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와서 새로 생긴 취미가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차 마시기. 커피와의 연관성 때문에 처음에는 책과 자료들로 마셨는데 이젠 직접 좋은 차들을 챙겨 마시는 중이다. 차 종류도 많고, 만들어 마시는 방법도 다양하고, 다구들도 특이한 게 많아 공부할 맛도 나고, 마실 맛도 난다. 한국에서 차를 많이 마실 수 있었던 곳은 출가한 친구가 머물던 절의 작은 방, 그리고 외수샘 댁이었다. 그곳에서 마셨던 좋은 차들 덕분에 입을 버렸다고 해야 하나, 다른 곳에서 마시는 차는 영 맛이 없는 거라. 그런저런 이유로 차를 그리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영국에 와서 처음 차를 사러 가게에 들러 고른 게 얼 그레이 (Earl Grey). 숍에 들어서자마자 매장 한켠에 가득 쌓여있는 얼 그레이 박스들을 보면서 그 작은 차 한상자를 못구해 지방도시 여기저기를 빨빨대며 돌아다녔던 생각에 웃음이 났다. 내겐 참 아픈 추억이 있는 차이다. 


공연일 할 때 운이 좋았다고 해야하나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클래식, 비발디의 '사계' 연주로 유명한 이 무지치 (I Musici)와 순회공연을 한 적이 있다. 리더와 챔발로 연주자가 부부였는데 창단할 때부터 그때까지 늘 공연을 함께 했다는 어매이징한 사연이 있었다. 이 무지치 계약서에는 이 부부가 함께 머물 수 있는 호텔 제공이 반드시 포함되는데 그게 50년 이상 계속 되고 있었다는 사실. 나이 드신 분들의 애정표현이 젊은 사람들 못지않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공연기획자로서 분장실에는 항상 연주자들을 위한 다과를 준비하는 게 내 일과 중 하나였는데 그때 챔발로 연주자가 내게 따로 부탁한 게 얼 그레이였다. 서울 포함 8개 도시에서 공연을 했는데 난 그 정도 차는 지방에도 다 있는 줄 알았고, 없다고 다른 차를 주면 그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 줄 알았다. 그 챔발로 연주하는 할머니가. 세상은 역시나 내게 만만치 않았던 시절이라 지방의 대형 백화점에서도 얼 그레이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에 왔으니 녹차나 다른 한국 전통차는 어떠냐는 내 꼬임에도 할머니가 넘어가지 않는 바람에 결국 서울에서 내려오는 직원편에 얼 그레이를 부탁해야했다. 1월 공연이었는데 얼 그레이 한 박스를 찾아 추운 날 광주시내를 택시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한시간도 넘게 헤맨 기억이 난다. 지금도 얼 그레이 차를 마실 때면 그때 개고생했던 일과 이 무지치 생각이 많이 난다. 


저녁이라 카페인 없는 티백을 두개 진하게 우렸고, 우유까지 듬뿍 넣었더니 인도차이 같은 맛이 난다.


사진출처: http://www.cafferitazza.com/tea/earl_g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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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