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국어 구사하는 독일 소녀 카티아
카티아를 처음 본 사람은 카티아가 스물이란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 번도 몸무게를 물어 본 적은 없었지만 100kg은 충분히 넘을 거구다. 한국에서 온 친구들은 대충 마흔쯤으로 카티아의 나이를 짐작한다. 아, 정말 스물인데. 이름 만큼이나 얼굴이 예쁜 카티아는 독일에서 온 친구다. 수화까지 포함시키면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일곱 개나 된다. 독일어는 모국어니 당연하고 영어, 네덜란드어, 라틴어, 중국어, 어설픈 한국어로 자기 의사 표현을 할 줄 안다.
밖에서 만난 대부분의 외국인 친구들에게서 받은 인상 중에 하나가 모국어는 기본이고 영어를 참 잘 한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 영어 못한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만난 일본 사람들, 정말 영어 잘 한다. 자국말만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 밖에 보지를 못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인들도 프랑스어나 스페인어, 독일어와 같은 인접 국가들의 말을 할 줄 안다. 내가 만난 카티아도 그 중 하나였다.
나 같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간 사람들은 중국의 풍경들이 그렇게 많이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시대를 20년쯤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아주 못 살던 그 때를 떠올리면 된다. 사람들 생긴 모습도 비슷하고 문화가 비슷한 것도 많다. 하지만 카티아한테 중국은 새로운 문화 천지였다. 서로 얘기를 해보면서도 느낀 일이었지만 카티아가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면 그녀가 겪은 문화의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해 볼 수가 있었다. 저런 건 한국에 다 있어, 하고 카메라에 담지 않은 장면들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겨져 있었다.
중국 서민들의 아침 풍경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의 아침 시장. 내가 중국에서 머물렀던 곳의 아침 시장엔 볼거리, 먹을거리가 참 많았다. 조금 더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의 건방진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내 눈을, 내 입을 호들갑스럽게 만들 만한 것들이 정말 많았다. 저런 걸 사용할 수 있을까 싶은 데 그런 것들을 중국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산다. 그것도 깎아 달라고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 다음에 보따리에 집어넣는다. 중국 사람들이 의심 많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지퍼로 크게 주머니를 달아놓은 팬티를 보고 카티아랑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한국 사람들이야 옛날 할머니 쌈지 돈 넣어 놓는 것 보면서 자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게 낯설지 않겠지만 카티아는 볼 때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은 밖에서 식사 해결을 많이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침시장에서 죽이나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밀가루빵 같은 걸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다. 한국 김치를 중국말로 파오차이(泡菜)라고 하는데 중국에도 맛이랑 모양이 다른 김치가 있다. 한국의 김치 같은 이 파오차이를 중국사람들은 죽이랑 같이 먹는다. 가격은 조금씩 다른데 죽은 1원 안팎이고 밀가루빵인 만토(饅頭, 한국에서 말하는 만두와는 맛도 모양도 다르다)는 내가 가는 아침 시장에서 큼직한 것 네 개가 1원이었다.
중국 북부 사람들은 주식이 밀가루라서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대부분 많이 먹는데 아침을 죽이 아닌 면으로 해결하는 사람들도 많다. 가끔 시장에 가서 소고기 라면, 아니 소고기 라미엔(牛肉面, 면을 麵으로 쓰지 않고 面으로 쓴다)을 1원 씩 주고 사 먹기도 했다. 기름이 둥실둥실 뜬 그 라면을 처음엔 어떻게 먹을까 그랬는데 그곳을 떠나오고 제일 먹고 싶었던 음식 중에 하나가 1원 짜리 그 소고기 라면이다. 내가 쏠게, 라면서 눈이 많이 오던 날 카티아랑 같이 가서 먹었던 그 라면이다.
우린 라면을 먹기 전에, 혹은 라면을 먹고 나서 지단삥(鷄蛋餠)을 꼭 사서 먹었다. 그것도 1원이다. 워낙 인기가 많은 음식인지라 지단삥 파는 리어카 앞엔 늘 사람들이 많았다. 기다리기 싫은 날은 라면을 먼저 먹으러 간다. 부부랑 남편 동생이 나와서 같이 지단삥을 만드는데 동생은 안 나타날 때가 많았다. 밀가루 반죽에 계란을 깨트려 그 위에 파를 총총 썰어 부쳐 내는 건데 크기는 한국에서 파는 호떡만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맛이 참 일품이었다. 라면을 먹고 나서 먹어도 좋고 지단삥을 먹고 나서 라면을 먹어도 좋다. 한국에서 모양은 흉내를 내봤는데 맛은 도저히 흉내를 낼 수가 없었다.
공부와 놀이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서양 학생들
중국은 우리보다 더 먼저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금요일 오후부터가 주말이다. 문화가 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애들은 대부분 놀 때 확실하게 놀아준다. 주말에 공부 해야 되니까 조용히 해달라는 동양 애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파티의 종류도 많고 늘 시끄럽다. 그렇게 비교해 보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참 놀 줄을 모른다. 기껏해야 술 마시는 정도지 자유롭게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제대로 놀 줄을 모른다.
주말에 기숙사에서 파티가 없으면 비슷한 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들 나간다. 이 학교 애들이 저 학교를 찾아가기도 하고 저 학교 애들이 이 학교로 찾아오기도 하고, 아니면 자기네들만 잘 가는 그 곳을 찾아 떼지어 나가기도 한다. 카티아는 북경의 동 3환로를 타고가다 보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하드락카페나 북경의 이태원이라 할 수 있는 산리툰에 자주 갔다. 아니면 디스코텍. 술이 취할 때까지 마시는 저들의 문화가 아니라 신나게 춤추고 놀다 지치면 들어온다. 참 잘도 논다. 그리고 공부한다. 참으로, 참으로 부러운 저들 문화였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북경 왕푸징(王府井)에 있는 신동방시장 뒤쪽의 노보텔 근방에 가면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식당이 하나 있다. 가끔 텔레비젼에도 나오는 유명한 곳이다. 당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정보 말고는 채식주의자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채식주의자인 카티아 덕분에 그런 식당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또 가 볼 수 있었다. 당연히 메뉴판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싱겁게도 메뉴판에 나오는 음식들은 모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음식들이었다. 식탁에 올려진 음식들도 모양만은 우리가 아는 음식들과 별 차이점이 없었다. 다만 재료가 다를 뿐이었다. 딱 보면 돼지고기 같은데 먹어보면 버섯이나 두부 등으로 만들어지는 식이다. 맛 보다는 그 색다름이 식욕을 자극했던 것 같다. 1원에 아침을 해결하던 우리는 그 식당에 가면 1인분에 100원을 넘게 지불해야 했다.
큰 아이는 '김치', 작은 아이는 '김'
카티아는 한국 음식을 아주 좋아한다.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만든 사람까지 무안하게 혀를 쑥 내밀며 얼굴을 찡그리는데 된장찌개를 보고 그랬고 김치를 보고 또 그랬다. 먹어보지도 않고 쳐다만 봤으면서. 물론 처음엔. 하지만 한국의 김치는 카티아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밥을 이미 먹었다면서도 김치를 먹고 있으면 또 젓가락을 들고 만다. 큰 수퍼에 가면 조선족들이 공급하는, 한국 김치와는 여러모로 차원이 다른 포장김치를 사다 먹을 수 있는데 맛에 비해 가격이 너무 부담스럽다. 맛은 없지만 그래도 먹어야 하니까 종종 사다 먹곤 했다.
카티아와 한국 식당에 가서 김치를 먹은 적이 있었다. 중국은 한국과 식당 문화가 달라 기본으로 제공하는 반찬이 없고 모두 시켜야 한다. 그건 중국내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죽 한 그릇에 1원 하는데 우린 25원 짜리 김치 한 접시를 시켰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아름다운’ 김치 앞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카티아에게 김치는 ‘기무치’가 아닌 ‘김치’고 한국 사람들이 옛날부터 먹어왔고 지금도 없으면 밥을 못 먹는 한국 음식이다. 바깥에서 만난 일본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김치를 먹지 않지만 한국 사람들은 밥상에 김치가 올라 오지 않으면 밥을 못 먹는 사람들로 카티아에게 인식되었다. 한국에서 공수되어 온 김도 카티아가 젓가락을 다시 들게 만드는 음식이다. 그냥 김도 좋아하지만 김밥을 참 좋아해서 헤어지기 전에 북경의 우다코에 있는 '곰집'이란 식당에 가서 우린 김밥을 먹어야했다. 카티아는 자식을 낳으면 첫째 아이 이름은 ‘김치’로, 둘째 아이 이름은 ‘김’이라고 짓겠단다.
북경에서의 마지막 만찬
헤어지기 전에 카티아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 산리툰에 있는 독일 음식점에 갔었다. 상호가 아마 '케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섯 명이 갔는데 1인분에 7, 80원 하는 음식값을 카티아가 모두 부담했다. 서양 친구들끼리만 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한국 친구들이 포함이 되면 누군가 혼자 식사를 다 부담하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그걸 카티아가 알고 있었다.
나야 사회생활을 하다 중국에 갔기 때문에 자비 유학이었지만, 한국에서 온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학비며 생활비를 매달 부모님으로부터 송금 받는다. 서양 애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중에 하나다. 카티아 같은 친구들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학비도 자기가 벌고 생활비도 물론 자기가 번다. 두 번째 학기 때는 결국 학비가 모자라 중간에 공부를 그만 두어야 했는데 첫 학기 때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 캠코더를 살만큼 여유가 있었다. 눈동자도 머리색깔도 까만 동양애들은 아는 척도 안하고 국적이 어디가 되었든 머리색깔 노랗고 눈 파란 애들만 고용하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일당이 200위엔이었으니까 조건이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저분한 일로 그곳을 그만 둘 때까지 카티아의 주머니가 제법 넉넉했었다.
카티아가 그렇게 번 돈으로 케밥 식당에 가서 독일 음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독일 사람들이 자주 먹는다는 그런 음식들을 먹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린 정말 헤어졌다.
5월의 독일, 오 마이 카티아
상해에 있을 때 메일이 한 통 왔다. 열흘 후가 사촌 동생 생일인데 엽서를 하나 보내달란다. 깜짝 파티를 해 주고 싶으니 사촌동생 이름이랑 Happy Birthday to You! 빼고는 모두 한글로 써서 보내달라는 주문이었다. 카티아의 사촌 동생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정신지체부자유자로 물론 글을 읽을 수도 없다. 그래도 그렇게 해 주고 싶단다. 나중에 사촌 동생과 같은 애들을 가르치는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그랬는데 그 꿈에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보세요.” “나는 카티아예요.” “나는 한국말을 못해요.” 방으로 전화가 오면 한국 사람인 줄 알고 이렇게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바꿔주던 오 마이 카티아! 인도 어딘가에서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메일이 오고 소식이 끊어졌다. 메일 말미에 한국에 꼭 가고 싶은데 여전히 돈이 없다고 썼지만 선뜻 한국에 오라는 소리를 못했다. 5월의 독일과 오 마이 카티아의 안부를 묻는 메일을 띄워야겠다.
(여행시기: 200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