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05.03 독일에서 온 카티아 1
  2. 2007.04.15 내몽고행 기차 안에서 2
7개국어 구사하는 독일 소녀 카티아

카티아를 처음 본 사람은 카티아가 스물이란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 번도 몸무게를 물어 본 적은 없었지만 100kg은 충분히 넘을 거구다. 한국에서 온 친구들은 대충 마흔쯤으로 카티아의 나이를 짐작한다. 아, 정말 스물인데. 이름 만큼이나 얼굴이 예쁜 카티아는 독일에서 온 친구다. 수화까지 포함시키면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일곱 개나 된다. 독일어는 모국어니 당연하고 영어, 네덜란드어, 라틴어, 중국어, 어설픈 한국어로 자기 의사 표현을 할 줄 안다.


밖에서 만난 대부분의 외국인 친구들에게서 받은 인상 중에 하나가 모국어는 기본이고 영어를 참 잘 한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 영어 못한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만난 일본 사람들, 정말 영어 잘 한다. 자국말만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 밖에 보지를 못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인들도 프랑스어나 스페인어, 독일어와 같은 인접 국가들의 말을 할 줄 안다. 내가 만난 카티아도 그 중 하나였다.


나 같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간 사람들은 중국의 풍경들이 그렇게 많이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시대를 20년쯤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아주 못 살던 그 때를 떠올리면 된다. 사람들 생긴 모습도 비슷하고 문화가 비슷한 것도 많다. 하지만 카티아한테 중국은 새로운 문화 천지였다. 서로 얘기를 해보면서도 느낀 일이었지만 카티아가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면 그녀가 겪은 문화의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해 볼 수가 있었다. 저런 건 한국에 다 있어, 하고 카메라에 담지 않은 장면들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겨져 있었다.


중국 서민들의 아침 풍경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의 아침 시장. 내가 중국에서 머물렀던 곳의 아침 시장엔 볼거리, 먹을거리가 참 많았다. 조금 더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의 건방진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내 눈을, 내 입을 호들갑스럽게 만들 만한 것들이 정말 많았다. 저런 걸 사용할 수 있을까 싶은 데 그런 것들을 중국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산다. 그것도 깎아 달라고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 다음에 보따리에 집어넣는다. 중국 사람들이 의심 많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지퍼로 크게 주머니를 달아놓은 팬티를 보고 카티아랑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한국 사람들이야 옛날 할머니 쌈지 돈 넣어 놓는 것 보면서 자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게 낯설지 않겠지만 카티아는 볼 때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은 밖에서 식사 해결을 많이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침시장에서 죽이나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밀가루빵 같은 걸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다. 한국 김치를 중국말로 파오차이(泡菜)라고 하는데 중국에도 맛이랑 모양이 다른 김치가 있다. 한국의 김치 같은 이 파오차이를 중국사람들은 죽이랑 같이 먹는다. 가격은 조금씩 다른데 죽은 1원 안팎이고 밀가루빵인 만토(饅頭, 한국에서 말하는 만두와는 맛도 모양도 다르다)는 내가 가는 아침 시장에서 큼직한 것 네 개가 1원이었다.


중국 북부 사람들은 주식이 밀가루라서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대부분 많이 먹는데 아침을 죽이 아닌 면으로 해결하는 사람들도 많다. 가끔 시장에 가서 소고기 라면, 아니 소고기 라미엔(牛肉面, 면을 麵으로 쓰지 않고 面으로 쓴다)을 1원 씩 주고 사 먹기도 했다. 기름이 둥실둥실 뜬 그 라면을 처음엔 어떻게 먹을까 그랬는데 그곳을 떠나오고 제일 먹고 싶었던 음식 중에 하나가 1원 짜리 그 소고기 라면이다. 내가 쏠게, 라면서 눈이 많이 오던 날 카티아랑 같이 가서 먹었던 그 라면이다.


우린 라면을 먹기 전에, 혹은 라면을 먹고 나서 지단삥(鷄蛋餠)을 꼭 사서 먹었다. 그것도 1원이다. 워낙 인기가 많은 음식인지라 지단삥 파는 리어카 앞엔 늘 사람들이 많았다. 기다리기 싫은 날은 라면을 먼저 먹으러 간다. 부부랑 남편 동생이 나와서 같이 지단삥을 만드는데 동생은 안 나타날 때가 많았다. 밀가루 반죽에 계란을 깨트려 그 위에 파를 총총 썰어 부쳐 내는 건데 크기는 한국에서 파는 호떡만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맛이 참 일품이었다. 라면을 먹고 나서 먹어도 좋고 지단삥을 먹고 나서 라면을 먹어도 좋다. 한국에서 모양은 흉내를 내봤는데 맛은 도저히 흉내를 낼 수가 없었다.


공부와 놀이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서양 학생들

중국은 우리보다 더 먼저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금요일 오후부터가 주말이다. 문화가 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애들은 대부분 놀 때 확실하게 놀아준다. 주말에 공부 해야 되니까 조용히 해달라는 동양 애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파티의 종류도 많고 늘 시끄럽다. 그렇게 비교해 보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참 놀 줄을 모른다. 기껏해야 술 마시는 정도지 자유롭게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제대로 놀 줄을 모른다.


주말에 기숙사에서 파티가 없으면 비슷한 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들 나간다. 이 학교 애들이 저 학교를 찾아가기도 하고 저 학교 애들이 이 학교로 찾아오기도 하고, 아니면 자기네들만 잘 가는 그 곳을 찾아 떼지어 나가기도 한다. 카티아는 북경의 동 3환로를 타고가다 보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하드락카페나 북경의 이태원이라 할 수 있는 산리툰에 자주 갔다. 아니면 디스코텍. 술이 취할 때까지 마시는 저들의 문화가 아니라 신나게 춤추고 놀다 지치면 들어온다. 참 잘도 논다. 그리고 공부한다. 참으로, 참으로 부러운 저들 문화였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북경 왕푸징(王府井)에 있는 신동방시장 뒤쪽의 노보텔 근방에 가면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식당이 하나 있다. 가끔 텔레비젼에도 나오는 유명한 곳이다. 당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정보 말고는 채식주의자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채식주의자인 카티아 덕분에 그런 식당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또 가 볼 수 있었다. 당연히 메뉴판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싱겁게도 메뉴판에 나오는 음식들은 모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음식들이었다. 식탁에 올려진 음식들도 모양만은 우리가 아는 음식들과 별 차이점이 없었다. 다만 재료가 다를 뿐이었다. 딱 보면 돼지고기 같은데 먹어보면 버섯이나 두부 등으로 만들어지는 식이다. 맛 보다는 그 색다름이 식욕을 자극했던 것 같다. 1원에 아침을 해결하던 우리는 그 식당에 가면 1인분에 100원을 넘게 지불해야 했다.


큰 아이는 '김치', 작은 아이는 '김'

카티아는 한국 음식을 아주 좋아한다.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만든 사람까지 무안하게 혀를 쑥 내밀며 얼굴을 찡그리는데 된장찌개를 보고 그랬고 김치를 보고 또 그랬다. 먹어보지도 않고 쳐다만 봤으면서. 물론 처음엔. 하지만 한국의 김치는 카티아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밥을 이미 먹었다면서도 김치를 먹고 있으면 또 젓가락을 들고 만다. 큰 수퍼에 가면 조선족들이 공급하는, 한국 김치와는 여러모로 차원이 다른 포장김치를 사다 먹을 수 있는데 맛에 비해 가격이 너무 부담스럽다. 맛은 없지만 그래도 먹어야 하니까 종종 사다 먹곤 했다.


카티아와 한국 식당에 가서 김치를 먹은 적이 있었다. 중국은 한국과 식당 문화가 달라 기본으로 제공하는 반찬이 없고 모두 시켜야 한다. 그건 중국내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죽 한 그릇에 1원 하는데 우린 25원 짜리 김치 한 접시를 시켰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아름다운’ 김치 앞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카티아에게 김치는 ‘기무치’가 아닌 ‘김치’고 한국 사람들이 옛날부터 먹어왔고 지금도 없으면 밥을 못 먹는 한국 음식이다. 바깥에서 만난 일본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김치를 먹지 않지만 한국 사람들은 밥상에 김치가 올라 오지 않으면 밥을 못 먹는 사람들로 카티아에게 인식되었다. 한국에서 공수되어 온 김도 카티아가 젓가락을 다시 들게 만드는 음식이다. 그냥 김도 좋아하지만 김밥을 참 좋아해서 헤어지기 전에 북경의 우다코에 있는 '곰집'이란 식당에 가서 우린 김밥을 먹어야했다. 카티아는 자식을 낳으면 첫째 아이 이름은 ‘김치’로, 둘째 아이 이름은 ‘김’이라고 짓겠단다.


북경에서의 마지막 만찬

헤어지기 전에 카티아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 산리툰에 있는 독일 음식점에 갔었다. 상호가 아마 '케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섯 명이 갔는데 1인분에 7, 80원 하는 음식값을 카티아가 모두 부담했다. 서양 친구들끼리만 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한국 친구들이 포함이 되면 누군가 혼자 식사를 다 부담하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그걸 카티아가 알고 있었다.


나야 사회생활을 하다 중국에 갔기 때문에 자비 유학이었지만, 한국에서 온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학비며 생활비를 매달 부모님으로부터 송금 받는다. 서양 애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중에 하나다. 카티아 같은 친구들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학비도 자기가 벌고 생활비도 물론 자기가 번다. 두 번째 학기 때는 결국 학비가 모자라 중간에 공부를 그만 두어야 했는데 첫 학기 때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 캠코더를 살만큼 여유가 있었다. 눈동자도 머리색깔도 까만 동양애들은 아는 척도 안하고 국적이 어디가 되었든 머리색깔 노랗고 눈 파란 애들만 고용하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일당이 200위엔이었으니까 조건이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저분한 일로 그곳을 그만 둘 때까지 카티아의 주머니가 제법 넉넉했었다.


카티아가 그렇게 번 돈으로 케밥 식당에 가서 독일 음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독일 사람들이 자주 먹는다는 그런 음식들을 먹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린 정말 헤어졌다.


5월의 독일, 오 마이 카티아

상해에 있을 때 메일이 한 통 왔다. 열흘 후가 사촌 동생 생일인데 엽서를 하나 보내달란다. 깜짝 파티를 해 주고 싶으니 사촌동생 이름이랑 Happy Birthday to You! 빼고는 모두 한글로 써서 보내달라는 주문이었다. 카티아의 사촌 동생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정신지체부자유자로 물론 글을 읽을 수도 없다. 그래도 그렇게 해 주고 싶단다. 나중에 사촌 동생과 같은 애들을 가르치는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그랬는데 그 꿈에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보세요.” “나는 카티아예요.” “나는 한국말을 못해요.” 방으로 전화가 오면 한국 사람인 줄 알고 이렇게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바꿔주던 오 마이 카티아! 인도 어딘가에서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메일이 오고 소식이 끊어졌다. 메일 말미에 한국에 꼭 가고 싶은데 여전히 돈이 없다고 썼지만 선뜻 한국에 오라는 소리를 못했다. 5월의 독일과 오 마이 카티아의 안부를 묻는 메일을 띄워야겠다.


(여행시기: 200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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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중국 원조 라면, 란저우(蘭州) 라미엔

인스턴트 라면을 비롯해 우리가 지금 먹는 라면의 원조는 일본이다. 중국의 국수가 마르코 폴로 덕분에 서양으로 건너가 스파게티가 되었고, 그 국수가 한국을 거쳐 일본에 가서는 라면이 되었다. 중국에도 맛이 다른 이 라면이 있다. 우리가 흔히 수퍼에서 사다먹는 라면도 있지만 중국에서 보통 라면(拉面, '라미엔'이라고 읽는다.)이라고 하면 손으로 뽑은 면을 각 종 재료로 끓인 걸 말한다. 소고기가 좀 들어가면 소고기 라면이고 닭고기가 들어가면 닭고기 라면이 되는 것이다. 길게 잡아 늘릴 라(拉, 한국식으로 읽으면 ‘납’), 면자는 우리가 쓰는 글자랑 다른 면(面, '미엔'이라고 읽는다.)이다.

 

이 라면이 제일 맛있는 곳이 란저우(蘭州)라는 곳이다. 베이징에서도 아침 시장에서 소고기 라미엔을 1원씩 주고 먹어 봤지만 란저우 라미엔은 정말 맛있다. 우리도 원조 원조 하는데 중국도 마찬가지다. 라미엔집 상호에 란저우가 들어가 있는 집이 많다. 물론 본고장 란저우에 가면 여기저기 원조 라미엔 천지다.

 

원조 라미엔을 먹고 란저우에서 은추완((銀川, 한글로 은천인데 이름이 참 예쁘지 않은가?)을 지나 내몽고로 향할 때였다. 서른 시간 넘게 타고 다니는 기차 여행에 익숙해지니까 열 대여섯 시간 입석은 이제 할 만하다. 청량리역에서 춘천까지 두 시간 거리, 좌석이 없으면 다음 기차로 미루던 때가 있었는데 나 원 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hoto by Yann Layma

 

은추완에서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으로

은추완에서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까지 9시간인데 발디딜틈 없이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 기대지도 못하고 꼬박 서서 가야할 판이다. 뻔뻔한 사람들은 앉아있는 아가씨 옆으로 가서 자꾸만 자기 엉덩이를 들이밀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는 사람이 없다. 참 이상한 나라다. 나 말고는 주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임어당의 글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그게 다 민족성 때문이란다. 여기저기 관심 많은 사람 치고 잘 된 경우 없고, 그냥 내 일에만 관심 갖고 살면 세상 살기 편해서란다. 

 

새벽 한 시. 낮엔 가끔 사막이라도 볼 수 있었는데, 기암절벽도 볼 수 있었는데, 푸른 초원도 볼 수 있었는데, 깜깜해지니까 창에 어린 나 밖에 볼 수가 없다. 친구도 생각하고 가족도 생각하고 옛날 생각도 하고 앞으로 살 날 생각도 하고 그러면서 달리는 기차에 나를 내버려두고 있었다.


정확한 보통화를 구사하는 아주머니가 나를 자기 옆으로 앉으라고 그런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안돼보였는지 그래도 자꾸만 부른다. 그럴 때 누가 앉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 여섯 시간 만원 기차에서 서서 가다보면 바닥이라도 앉고 싶어진다.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 본 거다. 서서 오는 내내 나를 모른 척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갑자기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정말 갑자기, 느닷없이, 순식간에.


안재욱을 얘기해 줘야 했고 김희선이 진짜 봐도 예쁜지 설명해 줘야 했고 HOT의 멤버를 얘기해 줘야 하는데 난 걔네들 이름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국 사람이면 그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희망을 이어 줘야 했다. 내가 신고 다니는 발목 올라오는 신발을 보고 한국 애들은 다 그런 걸 신느냐 물으면 대답해 줘야 했고(사실 그 신발은 중국에서 산 건데.), 쓰고 있는 모자를 한 번만 써 봐도 되겠냐는 맞은 편 남학생한테 어색해하며 그 모자를 건네줘야 했다. 이게 아닌데 속으로 계속 되뇌어보지만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순간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는.

 

자리를 양보한 아주머니는 금방 일어나셨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입석으로 표를 끊어도 왔다갔다 하는 객차승무원이랑 말이 잘 되면 침대차로도 표를 바꿀 수가 있다는 거다. 은추완에서 베이징을 왔다갔다 하며 장사를 하신다는 그 아주머니는 시골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들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친절하게 순차통역을 해 주셨다. 젊을 때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부럽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여행 조심하라고는 떠나셨다.

 

아직도 중국은 여권 발급이 자유롭지 않고, 또 가려는 나라의 비자 문제가 매끄럽지 않다. 그래서 여권이랑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려는 중국 교포들이 브로커들한테 고액의 돈을 바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차에서 만난 용감한 형제

후허하오트어에는 왜 가냐고 앞에 앉아 있는, 베이징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학생이 자꾸 물어본다. 사막을 보러 간다고. 초원을 보러 간다고. 그런 걸 왜 보러 가냐고 그런다. 그냥.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좀 더 근사한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장학생으로 대학을 간다는 이 시골 청년은 베이징에 대한 환상이 굉장히 컸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기차도 신기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인과 얘기를 해 본다고 그 또한 신기해했다.

 

옆 좌석에는 이미 베이징에서 2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있는 형이 있었는데 전공이 무용이라면서 뜬금없이 한국의 댄스 가수들에 대한 계보를 죽 읊어대는 게 아닌가. 한국에서 불리는 이름이랑 중국에서 그들이 부르는 이름이 한자만 같지 발음이 달라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그 형이란 친구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참고로 안재욱은 중국에서 안자이쉐로 발음을 한다. 어떻게 한국에 살면서 그렇게 유명한 애들을 모를 수가 있느냐는 형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HOT 멤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떼로 나와서 노래하는 팀의 멤버들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 출출하다면서 건네는 컵라면을 그날 나는 먹지 못했다. 한국에서 새벽 네 시에도 먹었던 라면이 도무지 당기지를 않아서였다. 수북이 쌓아놓고 먹으라는 해바라기씨도 먹지 못했다. 원래 호박씨든 해바라기씨든 까먹는 건 감질나서 잘 안 먹는 편인데 새벽, 그 시간에는 더더욱 못 먹는다. 자기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제과점에서 사 온 빵이라면서 건네는 빵도 물론 못 먹었다. 그럼 포도는 어떠냐고 권하는데 그것도 역시 못 먹었다. 그 새벽, 그 기차 안에서 난 그 어떤 호의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참으로 미안하다.

 

원래 용간한 친구들인지 외국인인 나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형제들은 입석표를 가진 나와 다른 여자 승객한테 둘 다 자리를 양보했다. 나야 서 너 시간 후면 내몽고 역에서 내리지만 그들은 베이징까지 아직도 열 시간을 넘게 가야 하는데 말이다.

 

동생은 지금쯤 졸업을 했을 테고 여자친구가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벽 두 시 근방에 내몽고역에서 내리려는 나를 끝까지 배웅하던 친구였다.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무거운 배낭 메는 걸 도와주고 안 먹겠다고 고집피우던 음식들을 따로 비닐에 담아 손에 걸어주면서 문까지 따라와 인사하던 참으로 가슴이 따뜻한 친구들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이 친구들을 나는 그저 용감한 형제로 기억하고 있다. 은추완에서 내몽고로 가는 기차안에서 만난 용감한 형제로.


(여행시기: 2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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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