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랑의 동반자 목록에 늘 빠지지 않는 게 하나 있으니 바로 라디오다. 물건 사면서 경품으로 따라 온 것 같은데 건전지 네개만 넣으면 거의 1년을 들을 수 있다. 낯선 나라에 갈 때도 들고 가는데 프로그램 정보를 몰라도 그냥 잡히는 주파수를 듣는 편이다. 라디오가 낯선 곳이 금방 익숙해지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영국에 있는 동안은 집에 있을 때 늘 BBC 라디오 클래식 채널을 틀어 놓는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즐겨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내 행운에 감탄한다. 작정한 건 아니었지만 하루종일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나라에서 공부를 할 수 있어서다. 영국, 한국, 일본의 선호하는 클래식 음악들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좀 다른 것 같다. 한국에서 자주 듣던 에릭 사티를 여기서는 자주 못 듣는다. 모짜르트도 자주 안 나오는 것 같고. 조지 거쉰이나 림스키 코르사코프, 비발디, 베토벤은 여기서도 자주 듣는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번이나 베토벤의 합창을 들을 때도 있다. 방송국 내에서 그날 내보내는 음악에 대해 미리 상의를 하지는 않나 보다.     


방금 비발디 <사계> 중 '겨울' 악장이 끝났다. 색다르게 편곡되어 내 귀를 확 잡아당겼다. 곡이 끝나자 진행자가 "으흐흐흐" 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낸다. 추위에 떠는 모습을 소리낸 것이겠지. 공연기획자로 일할 때 한 해에 20회 넘게 서로 다른 연주자들이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공연장에서 비발디 <사계>를 연주한 적이 있다. 그 덕분에 이 곡은 어떤 장이 나와도 반갑다. 방금 전처럼 가을에 듣는 '겨울'도 좋고, 겨울에 듣는 '봄'도 좋다. 보통 공연 프로그램이 정해지면 공연이 끝날 때까지 연주되는 곡들을 귀가 닳도록 듣는다. 회사에 있는 음반이면 그걸로 듣고, 음반이 없으면 사서 듣는다. 그렇게도 못 구한 음반은 연주자들에게 미리 부탁을 해서 씨디를 받기도 한다. 공연 당일 공연장에서뿐만 아니라 나는 리허설에도 배석을 해야했으니 비발디 <사계>는 곡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주 스타일까지 아주 달달 외울 정도다. 그래서 색다른 편곡의 비발디 <사계>가 나오면 반갑고, 전에 순회공연하던 생각이 많이 난다. 이 블로그에도 아이리시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시골 동네에 공연 갔던 에피소드를 올려놓은 적이 있다. 그때도 <사계>가 연주되었다. 


라디오 덕분에 일요일 오후 갑자기 내 마음이 부자가 된 느낌이다. 천상병 시인이 살아계실 때 93.1 클래식 채널을 즐겨 들었다고 하셨는데 10년 이상 꾸준히 클래식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분이 느낀 재미나 내가 느끼는 재미가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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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