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한시간쯤 지났나 싶을 때쯤 다행히 비가 그쳤다. 신은 역시 내편. 정말 거의 뛰다시피해서 시장엘 다녀왔다. 중간에 가랑비 비스무리한게 내렸지만 내 갈길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시안마켓에 가서 늘 먹던 라면들과 새로 출시한 이름 생소한 라면들을 구입한 후 세인즈베리로 서둘러 움직였다. 허기질 때 장보면 안된다는 거 알면서도 상황이 상황이었던만큼 절제하기가 힘들었다. 실로 오랫만에 카트가 넘치도록 장을 봤다. 화장지 한꾸러미, 세제 같은 것도 있었으니 완전 다 먹을 거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방에 도착한 후 짐을 풀고 있을 때쯤 비가 또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회심의 미소를 날렸드랬지. 내 냉장고는 더 이상 어제의 냉장고가 아니었고.
장보면서 거의 반년만에 그라운드 커피 250그램을 샀다. 당근 블랜딩된 아라비카 커피. 커피는 맛있는 커피점에서 사먹자주의였는데 가끔 비도 오고 그럴땐 참아야해서 한번 구입해봤다. 난 커피를 매일 마시는 중독자도 아니고, 하루에 수십잔씩 마셔야하는 바리스타나 콩사냥꾼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땡길 때만 마시는 편이라 한번에 10그램씩 끓여 마신다고 해도 스물다섯잔 다 마실려면 꽤 걸릴듯. 어쨌든 깡통을 땄으니 빨랑 해치워야해서 오늘 당장 한잔 쭉 뽑아봤다.
일본에 살때 옆방의 김상 남친이 이탈리아 갔다오면서 선물로 준 에스프레소 커피메이커 (흔히 모카포트라고 부르는)가 있는데 아직도 여기저기 나를 따라 다닌다. 아래쪽에 정수된 찬물을 채우고, 커피가루를 느낌상 10그램 조금 못되게 담아 살살 흔들어 준 다음 커피메이커 위 아래를 아주 힘껏 돌렸다. 추출하면서 단 한방울의 커피도 흘리고 싶지 않아서다. 커피메이커에서 돌돌돌 소리가 날 정도의 시간이 지나 불을 끈후 여열 위에 커피메이커를 그대로 올려놓은 채 우유 반잔을 전자렌지에 돌렸다.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올 정도로. 추출한 커피를 데운 우유에 부으면 즉석 카페라떼. 뜨거운 물에 부으면 카페 아메리카노. 커피마시면서 어제 주전부리할 것좀 사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엄마가 빨리 논문 끝내고 공부하듯이 연애 열심히 하라시면서, 사랑이 식으면 사람이 더위 먹은 개가 되는데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은 만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긴장감도 없고, 모든 게 다 귀찮아지고, 해야할 일을 안해도 별로 데미지도 없고. 생각해보니 그러네. 외교통상부 표절사건 후에 이외수 선생님께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하는 연락을 드렸더니, 네가 말 안해도 요강 뚜껑에 물마신 기분일 거라며 선생님 스타일의 격려를 해주셨다. 맥락은 다른 위로였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은 어쩜 다들 저렇게 절묘한 표현들을 힘 안들이고 하시는지.
'채널24: 영국 > 영국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풍 볼라벤 (0) | 2012.08.28 |
---|---|
내 인생의 로또 (0) | 2012.08.27 |
불쌍한 유학생의 넋두리 (0) | 2012.08.25 |
영국의 여름 날씨 (2) | 2012.08.23 |
빨리와, 빨리와!! (0) | 2012.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