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24: 중국/중국문화기행'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7.11.11 북한 식당 방문기(1) 4
  2. 2007.04.15 내몽고행 기차 안에서 2
  3. 2007.04.14 리틀 티베트 랑무스에서
  4. 2007.04.14 뱃사람 아닌 뱃사람
  5. 2007.04.1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네
북경 평양식당 해당화

북경 유학 시절, 친구를 통해 평양식당인 ‘해당화’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우리 돈으로 천 원도 안 되는 몇 원짜리 중국 음식에 길들여져 있다가 해당화에서 먹었던 북한 음식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해당화'의 ‘가재미 식혜’는 제일 좋아하는 음식 목록에 올려 놓고 있다.


북경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가끔 가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값만 비싸고 한국에서 먹었던 맛과 달라서 갈 때마다 후회를 했던 기억이 난다. 중국에서 운영하는 한국 식당은 대부분 주인만 한국 사람이고 주방에 있는 사람들이나 종업원들이 조선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들은 한국 사람과 말은 통하지만 그들은 한국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한국식 서비스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낯선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음식 맛도 대부분 중국에서 생산되는 재료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변형된 맛, 그러니까 중국스러운 비빔밥에 중국스러운 불고기가 나온다.


그러나 ‘해당화’는 달랐다. 북한에서 직접 들여온 재료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두릅나물’ 같은 경우는 향이 얼마나 진한지 모른다. ‘평양 통김치’는 한국에서 먹어 본 김치 맛 그 이상이었다. 서비스 하는 종업원들도 전부 북한의 고려호텔을 비롯한 고급 호텔에서 소양교육을 받고 파견된 사람들로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북한을 느낄 수 있다. 음식 이름들도 백두산 들쭉술, 단고기무침 등 ‘조선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해당화'를 찾는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 보다, 중국 사람들 보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한국 사람들이 '해당화'를 많이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북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해당화'의 음식 맛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음식점에서 맛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던가.

북한 문화를 파는 해당화
'해당화'는 대개 저녁 9시 반까지 영업을 한다. 손님이 많은 시간에는 홀에서 서비스를 하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종업원 몇 명이 무대에 올라가 기타와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반주에 맞춰 귀에 익은 ‘반갑습네다’ 같은 북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해당화' 버전으로 부르는 ‘아침이슬’은 들을 때마다 묘한 감동이 밀려 온다. 가끔씩 흥에 취한 한국 손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대에 올라가 같이 부르겠다고 마이크를 달라며 성화를 대거나 사진을 찍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도 일종의 공연이다. 공연이 끝나고 정중히 양해를 구해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영 보기에 민망하다.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식당, 특히 중국에 나가 있는 한국 식당은 ‘해당화’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의 비용 몇 푼을 아끼려고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곳에서 내용은 빠진 겉만 번지르르한 한국 식당이 너무 많다. 한국 음식이 그리워 마음 먹고 찾아간 식당인데 전혀 한국 음식 맛을 느낄 수가 없을 때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차라리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렴하게 먹고 나오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말이다. 한국 식당을 이용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중국에서 뭘 크게 기대하겠느냐는 거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 식당을 이용하는 중국인이나 다른 외국인이 이런 음식 맛을 한국 맛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기와 지붕에 상호만 한글 식당이면 뭐하나. 안에 들어가면 조선족 주방장이 중국산 재료로 만든 음식이 나오고, 조선족이 중국식으로 서비스를 하는데 그게 어디 한국 식당인가.

‘해당화’는 북한 음식만 파는 곳이 아니다. 북한 문화를 파는 곳이다. 우리 눈에는 낯설고 때론 촌스럽기까지 한 것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이다. 북한 문화. 우리로서는 ‘북한스럽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문화를 그들은 철저히 돈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들이다. GDP는 우리가 월등히 높지만, 문화를 파는 재주에 관한한 ‘해당화’의 그들이 한 수 위로 보인다. 오늘도 한국 사람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그들은 찌개를 나르다 기타를 메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반갑습네다’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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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중국 원조 라면, 란저우(蘭州) 라미엔

인스턴트 라면을 비롯해 우리가 지금 먹는 라면의 원조는 일본이다. 중국의 국수가 마르코 폴로 덕분에 서양으로 건너가 스파게티가 되었고, 그 국수가 한국을 거쳐 일본에 가서는 라면이 되었다. 중국에도 맛이 다른 이 라면이 있다. 우리가 흔히 수퍼에서 사다먹는 라면도 있지만 중국에서 보통 라면(拉面, '라미엔'이라고 읽는다.)이라고 하면 손으로 뽑은 면을 각 종 재료로 끓인 걸 말한다. 소고기가 좀 들어가면 소고기 라면이고 닭고기가 들어가면 닭고기 라면이 되는 것이다. 길게 잡아 늘릴 라(拉, 한국식으로 읽으면 ‘납’), 면자는 우리가 쓰는 글자랑 다른 면(面, '미엔'이라고 읽는다.)이다.

 

이 라면이 제일 맛있는 곳이 란저우(蘭州)라는 곳이다. 베이징에서도 아침 시장에서 소고기 라미엔을 1원씩 주고 먹어 봤지만 란저우 라미엔은 정말 맛있다. 우리도 원조 원조 하는데 중국도 마찬가지다. 라미엔집 상호에 란저우가 들어가 있는 집이 많다. 물론 본고장 란저우에 가면 여기저기 원조 라미엔 천지다.

 

원조 라미엔을 먹고 란저우에서 은추완((銀川, 한글로 은천인데 이름이 참 예쁘지 않은가?)을 지나 내몽고로 향할 때였다. 서른 시간 넘게 타고 다니는 기차 여행에 익숙해지니까 열 대여섯 시간 입석은 이제 할 만하다. 청량리역에서 춘천까지 두 시간 거리, 좌석이 없으면 다음 기차로 미루던 때가 있었는데 나 원 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hoto by Yann Layma

 

은추완에서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으로

은추완에서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까지 9시간인데 발디딜틈 없이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 기대지도 못하고 꼬박 서서 가야할 판이다. 뻔뻔한 사람들은 앉아있는 아가씨 옆으로 가서 자꾸만 자기 엉덩이를 들이밀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는 사람이 없다. 참 이상한 나라다. 나 말고는 주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임어당의 글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그게 다 민족성 때문이란다. 여기저기 관심 많은 사람 치고 잘 된 경우 없고, 그냥 내 일에만 관심 갖고 살면 세상 살기 편해서란다. 

 

새벽 한 시. 낮엔 가끔 사막이라도 볼 수 있었는데, 기암절벽도 볼 수 있었는데, 푸른 초원도 볼 수 있었는데, 깜깜해지니까 창에 어린 나 밖에 볼 수가 없다. 친구도 생각하고 가족도 생각하고 옛날 생각도 하고 앞으로 살 날 생각도 하고 그러면서 달리는 기차에 나를 내버려두고 있었다.


정확한 보통화를 구사하는 아주머니가 나를 자기 옆으로 앉으라고 그런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안돼보였는지 그래도 자꾸만 부른다. 그럴 때 누가 앉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 여섯 시간 만원 기차에서 서서 가다보면 바닥이라도 앉고 싶어진다.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 본 거다. 서서 오는 내내 나를 모른 척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갑자기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정말 갑자기, 느닷없이, 순식간에.


안재욱을 얘기해 줘야 했고 김희선이 진짜 봐도 예쁜지 설명해 줘야 했고 HOT의 멤버를 얘기해 줘야 하는데 난 걔네들 이름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국 사람이면 그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희망을 이어 줘야 했다. 내가 신고 다니는 발목 올라오는 신발을 보고 한국 애들은 다 그런 걸 신느냐 물으면 대답해 줘야 했고(사실 그 신발은 중국에서 산 건데.), 쓰고 있는 모자를 한 번만 써 봐도 되겠냐는 맞은 편 남학생한테 어색해하며 그 모자를 건네줘야 했다. 이게 아닌데 속으로 계속 되뇌어보지만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순간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는.

 

자리를 양보한 아주머니는 금방 일어나셨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입석으로 표를 끊어도 왔다갔다 하는 객차승무원이랑 말이 잘 되면 침대차로도 표를 바꿀 수가 있다는 거다. 은추완에서 베이징을 왔다갔다 하며 장사를 하신다는 그 아주머니는 시골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들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친절하게 순차통역을 해 주셨다. 젊을 때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부럽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여행 조심하라고는 떠나셨다.

 

아직도 중국은 여권 발급이 자유롭지 않고, 또 가려는 나라의 비자 문제가 매끄럽지 않다. 그래서 여권이랑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려는 중국 교포들이 브로커들한테 고액의 돈을 바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차에서 만난 용감한 형제

후허하오트어에는 왜 가냐고 앞에 앉아 있는, 베이징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학생이 자꾸 물어본다. 사막을 보러 간다고. 초원을 보러 간다고. 그런 걸 왜 보러 가냐고 그런다. 그냥.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좀 더 근사한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장학생으로 대학을 간다는 이 시골 청년은 베이징에 대한 환상이 굉장히 컸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기차도 신기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인과 얘기를 해 본다고 그 또한 신기해했다.

 

옆 좌석에는 이미 베이징에서 2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있는 형이 있었는데 전공이 무용이라면서 뜬금없이 한국의 댄스 가수들에 대한 계보를 죽 읊어대는 게 아닌가. 한국에서 불리는 이름이랑 중국에서 그들이 부르는 이름이 한자만 같지 발음이 달라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그 형이란 친구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참고로 안재욱은 중국에서 안자이쉐로 발음을 한다. 어떻게 한국에 살면서 그렇게 유명한 애들을 모를 수가 있느냐는 형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HOT 멤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떼로 나와서 노래하는 팀의 멤버들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 출출하다면서 건네는 컵라면을 그날 나는 먹지 못했다. 한국에서 새벽 네 시에도 먹었던 라면이 도무지 당기지를 않아서였다. 수북이 쌓아놓고 먹으라는 해바라기씨도 먹지 못했다. 원래 호박씨든 해바라기씨든 까먹는 건 감질나서 잘 안 먹는 편인데 새벽, 그 시간에는 더더욱 못 먹는다. 자기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제과점에서 사 온 빵이라면서 건네는 빵도 물론 못 먹었다. 그럼 포도는 어떠냐고 권하는데 그것도 역시 못 먹었다. 그 새벽, 그 기차 안에서 난 그 어떤 호의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참으로 미안하다.

 

원래 용간한 친구들인지 외국인인 나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형제들은 입석표를 가진 나와 다른 여자 승객한테 둘 다 자리를 양보했다. 나야 서 너 시간 후면 내몽고 역에서 내리지만 그들은 베이징까지 아직도 열 시간을 넘게 가야 하는데 말이다.

 

동생은 지금쯤 졸업을 했을 테고 여자친구가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벽 두 시 근방에 내몽고역에서 내리려는 나를 끝까지 배웅하던 친구였다.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무거운 배낭 메는 걸 도와주고 안 먹겠다고 고집피우던 음식들을 따로 비닐에 담아 손에 걸어주면서 문까지 따라와 인사하던 참으로 가슴이 따뜻한 친구들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이 친구들을 나는 그저 용감한 형제로 기억하고 있다. 은추완에서 내몽고로 가는 기차안에서 만난 용감한 형제로.


(여행시기: 2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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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시계방향으로 돌아돌아 중국 한 바퀴 

2001년 여름, 석달간 기차를 타고 시계방향으로 중국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여행하면서 내내 침이 나올 만큼 중국이 부러웠다. 문명의 세례를 흠뻑 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여전히 한없이 미개해 보이는 그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사는 터전인 천혜의 자연을 훔쳐올 수도 없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솔직히 너무 배가 아팠다

 

가진자들에게는 확실하게 서비스를 해주는 나라가 중국이다. 기차를 한 번 타봐도 그건 금방 알 수 있다. 여행 안내 책자에는 대개 기차를 네 종류로 등급을 구분해 놓는데 경험에 의하면 다섯 종류다. 제일 비싼 자리는 침대가 푹신한 곳, 그 다음은 딱딱한 침대, 그것보다 싼 자리는 뒤로 꺾을 수 없는 약간 푹신한 의자, 그리고 우리가 중국을 소개하는 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90도 각도의 자로 된 딱딱한 의자, 마지막이 입석이다.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남쪽 끝에서 북쪽으로 한 번 이동하려면 며칠이 걸린다. 이렇게 멀리 움직이는 기차에 입석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른 네시간 짜리 입석을 타본 적이 있는데 이건 타 본 사람만 알리라.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다리가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부어 걷기가 힘들 정도다.

 

내가 본 중국사람들은 새벽 두 시에도 해바라기씨를 까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이를 안고 밀폐된 공간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여담이지만 담배 한 대가 그냥 놔두면 7분이면 다 탄다는데 이 사람들은 한 대로 20분을 즐길 수가 있단다. 무서운 사람들. 컵라면을 먹고 국물이 질질 흐르는 바닥을 슥슥 발로 비비고는 그 기차 바닥에 몸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아직은 과일껍질이고 PET병이고 플라스틱 도시락이고 무조건 기차 밖으로 던지는 사람들이다. 급하면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보고, 볼 일을 보다가 자기 것(?)이 옆사람한테 튀어도 미안하단 말을 안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차가 고장이 나서 여섯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아도 승객들끼리 여유있게 담소를 즐기고, 그러다 차가 움직이면 운전기사한테 박수를 보내고 먹던 과일까지 전해주는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 지리 선생님이 중국은 전형적인 서고동저형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늘 헷갈렸는데 내가 밟아 본 중국은 확실히 동쪽은 평야가 많고 서쪽은 고산지대가 대부분인 서고동저형이 맞다. 선생님 말씀을 수십년이 지나 몸으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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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log.naver.com/rockcap

해발 고도 2,800m 산골짜기 랑무스(朗木寺)

도대체 어디까지 버스가 올라 갈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도착한 곳은 리틀 티베트라고도 부르는 랑무스(朗木寺)라는 곳이다. 시아허(夏河)에서 남쪽으로 버스로 5~6시간 더 내려가면 랑무스라는 작은 산골동네가 있다. 나는 위에서가 아니라 아랫동네인 송판이란 곳에서 위로 위로 올라가 이 곳에 도착했다. 해발 고도 2,800m. 도착하기 전까지 좌우로 펼쳐지는 광활한 초원(몽고에 도착한 후 그때까지 내가 봤던 초원은 진정한 초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은 아직도 원시를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 이름이 랑무스가 아니라 마을 안에 있는 절 이름이 랑무스였다. 라마교 6대 사찰 중의 하나로 작은 마을 규모에 비하면 제법 큰 절이었다.

 

중국은 넓은 땅덩어리 안에 여름에도 봄 가을 겨울 계절을 다 가지고 있는 나라다. 여행하고 싶어하는 나라들의 좋은 풍광에 계절마저 다 가지고 있으니 부러워할 수밖에. 내가 찾아간 랑무스는 바깥이 여름이라도 겨울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스위스를 느낄 수 있는 곳이지만 슬프게도 화장실이 없는 곳이었다. 해발 3,000m에 육박하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비로소 나는 나를 버릴 수 있었다.

 

랑무스에 있는 성도식당에서 젊은 친구를 하나 만났다. 쓰촨대학에 다니는 이 친구는 방학이 되면 식당을 하는 엄마를 도와주러 이 마을에 머문다고 한다. 관광객이 거의 없는 이곳에서 식당이 되나 싶었지만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식당이랑은 많이 달랐다. 주문하면 재료가 없어 요리 할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 결국 가지고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시켜 먹을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어 주문을 했는데 개념이 없는 두 모자는 도대체 그런 음식이 어디 있느냐는 거다. 팬을 기름에 달궈서 달걀 노른자가 가운데 동그랗게 살아있게 가져오면 된다고 설명했는데도 그게 없다는 거다. 기름에 범벅이 된 달걀 요리에 결국 내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직접 들어가서 반숙으로 된 달걀 프라이 요리를 해 오니 그렇게 익지도 않은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고 난리였다. 감자를 채 썰어 대충 볶아 먹었던 것도 같고, 이름도 모르는 밀가루 음식을 내와서 간신히 넘긴 기억도 난다. 내가 경험한 랑무스는 그런 곳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겁 없이 그곳에 갔었는데 여름인데도 야크 똥을 태워 난방에 쓰는 난로를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그 식당 안에도 난로가 있었다. 내가 하도 춥다 춥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겨울도 아닌 여름에 뭐가 그리 춥다고 난리냔다. 근데 비스듬히 들어올린 그 총각 바지 속에 내복이 들어있었다. 랑무스는 그렇게 여름에도 추운 곳이었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새벽 6시 반에 딱 한 대밖에 없는 마을이라 하루만 묵을 생각이었는데 나흘을 더 묵는 바람에 추억 거리가 많아졌다. 그 총각이 언제 떠나느냐 묻기에 내일 떠난다 그랬더니 몹시 아쉬워하면서 하루 더 머물고 가면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고 나를 잡았다. 아침 8에 절의 주지스님이 죽어서 장례식을 거행하는데 볼 생각이 있느냐는 거다. 배낭여행객들한테 마을의 행사는 그게 뭐가 되었든 봐주어야 한다는 게 내 여행철학이다. 결혼식이 되었든 그게 장례식이 되었든. 그러마 그러고 하루 종일 동네 구경을 했다. 동네라고 해 봤자 양떼들이 환장하고 뛰어 노는 동산 위에 올라가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이 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랑무스에 오기 전에 샀던 천도복숭아를 먹으면서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오호 통재라. 아침에 일어났더니 이미 10다. 장례식을 놓쳤다. 한없이 게으른 자세로 느리적 거리며 식당엘 갔더니 총각 어머니가 끓는 물에 쌀을 집어넣고 있었다. 죽을 먹고 싶다고 그랬더니 아침 일찍 오면 된다고 그랬는데 그 때까지 두 모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나한테 무슨 이런 복이 있나 그러면서 죽을 후후 불어 넘겼다. 북부의 서민들은 아침에 대부분 죽이랑 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만토(밀가루 빵)를 주식으로 먹는다. 남쪽 사람들은 밥을 주로 먹지만. 한 일년 북쪽에 살았더니 나도 그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죽이 먹고 싶어 그냥 한 말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날 감동시켰다. 죽에 대한 답례로 앞으로 이 동네에 외국 여행객들이 많이 올지 모르니까 메뉴판을 정비하자고 총각을 설득해 성도식당 메뉴판을 점검해 주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를 부록으로 가르쳐 주었다.

 

장례식을 놓쳐서 안 됐다는 표정을 짓더니 내일 또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면서 그냥 천장天葬이 있는 장소나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장례식이 8 있으니 그걸 보려면 천상 하루를 더 묵어야 하는데 고민이 됐다. 천천히 생각하자 그랬는데 며칠을 더 묵고 그 곳을 떠나면서 알았다. 나도 참 순진하기는. 어떻게 주지스님 장례식이 매일 있을 수가 있겠는가. 여행객이 뜸한 그 곳에서는 마을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내일도 또 내일도 장례식이 있으니 그걸 보고 가라 그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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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aychen


고산지대 천장(天葬)
 풍경

천장은 죽은 사람의 뼈를 잘게 부숴서 매나 독수리들이 먹을 수 있게 던져 놓는 것으로 고산지대에서 볼 수 있는 장례 풍습의 일종이다. 땅도 척박하고 묻어도 썩지 않으니 그런 식으로 장례를 지내는가 보다. 고산지대에 '조장鳥葬' 풍습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외부인에게 공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천장이 치러지는 곳은 마을에서 제일 높은 언덕으로 그곳에 제단이 있었다. 총각이랑 빨치산처럼 비탈을 돌아 능선을 타고 제단에 도착했다. 피 묻은 도끼도 그대로 있고 잘게 부순 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주변으로 오색 찬란한 헝겊들이 날리는 중간에 제를 지내는 단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시선으로 이 자리에서 내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도 사람 사는 마을인데 뭐, 그러면서 금방 긴장을 풀어버렸다.

 

밤이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빛 아래에서 라마승들이랑 동네아저씨들이 낯선 이방인 아가씨에게  쏟아 내는 질문을 건성으로 듣고 건성으로 답하면서 황하 맥주에 취해 랑무스에서의 며칠이 그렇게 흘러갔다.


떠나던 날 다행히 시간에 맞춰 일어나 새벽 6 30 차를 탈 수 있었다. 난 지금 그 친구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랑무스의 성도식당만을 기억하고 있다. 언제 또다시 그 곳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01년, 내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 (2001.7~9 중국 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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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물고기를 잡아야 뱃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물을 던져 잡든 바늘로 잡든 뱃사람이라면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 물고기 안 잡는 뱃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배에서 생활한다. 뭍에 내려오기도 하지만 물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뱃사람인 탓에 배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그들은 배 위에서 먹고 배 위에서 배설하고 배 위에서 씻고 배 위에서 잠잔다. 이러니 뱃사람이 아닌가.


인천 제1국제여객터미널에 가서 중국행 배에 오르면 이런 뱃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뱃사람 중에는 조선족도 있고 (북한 억양이 섞인) 조선어가 아닌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중국 한족도 있다. 더러 한국인 뱃사람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물건을 교역하는 일에 종사한다. 한국 물건을 중국에 내다 팔기도 하고 중국 물건을 한국으로 들여오기도 한다. 국제여객터미널의 짐 붙이는 곳에 가면 우리 눈에 익숙한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아닌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가 표기된 커다란 박스가 산처럼 쌓인 채 승선을 기다리고 있다. 천진항이 목적지인 김 박스도 있고 단동항이 목적지인 라면 박스도 있다.


배에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고 화장실 안에는 탈수기까지 갖춰져 있다. 속옷을 비롯해 건조를 기다리는 옷가지들이 복도 여기저기에 내 걸려 있다. 열 대여섯 시간에서 스물 네 시간 배 여행을 하면서 빨래를 하는 여행객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이 뱃사람들 것이다. 그들은 승선하자마자 자리를 잡고 제빨리 빨래를 해서 넌다. 일반 관광객들이 티켓에 적힌 자기 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이 사람들은 이미 샤워까지 끝낸 상태다. 마치 집에 돌아온 사람들처럼 배 안에서의 모든 게 아주 익숙하다.


배가 인천항을 떠나고 나면 이들은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정보를 주고 받기도 하고 카드 놀이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배가 중국의 항구에 도착하면 이들은 제일 먼저 하선을 한다. 대개 단체 여행객들이 많아 배에서 내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짐을 붙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퀴도 안 달린 검은색의 커다란 이민 가방을 직접 메고 배에 오른다. 배에 올라 그 자리에서 거래를 하기도 하고 중국의 항구에서 수요자에게 직접 물건을 전달하기도 한다. 배에서 교역이 끝난 사람들은 하선을 하지 않고 그대로 그 배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 온다.


비록 잡아야 할 게 물고기는 아니지만 이 사람들도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와 싸워야 하는 사람들만큼 거칠고 억세 보인다. 배 안에서 서로의 애환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자리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물건 때문에 몸싸움을 하기도 한다.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다가 편을 갈라 다른 사람 험담을 하기도 한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배 위라도 다를 게 없다. 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기에서도 그대로 재연된다.


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배에는 물고기를 잡지 않는 뱃사람이 타고 있다. 배 위에서 바다와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삶과 싸우는 그들은 천상, 뱃사람 아닌 뱃사람이다.  (2004.7~9 학위논문을 위한 북경 필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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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연길행 비행기 하얼빈에 불시착 

중국말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중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선물처럼 생겼다. 여권을 다시 만들고 대사관에 가서 중국 방문 비자를 받으면서 처음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았지만 무사히 인천공항에서 서해를 가로 지르는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상해에서부터 시작해 천진, 북경으로 북상하는 동안 큰 문제는 없었다. 북경에서 마지막 목적지를 향하면서 드디어 문제가 발생했다. 연길로 가야 하는 비행기가 기류 불안정으로 하얼빈에 불시착했다. 출발할 때부터 한 시간 반이나 연착을 한 비행기가 결국 목적지에 도착을 못한 것이다. 비행기 연착은 경험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내심 불안해하고 있는데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려야 하나, 아니면 기내에서 마냥 기다려야 하나. 짐을 챙겨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도 있었지만 마냥 기다려야 했다.


전세계를 웃음으로 강타했던 코믹물인 '미스터 빈' 시리즈를 기내에서 보면서 흥분지수를 낮추고, 낮게 깔리는 등려군이라는 대만 가수의 노래에 다시 한번 흥분상태를 점검하는 동안 무려 네 시간이 흘렀다. 쉴 새 없이 떠들고 쉴 새 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던 승객들도 이제 지쳤는지 기내가 잠잠해질 무렵 드디어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가나보다.

새벽 한 시 연길시 풍경
연길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이미 잠들어 있는 도시는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못하겠는데 우리 팀을 인솔하는 조선족 가이드 아가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좌측으로 보이는 강은 해란강으로 어쩌구 저쩌구. 중간에 쉬지 않고 호텔에 도착해도 새벽 두 시는 좋히 넘을 텐데 프로그램상 준비된 저녁이 있으니 가야 한단다. 우측으로 보이는 큰 대로는 어쩌구 저쩌구. 시야가 캄캄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시커먼 새벽이었다. 예정시간보다 무려 여섯 시간이나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새벽 두 시 반에 한국 방문객들을 위해 준비된 전주비빔밥을 먹고 나서야 호텔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미 시간은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아침 일곱 시 출발이다. 무조건 자 둬야 했다. 이렇게 일이 술술 안 풀리는데 과연 내일 그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일행들은 또 불안해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내일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삼대가 복을 지어야 한다는 얘기도 있고 선한 마음이어야 가능하다는 얘기도 있는데 다 하늘에 맡길 노릇이다.


밤새 불안해 한 것에 비하면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여섯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그 사이 비가 뿌렸다가 해가 다시 나오기를 여러 번. 점퍼를 꺼내 입었다가 다시 벗기를 또 여러 번. 이상한 간판도 보였고 이상한 풍경도 보였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매표소 입구에서 접혔던 뼈들을 풀어주고 있는데 지프차가 도착했다. 여섯 명씩 조를 짜서 승차를 해야 했다. 완전 자동차 랠리다.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들이 눈앞으로 휙휙 지나갔다. 제대로 풍광을 볼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정상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해발 고도 2,700m 지프차 타고 랠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다.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그 백두산에 드디어 도착했다. 구름이 쉴 새 없이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해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 천지를 좀처럼 카메라에 담아내기가 힘들었다. 가이드 아가씨의 형식적인 인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팀 앞에 여섯 팀이 다녀갔는데 이만큼이라도 천지를 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이란다. 해발고도 2,700m가 넘는 정상은 날씨가 불안정해 두툼한 점퍼를 입은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누워보기도 하고 손을 들어 보이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다양한 자세로 사람들은 산을 맞이하기보다 산을 담아 놓기 바빴다. 카메라가 없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천지를 담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푸르다 못해 검기까지 한 천지의 물 빛깔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말이나 글로 눈으로 직접 본 자연의 모습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은 자연보다는 한참 하수인지도 모르겠다.


내려오면서 천지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가는 물줄기에 손을 담가볼 수 있었다. 손을 대자마자 어찌나 차가운지 바로 손가락 마디들이 벌개졌다. 장백 폭포를 보려고 이동한 장소에서는 내려오는 물의 온도가 섭씨 82도나 되어서 그 물에 달걀과 옥수수를 쪄서 파는 상인들도 보였다. 실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겁 없이 손을 담갔더니 이번에도 손가락 마디들이 벌개졌다. 1도 화상이다. 천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손을 댈 수도 없이 차갑고도 뜨거운 물들이 태극처럼 모여 산을 타고 들을 타고 내려와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우리 산하를 적시고 있었다. 문득 이쪽 중국이 아닌 저쪽 북한으로 올라가는 백두산은 어떤지 궁금했다.


우리 나라 관광지라면 어디든지 흔히 볼 수 있는 토종닭집, 보리밥집 같은 음식점들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지어진 러브호텔도 보이지 않았고 현란한 나이트클럽 간판도, 노래방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그랬다. 산에서 나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외부 유출이 금지되어 있었고 자연을 훼손하면 사회주의 국가다운 엄청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방문객들은 오롯이 그 곳에서만 자연을 즐겨야 했다. 하산하면서 들른 식당의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물들은 온통 80도가 넘는 백두산 온천수였다.


다시, 여섯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렸다. 아직은 열 두 시간 정도 고행을 해야 이쪽 중국에서 백두산을 올라갈 수가 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서 이상한 간판도 이상한 풍경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백두산을 저만큼 뒤로 하고 그저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만 가져 올 수밖에 없었다. (2002.7~8 외교통상부 후원 한중수교 10주년 기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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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