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영국에 왔을때 부엌 쓰기가 애매해 거의 석달을 샌드위치 같은 빵으로 해결한 적이 있다. 기숙사 입주자가 21명인데 부엌은 달랑 하나. 가끔 오거나 아주 같이 사는 보이프렌드들, 걸프렌드들까지 합하면 식사시간대의 부엌은 완전 난장판이라 도저히 요리할 기분이 안 났다. 새 기숙사로 옮기고 선물 받은 한국 전기압력솥에 밥을 해먹기 시작했는데 그 기쁨도 잠시, 압력밥솥이 고장이 나버렸다. 원인도 모르겠고, 수리를 해볼까 물어봤더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왕복배송료에 수리비까지 계산해보니 새로 하나 사는 게 나을 정도였다. 이곳을 떠나면서 누가 주고 간 테팔 전기밥솥이 있어 아쉬운 참에 사용을 해봤는데 여기에 밥을 하면 무슨 수단을 강구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밥이 만들어진다. 취사에서 보온시간으로 넘어간 지 5분이 지나면 무조건 열을 차단해줘야하는데 계속 플러그를 꼽아놓으면 이건 밥도 아니고 쓰레기도 아닌 이상한 물건으로 변해버려서 언제 보온으로 넘어가는 지 지켜봐야한다. 맛있는 밥 먹는 걸 포기하고 나자 내 인생, 그만 재미가 없어져버렸다. 한국엄마도 일본엄마도 계속 걱정을 하셔서 내가 생각해낸 게 냄비밥. 두분 다 압력밥솥을 하나 사서 보내줄까 하시는데 이제 여기서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하면서 관두라고 하고는 냄비에 밥을 해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밥물도 가늠을 못하고, 불조절을 잘 못해 밥 한끼 하고 나면 레인지주변을 청소하는데만 반나절을 보낼 만큼 밥물을 넘겼는데 몇 번 해보니 감이 딱 왔다. 궁금한 분들은 한번 해 먹어 보시라. 진짜 맛있다. 냄비밥!! 


며칠 전 늘 가는 아시안마켓에 가서 늘 사던 상표와 무게의 쌀을 한포 사가지고 왔다. 가격도 변동이 없어 의심할 여지가 없었는데 집에와 열어보니 이런, 일반쌀이 아니라 현미였다. 쌀을 바꾸러 가자니 귀찮고해서 인터넷에 현미로 냄비밥 하는 방법을 찾아 시도를 해봤다. 물에 여덟시간 이상 담궈놔야하고 오래 뜸을 들이는 것 말고는 일반 밥하는 것하고 방식이 똑같았다. 그래서 해봤지. 일반 냄비밥 보다는 확실히 시간이 더 걸렸다. 그럼 맛은? 일반쌀로 했을 때보다 훨씬 고소하고 포만감이 좀 오래가는 것 같다. 5일 정도 해먹어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현미의 세계로 안착을 한 느낌이다. 현미가 몸에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그동안 해 먹어볼 엄두는 안 났었다. 한국엄마, 일본엄마의 현미밥 짓는 방식이 완전히 다른데 그건 나중에 업데이트 하기로. 밥하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그래도 테팔 솥에 할때보다 덜 스트레스에다 맛이 확실하니 사다 놓은 현미 다 먹고 또 사러 갈 것 같다. 


술담배도 안하고, 그런 자리도 안가고, 늘 건강식만 챙겨먹다가 나 정말 100살까지 사는 거 아닌 지 모르겠다. 내 친구들 다 죽고 나만 혼자 남아 외롭게 사는 꿈을 가끔 꾸는데 좀 무섭긴 하다. 그렇다고 갑자기 몸에 나쁜 걸 하고, 먹어야 할 환경이 안되니 이런 걸 행복한 고민이라고 해야하나. 아무래도 20년이나 30년 장기 목표로 외국어를 하나 더 배워야겠다. 70살, 80살 되어 책도 읽기 싫은 날 창밖으로 봄이 가고, 여름이 가는 것 보면서 외국어 단어라도 외우면 시간이 잘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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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