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좀 무거운 느낌이 들어 샤워하면서 10센치 정도 잘라냈다. 미용실 한번 가려면 예약해야지, 끝에만 잘라달라고 하는데도 30~40파운드를 부르지, 가서도 또 한참을 기다려야한다. 그래서 이젠 쓱쓱 혼자 자른다. 전문가처럼 깔끔하게 자르지는 못해도 질끈 묶으면 별 차이없을 정도로 자른다. 


머리를 혼자 자르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에 있을 때 국제협력단 소속의 미용봉사단원이 있다고 해서 만나러 간날 허탕을 치는 바람에 혼자 자르기 시작한 게 계기라면 계기. 미용실도 가보고, 이발소도 가봤는데 도무지 머리 자를 엄두가 안나 찾아간 거였다. 내가 미용실에 들어서자마자 여러 명이 달려들어 하도 만지는 통에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머물던 호텔 앞에 이발소가 있어 그냥 끝에만 자르고 싶은데 잘라 줄 수 있겠냐고 하고 들어섰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길에서 나만 보면 이발소 총각들이 머리 안자르냐고 난리난리. 어쨌거나 그날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면서 혼자 머리를 잘랐다.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원빈 생각이 나는 바람에 이 참에 그냥 확 밀어버려, 하고 잠깐 흔들렸지만 '바리깡'이 없는 관계로 겨우 참을 수 있었다. 허나 자르긴 잘랐는데 길이를 잘 못 맞춰 한동안 머리띠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추억이.... 그후 두번 다시 그런 실수는 안 한다.


부모님과 중국 여행 중에 어떤 호텔에서 엄마가 그러셨다. "넌 아무래도 이렇게 살 것 같다." 당시 부모님과 남쪽여행이 끝나면 난 서부쪽으로 혼자 여행을 할 생각이라 제법 묵직한 배낭을 가지고 다녔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순식간에 짐을 꾸리는 나를 보고서 하신 말씀이다. (지금 보시면 아마 더 놀라시겠지?) 그땐 유랑에 대해 아무 계획이 없던 때였고, 내가 지금처럼 살 거라고는 전혀 꿈조차 꾸지 않던 때라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를 혼자 자르기 시작하면서 내가 정말 유목민이 되었구나, 하는 게 실감이 났다. 난 떠돌긴 떠돌지만 한곳에 오래 머무는 편이라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 쓰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되도록 번잡스럽지않고, 간소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소비(여러가지 의미에서의 소비) 패턴이 점점 단순해지면서, 삶 자체도 심플해지는 게 느껴지는 데, 아직까지 이렇게 사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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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