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다. 폐암이었단다. 사람좋은 웃음으로 늘 반겨주셨는데 이제 한국에 가도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많이 슬프다. 남이 아저씨는 이외수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알게되었다. 석공예가 곡천 김봉준 선생과 함께 이외수샘의 의형제셨는데 두분이 모두 돌아가셔서 외수샘이 많이 쓸쓸하실 것 같다. 가까이 있었으면 훌쩍 다녀왔을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곡천 선생님 돌아가실 때는 그래도 한국에 있어 장지인 인제에 다녀왔었다. 공연을 하나 끝내고 직원들과 지방여행을 다녀오던 날이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고 한밤중에 부랴부랴 인제에 갔던 생각이 난다.
2000년대 초반인가 그 전이었던가 정확한 해는 기억이 안난다. 어쨌거나 두분이 살아 계실 때다. 춘천의 외수샘댁에 갔다가 나오면서 서울로 바로 안 올라오고 곡천 선생님이랑 남이 아저씨랑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새벽 대여섯시쯤이었을 거다. 두분이 춘천에서 제일 맛있는 순대국밥집에 데려가주셨는데 아, 정말 맛있었다. 지금 혼자 찾아가라면 못 찾을 것 같은데 춘천시장통에 있었고, 순대랑 기타등등을 산만큼 주는 그런 곳이었다. 울아빠가 대전의 중앙시장통에서 사주신 순대국밥과 함께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순대국밥이었다.
사실 밥만 먹고 서울로 갈 생각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 남이 아저씨 차를 타고 주원이란 친구와 인제의 곡천 선생님 작업실에 가게 되었다. 한계령인지 고개를 하나 넘었던 것 같고, 차를 한잔 마셨는지 그냥 바람을 쏘였는지 차에서 내려 그 고개에서 포즈를 취하며 같이 사진도 찍은 것 같은데 그 사진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남이 아저씨는 그때도 줄담배셨다. 어떻게 찍어도 다 폼이 나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걱정아닌 걱정에 두분이 행복해하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은데 당시 졸려서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가 기억을 못하는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인제의 깔딱고개라는 데를 지나자마자 바로 작업장이었다. 선생님 작품에 비해 전시실이며 작업장이 많이 허름해서 좀 놀랐다. 전시실 옆에 화살 과녘처럼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나무판이 있어 무슨 용도냐고 여쭈었더니 곡천 선생님 왈.
곡천 선생님은 실내에서 치마를 입고 계셨다. 이게 엄청 편해, 이러시면서...처음 이사와서 군인애들이 자꾸 기웃기웃 하잖아.외수형처럼 젓가락 던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지.그랬더니 지금은 나를 보면 다들 인사를 하고 지나가.
작업장을 구경하고 그새 허기가 져 뭐 먹을 게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라면 다 끓었다고 안에서 두분이 부르신다. 등산용 취사도구도 아니고 완전 애들 소꿉장난하는 그릇들에 라면이 분배되었고 우린 애들 소꿉장난하는 기분으로 그것들을 해치웠다. 얻어 먹었으니 설겆이는 제가 할게요, 했더니 일없단다. 두분이 아주 익숙한 솜씨로 플라스틱 그릇들을 휴지로 쓱쓱 닦으시더니 설겆이 끄읕-,이란다. 내가 지리산에 갔을 때 하던 설겆이 방식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또 거기에 뭐 담아 먹어요, 그랬더니 두분이 동시에 그럼, 그러셔서 한참을 웃던 기억이 난다. 두분이 그렇게 지내셨나 보다.
방바닥이 뜨끈해지자 졸음이 쏟아졌다. 그리고 한숨이 아니라 두숨 정도 잔 것 같다. 외수샘 댁에서 날 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한 통에 잠이 한참이나 부족한 터였다. 깨어나니 먹을 치고 계셨는데 곡천 선생님 혼자였는지 남이 아저씨도 같이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곡천 선생님은 먹을 치시다 틀리면 그냥 버리시지않고 꼭 재활용을 하신다. 써야할 글자가 빠지면 v 표시를 한다음 거기에 빠진 글자를 집어 넣거나 획이 마음에 안들면 그 위에 덧칠을 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도 내가 한 거니까 괜찮아, 그러시면서....내가 중국에서 유학할 때 붓으로 쓰신 편지를 보내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도 역시나 빠진 글자는 v 표시 위해 적으셨던 것 같다. 그날 곡천 선생님 뒤를 이어 진달래석으로 도장파는 일을 하는 따님 일터에도 갔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남이 아저씨는 농담을 좋아하시고, 곡천 선생님은 장난을 좋아하셔서 같이 있는 내내 계속 웃어야했다. 그때의 남이 아저씨는 울고 싶어라, 노래할 때의 가수 이남이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의 곡천 선생님도 내 기억에 '돌'을 쪼다 'ㄹ'을 깨버렸다는 석공예가 김봉준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 외수샘 만났을 때 술이 거나해지시면 네가 예술을 알아, 예술이 뭐냐,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셔서 늘 긴장을 했었다. 물론 답변도 외수샘이 하시니 그냥 앉아 있으면 되는 건데 이 질문이 나오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사실 내 생각을 조리있게 말하면 되는데 예술이 뭐냐, 이러시면 예술이 뭐지, 이런 생각과 함께 머릿속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내 기억에 세분 모두 예술지상주의자들이신데 곡천 선생님은 예술이 무엇인지 가장 명쾌하게 정의하고 또 몸소 보여주신 분이셨다. 그리고 외수샘은 이십대 때부터 내가 그쪽에 관심가지고 계속 살아 올 수 있도록 나침반이 되어주셨다. 남이 아저씨는 두분의 진지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날 대해주셨고, 내가 하는 일에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아저씨의 백만불짜리 웃음 때문인지, 소탈한 성격 때문인지 나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유독 남이 아저씨만 이남이 선생님이 아니라 그냥 아저씨로 부른다.
인제에 간 건 확실하게 기억나는데 그날 깔딱고개를 넘어 서울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잘 모르겠다. 담배를 쉬지않고 피우시던 남이 아저씨가 결국 폐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저씨랑 즐거웠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담배를 한손에 들고 언제나 씩 웃어주셨던 남이 아저씨도 그립고,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도 그립고, 그 공간도 그리운 날이다. 같이 찍은 사진은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남이 아저씨가 그려주신, 중광스님을 닮은 달마가 서울 집에 잘 모셔져 있다. 장지는 못갔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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