다갔다 하는 객차승무원이랑 말이 잘 되면 침대차로도 표를 바꿀 수가 있다는 거다. 은추완에서 베이징을 왔다갔다 하며 장사를 하신다는 그 아주머니는 시골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들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친절하게 순차통역을 해 주셨다. 젊을 때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부럽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여행 조심하라고는 떠나셨다.

 

아직도 중국은 여권 발급이 자유롭지 않고, 또 가려는 나라의 비자 문제가 매끄럽지 않다. 그래서 여권이랑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려는 중국 교포들이 브로커들한테 고액의 돈을 바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차에서 만난 용감한 형제

후허하오트어에는 왜 가냐고 앞에 앉아 있는, 베이징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학생이 자꾸 물어본다. 사막을 보러 간다고. 초원을 보러 간다고. 그런 걸 왜 보러 가냐고 그런다. 그냥.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좀 더 근사한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장학생으로 대학을 간다는 이 시골 청년은 베이징에 대한 환상이 굉장히 컸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기차도 신기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인과 얘기를 해 본다고 그 또한 신기해했다.

 

옆 좌석에는 이미 베이징에서 2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있는 형이 있었는데 전공이 무용이라면서 뜬금없이 한국의 댄스 가수들에 대한 계보를 죽 읊어대는 게 아닌가. 한국에서 불리는 이름이랑 중국에서 그들이 부르는 이름이 한자만 같지 발음이 달라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그 형이란 친구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참고로 안재욱은 중국에서 안자이쉐로 발음을 한다. 어떻게 한국에 살면서 그렇게 유명한 애들을 모를 수가 있느냐는 형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HOT 멤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떼로 나와서 노래하는 팀의 멤버들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 출출하다면서 건네는 컵라면을 그날 나는 먹지 못했다. 한국에서 새벽 네 시에도 먹었던 라면이 도무지 당기지를 않아서였다. 수북이 쌓아놓고 먹으라는 해바라기씨도 먹지 못했다. 원래 호박씨든 해바라기씨든 까먹는 건 감질나서 잘 안 먹는 편인데 새벽, 그 시간에는 더더욱 못 먹는다. 자기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제과점에서 사 온 빵이라면서 건네는 빵도 물론 못 먹었다. 그럼 포도는 어떠냐고 권하는데 그것도 역시 못 먹었다. 그 새벽, 그 기차 안에서 난 그 어떤 호의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참으로 미안하다.

 

원래 용간한 친구들인지 외국인인 나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형제들은 입석표를 가진 나와 다른 여자 승객한테 둘 다 자리를 양보했다. 나야 서 너 시간 후면 내몽고 역에서 내리지만 그들은 베이징까지 아직도 열 시간을 넘게 가야 하는데 말이다.

 

동생은 지금쯤 졸업을 했을 테고 여자친구가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벽 두 시 근방에 내몽고역에서 내리려는 나를 끝까지 배웅하던 친구였다.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무거운 배낭 메는 걸 도와주고 안 먹겠다고 고집피우던 음식들을 따로 비닐에 담아 손에 걸어주면서 문까지 따라와 인사하던 참으로 가슴이 따뜻한 친구들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이 친구들을 나는 그저 용감한 형제로 기억하고 있다. 은추완에서 내몽고로 가는 기차안에서 만난 용감한 형제로.


(여행시기: 2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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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시계방향으로 돌아돌아 중국 한 바퀴 

2001년 여름, 석달간 기차를 타고 시계방향으로 중국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여행하면서 내내 침이 나올 만큼 중국이 부러웠다. 문명의 세례를 흠뻑 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여전히 한없이 미개해 보이는 그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사는 터전인 천혜의 자연을 훔쳐올 수도 없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솔직히 너무 배가 아팠다

 

가진자들에게는 확실하게 서비스를 해주는 나라가 중국이다. 기차를 한 번 타봐도 그건 금방 알 수 있다. 여행 안내 책자에는 대개 기차를 네 종류로 등급을 구분해 놓는데 경험에 의하면 다섯 종류다. 제일 비싼 자리는 침대가 푹신한 곳, 그 다음은 딱딱한 침대, 그것보다 싼 자리는 뒤로 꺾을 수 없는 약간 푹신한 의자, 그리고 우리가 중국을 소개하는 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90도 각도의 자로 된 딱딱한 의자, 마지막이 입석이다.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남쪽 끝에서 북쪽으로 한 번 이동하려면 며칠이 걸린다. 이렇게 멀리 움직이는 기차에 입석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른 네시간 짜리 입석을 타본 적이 있는데 이건 타 본 사람만 알리라.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다리가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부어 걷기가 힘들 정도다.

 

내가 본 중국사람들은 새벽 두 시에도 해바라기씨를 까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이를 안고 밀폐된 공간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여담이지만 담배 한 대가 그냥 놔두면 7분이면 다 탄다는데 이 사람들은 한 대로 20분을 즐길 수가 있단다. 무서운 사람들. 컵라면을 먹고 국물이 질질 흐르는 바닥을 슥슥 발로 비비고는 그 기차 바닥에 몸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아직은 과일껍질이고 PET병이고 플라스틱 도시락이고 무조건 기차 밖으로 던지는 사람들이다. 급하면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보고, 볼 일을 보다가 자기 것(?)이 옆사람한테 튀어도 미안하단 말을 안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차가 고장이 나서 여섯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아도 승객들끼리 여유있게 담소를 즐기고, 그러다 차가 움직이면 운전기사한테 박수를 보내고 먹던 과일까지 전해주는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 지리 선생님이 중국은 전형적인 서고동저형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늘 헷갈렸는데 내가 밟아 본 중국은 확실히 동쪽은 평야가 많고 서쪽은 고산지대가 대부분인 서고동저형이 맞다. 선생님 말씀을 수십년이 지나 몸으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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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log.naver.com/rockcap

해발 고도 2,800m 산골짜기 랑무스(朗木寺)

도대체 어디까지 버스가 올라 갈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도착한 곳은 리틀 티베트라고도 부르는 랑무스(朗木寺)라는 곳이다. 시아허(夏河)에서 남쪽으로 버스로 5~6시간 더 내려가면 랑무스라는 작은 산골동네가 있다. 나는 위에서가 아니라 아랫동네인 송판이란 곳에서 위로 위로 올라가 이 곳에 도착했다. 해발 고도 2,800m. 도착하기 전까지 좌우로 펼쳐지는 광활한 초원(몽고에 도착한 후 그때까지 내가 봤던 초원은 진정한 초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은 아직도 원시를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 이름이 랑무스가 아니라 마을 안에 있는 절 이름이 랑무스였다. 라마교 6대 사찰 중의 하나로 작은 마을 규모에 비하면 제법 큰 절이었다.

 

중국은 넓은 땅덩어리 안에 여름에도 봄 가을 겨울 계절을 다 가지고 있는 나라다. 여행하고 싶어하는 나라들의 좋은 풍광에 계절마저 다 가지고 있으니 부러워할 수밖에. 내가 찾아간 랑무스는 바깥이 여름이라도 겨울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스위스를 느낄 수 있는 곳이지만 슬프게도 화장실이 없는 곳이었다. 해발 3,000m에 육박하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비로소 나는 나를 버릴 수 있었다.

 

랑무스에 있는 성도식당에서 젊은 친구를 하나 만났다. 쓰촨대학에 다니는 이 친구는 방학이 되면 식당을 하는 엄마를 도와주러 이 마을에 머문다고 한다. 관광객이 거의 없는 이곳에서 식당이 되나 싶었지만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식당이랑은 많이 달랐다. 주문하면 재료가 없어 요리 할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 결국 가지고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시켜 먹을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어 주문을 했는데 개념이 없는 두 모자는 도대체 그런 음식이 어디 있느냐는 거다. 팬을 기름에 달궈서 달걀 노른자가 가운데 동그랗게 살아있게 가져오면 된다고 설명했는데도 그게 없다는 거다. 기름에 범벅이 된 달걀 요리에 결국 내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직접 들어가서 반숙으로 된 달걀 프라이 요리를 해 오니 그렇게 익지도 않은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고 난리였다. 감자를 채 썰어 대충 볶아 먹었던 것도 같고, 이름도 모르는 밀가루 음식을 내와서 간신히 넘긴 기억도 난다. 내가 경험한 랑무스는 그런 곳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겁 없이 그곳에 갔었는데 여름인데도 야크 똥을 태워 난방에 쓰는 난로를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그 식당 안에도 난로가 있었다. 내가 하도 춥다 춥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겨울도 아닌 여름에 뭐가 그리 춥다고 난리냔다. 근데 비스듬히 들어올린 그 총각 바지 속에 내복이 들어있었다. 랑무스는 그렇게 여름에도 추운 곳이었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새벽 6시 반에 딱 한 대밖에 없는 마을이라 하루만 묵을 생각이었는데 나흘을 더 묵는 바람에 추억 거리가 많아졌다. 그 총각이 언제 떠나느냐 묻기에 내일 떠난다 그랬더니 몹시 아쉬워하면서 하루 더 머물고 가면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고 나를 잡았다. 아침 8에 절의 주지스님이 죽어서 장례식을 거행하는데 볼 생각이 있느냐는 거다. 배낭여행객들한테 마을의 행사는 그게 뭐가 되었든 봐주어야 한다는 게 내 여행철학이다. 결혼식이 되었든 그게 장례식이 되었든. 그러마 그러고 하루 종일 동네 구경을 했다. 동네라고 해 봤자 양떼들이 환장하고 뛰어 노는 동산 위에 올라가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이 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랑무스에 오기 전에 샀던 천도복숭아를 먹으면서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오호 통재라. 아침에 일어났더니 이미 10다. 장례식을 놓쳤다. 한없이 게으른 자세로 느리적 거리며 식당엘 갔더니 총각 어머니가 끓는 물에 쌀을 집어넣고 있었다. 죽을 먹고 싶다고 그랬더니 아침 일찍 오면 된다고 그랬는데 그 때까지 두 모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나한테 무슨 이런 복이 있나 그러면서 죽을 후후 불어 넘겼다. 북부의 서민들은 아침에 대부분 죽이랑 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만토(밀가루 빵)를 주식으로 먹는다. 남쪽 사람들은 밥을 주로 먹지만. 한 일년 북쪽에 살았더니 나도 그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죽이 먹고 싶어 그냥 한 말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날 감동시켰다. 죽에 대한 답례로 앞으로 이 동네에 외국 여행객들이 많이 올지 모르니까 메뉴판을 정비하자고 총각을 설득해 성도식당 메뉴판을 점검해 주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를 부록으로 가르쳐 주었다.

 

장례식을 놓쳐서 안 됐다는 표정을 짓더니 내일 또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면서 그냥 천장天葬이 있는 장소나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장례식이 8 있으니 그걸 보려면 천상 하루를 더 묵어야 하는데 고민이 됐다. 천천히 생각하자 그랬는데 며칠을 더 묵고 그 곳을 떠나면서 알았다. 나도 참 순진하기는. 어떻게 주지스님 장례식이 매일 있을 수가 있겠는가. 여행객이 뜸한 그 곳에서는 마을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내일도 또 내일도 장례식이 있으니 그걸 보고 가라 그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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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aychen


고산지대 천장(天葬)
 풍경

천장은 죽은 사람의 뼈를 잘게 부숴서 매나 독수리들이 먹을 수 있게 던져 놓는 것으로 고산지대에서 볼 수 있는 장례 풍습의 일종이다. 땅도 척박하고 묻어도 썩지 않으니 그런 식으로 장례를 지내는가 보다. 고산지대에 '조장鳥葬' 풍습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외부인에게 공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천장이 치러지는 곳은 마을에서 제일 높은 언덕으로 그곳에 제단이 있었다. 총각이랑 빨치산처럼 비탈을 돌아 능선을 타고 제단에 도착했다. 피 묻은 도끼도 그대로 있고 잘게 부순 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주변으로 오색 찬란한 헝겊들이 날리는 중간에 제를 지내는 단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시선으로 이 자리에서 내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도 사람 사는 마을인데 뭐, 그러면서 금방 긴장을 풀어버렸다.

 

밤이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빛 아래에서 라마승들이랑 동네아저씨들이 낯선 이방인 아가씨에게  쏟아 내는 질문을 건성으로 듣고 건성으로 답하면서 황하 맥주에 취해 랑무스에서의 며칠이 그렇게 흘러갔다.


떠나던 날 다행히 시간에 맞춰 일어나 새벽 6 30 차를 탈 수 있었다. 난 지금 그 친구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랑무스의 성도식당만을 기억하고 있다. 언제 또다시 그 곳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01년, 내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 (2001.7~9 중국 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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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물고기를 잡아야 뱃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물을 던져 잡든 바늘로 잡든 뱃사람이라면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 물고기 안 잡는 뱃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배에서 생활한다. 뭍에 내려오기도 하지만 물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뱃사람인 탓에 배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그들은 배 위에서 먹고 배 위에서 배설하고 배 위에서 씻고 배 위에서 잠잔다. 이러니 뱃사람이 아닌가.


인천 제1국제여객터미널에 가서 중국행 배에 오르면 이런 뱃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뱃사람 중에는 조선족도 있고 (북한 억양이 섞인) 조선어가 아닌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중국 한족도 있다. 더러 한국인 뱃사람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물건을 교역하는 일에 종사한다. 한국 물건을 중국에 내다 팔기도 하고 중국 물건을 한국으로 들여오기도 한다. 국제여객터미널의 짐 붙이는 곳에 가면 우리 눈에 익숙한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아닌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가 표기된 커다란 박스가 산처럼 쌓인 채 승선을 기다리고 있다. 천진항이 목적지인 김 박스도 있고 단동항이 목적지인 라면 박스도 있다.


배에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고 화장실 안에는 탈수기까지 갖춰져 있다. 속옷을 비롯해 건조를 기다리는 옷가지들이 복도 여기저기에 내 걸려 있다. 열 대여섯 시간에서 스물 네 시간 배 여행을 하면서 빨래를 하는 여행객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이 뱃사람들 것이다. 그들은 승선하자마자 자리를 잡고 제빨리 빨래를 해서 넌다. 일반 관광객들이 티켓에 적힌 자기 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이 사람들은 이미 샤워까지 끝낸 상태다. 마치 집에 돌아온 사람들처럼 배 안에서의 모든 게 아주 익숙하다.


배가 인천항을 떠나고 나면 이들은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정보를 주고 받기도 하고 카드 놀이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배가 중국의 항구에 도착하면 이들은 제일 먼저 하선을 한다. 대개 단체 여행객들이 많아 배에서 내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짐을 붙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퀴도 안 달린 검은색의 커다란 이민 가방을 직접 메고 배에 오른다. 배에 올라 그 자리에서 거래를 하기도 하고 중국의 항구에서 수요자에게 직접 물건을 전달하기도 한다. 배에서 교역이 끝난 사람들은 하선을 하지 않고 그대로 그 배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 온다.


비록 잡아야 할 게 물고기는 아니지만 이 사람들도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와 싸워야 하는 사람들만큼 거칠고 억세 보인다. 배 안에서 서로의 애환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자리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물건 때문에 몸싸움을 하기도 한다.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다가 편을 갈라 다른 사람 험담을 하기도 한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배 위라도 다를 게 없다. 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기에서도 그대로 재연된다.


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배에는 물고기를 잡지 않는 뱃사람이 타고 있다. 배 위에서 바다와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삶과 싸우는 그들은 천상, 뱃사람 아닌 뱃사람이다.  (2004.7~9 학위논문을 위한 북경 필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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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연길행 비행기 하얼빈에 불시착 

중국말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중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선물처럼 생겼다. 여권을 다시 만들고 대사관에 가서 중국 방문 비자를 받으면서 처음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았지만 무사히 인천공항에서 서해를 가로 지르는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상해에서부터 시작해 천진, 북경으로 북상하는 동안 큰 문제는 없었다. 북경에서 마지막 목적지를 향하면서 드디어 문제가 발생했다. 연길로 가야 하는 비행기가 기류 불안정으로 하얼빈에 불시착했다. 출발할 때부터 한 시간 반이나 연착을 한 비행기가 결국 목적지에 도착을 못한 것이다. 비행기 연착은 경험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내심 불안해하고 있는데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려야 하나, 아니면 기내에서 마냥 기다려야 하나. 짐을 챙겨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도 있었지만 마냥 기다려야 했다.


전세계를 웃음으로 강타했던 코믹물인 '미스터 빈' 시리즈를 기내에서 보면서 흥분지수를 낮추고, 낮게 깔리는 등려군이라는 대만 가수의 노래에 다시 한번 흥분상태를 점검하는 동안 무려 네 시간이 흘렀다. 쉴 새 없이 떠들고 쉴 새 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던 승객들도 이제 지쳤는지 기내가 잠잠해질 무렵 드디어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가나보다.

새벽 한 시 연길시 풍경
연길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이미 잠들어 있는 도시는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못하겠는데 우리 팀을 인솔하는 조선족 가이드 아가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좌측으로 보이는 강은 해란강으로 어쩌구 저쩌구. 중간에 쉬지 않고 호텔에 도착해도 새벽 두 시는 좋히 넘을 텐데 프로그램상 준비된 저녁이 있으니 가야 한단다. 우측으로 보이는 큰 대로는 어쩌구 저쩌구. 시야가 캄캄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시커먼 새벽이었다. 예정시간보다 무려 여섯 시간이나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새벽 두 시 반에 한국 방문객들을 위해 준비된 전주비빔밥을 먹고 나서야 호텔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미 시간은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아침 일곱 시 출발이다. 무조건 자 둬야 했다. 이렇게 일이 술술 안 풀리는데 과연 내일 그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일행들은 또 불안해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내일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삼대가 복을 지어야 한다는 얘기도 있고 선한 마음이어야 가능하다는 얘기도 있는데 다 하늘에 맡길 노릇이다.


밤새 불안해 한 것에 비하면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여섯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그 사이 비가 뿌렸다가 해가 다시 나오기를 여러 번. 점퍼를 꺼내 입었다가 다시 벗기를 또 여러 번. 이상한 간판도 보였고 이상한 풍경도 보였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매표소 입구에서 접혔던 뼈들을 풀어주고 있는데 지프차가 도착했다. 여섯 명씩 조를 짜서 승차를 해야 했다. 완전 자동차 랠리다.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들이 눈앞으로 휙휙 지나갔다. 제대로 풍광을 볼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정상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해발 고도 2,700m 지프차 타고 랠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다.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그 백두산에 드디어 도착했다. 구름이 쉴 새 없이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해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 천지를 좀처럼 카메라에 담아내기가 힘들었다. 가이드 아가씨의 형식적인 인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팀 앞에 여섯 팀이 다녀갔는데 이만큼이라도 천지를 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이란다. 해발고도 2,700m가 넘는 정상은 날씨가 불안정해 두툼한 점퍼를 입은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누워보기도 하고 손을 들어 보이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다양한 자세로 사람들은 산을 맞이하기보다 산을 담아 놓기 바빴다. 카메라가 없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천지를 담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푸르다 못해 검기까지 한 천지의 물 빛깔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말이나 글로 눈으로 직접 본 자연의 모습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은 자연보다는 한참 하수인지도 모르겠다.


내려오면서 천지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가는 물줄기에 손을 담가볼 수 있었다. 손을 대자마자 어찌나 차가운지 바로 손가락 마디들이 벌개졌다. 장백 폭포를 보려고 이동한 장소에서는 내려오는 물의 온도가 섭씨 82도나 되어서 그 물에 달걀과 옥수수를 쪄서 파는 상인들도 보였다. 실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겁 없이 손을 담갔더니 이번에도 손가락 마디들이 벌개졌다. 1도 화상이다. 천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손을 댈 수도 없이 차갑고도 뜨거운 물들이 태극처럼 모여 산을 타고 들을 타고 내려와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우리 산하를 적시고 있었다. 문득 이쪽 중국이 아닌 저쪽 북한으로 올라가는 백두산은 어떤지 궁금했다.


우리 나라 관광지라면 어디든지 흔히 볼 수 있는 토종닭집, 보리밥집 같은 음식점들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지어진 러브호텔도 보이지 않았고 현란한 나이트클럽 간판도, 노래방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그랬다. 산에서 나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외부 유출이 금지되어 있었고 자연을 훼손하면 사회주의 국가다운 엄청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방문객들은 오롯이 그 곳에서만 자연을 즐겨야 했다. 하산하면서 들른 식당의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물들은 온통 80도가 넘는 백두산 온천수였다.


다시, 여섯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렸다. 아직은 열 두 시간 정도 고행을 해야 이쪽 중국에서 백두산을 올라갈 수가 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서 이상한 간판도 이상한 풍경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백두산을 저만큼 뒤로 하고 그저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만 가져 올 수밖에 없었다. (2002.7~8 외교통상부 후원 한중수교 10주년 기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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