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 유학와서 좋은 이유가 몇가지 있는데(따져보니 그리 많지는 않다.) 그 중 하나가 음식이다. 한국음식처럼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담백하고 기름지지 않아 내 입에 딱 맞는 것 같다. 스트레스가 있을 때는 이상하게 매운 음식이 땡기는데 그때는 사서 먹으면 된다. 요즘 동네수퍼에 가면 신라면은 물론이고, 김치, 고추장, 쌈장 등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값은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그래도 이런 장류가 갖춰지면 엄마손맛까지는 안되더라도 한국음식 비스무레한걸 만들어낼 수 있다.
도쿄의 신오오쿠보라는 곳에 가면 한국음식점이 즐비하다. 간판만 보면 그 촌스러움과 사정없이 자유로운 맞춤법에 중국 연변시내에 와 있는듯한 착각을 하게 되지만 내가 만들어낼 수 없는 한국음식이 고플때는 거기 가서 먹으면 된다.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신오오쿠보에 가서까지 먹고싶은 한국음식이 지금까지는 없었다. 일본인 친구들의 극성으로 몇번 가봤는데 내 입에는 안 맞는 한국음식들이라 정이 떨어져서 그런지 모르겠다. 파전이라고 정말 파밖에(그것도 듬성듬성) 안넣고 손바닥만하게 부쳐내서는 그걸 500엔씩 판다. 종이컵에 떡볶이를 가득 담아(떡이 몇개나 담기겠나) 파는데 이것도 500엔. 삼계탕이라면서 영계 반마리도 안될 것 같은데다 부위도 어딘지 의심스러운 걸 섞어 파는데, 가격은 1,300엔. 도대체 가격산정하는 기준을 모르겠다. 이런저런 복잡한 이유로 식사는 대부분 기숙사에서 해결한다. 내가 살림이랑 워낙 거리를 두고 살아서인지, 내 엄마는 내가 밥은 제대로 해먹나 늘 걱정하시는데 끼니 안 거르고 잘먹고 잘산다.
외국에 나오면 한국에서는 잘 먹지도 않는 라면까지 보약이 되곤한다. 중국에서 한창 여행다닐 때 배낭 맨 위에는 컵으로 된 신라면 몇개가 항상 신주단지처럼 모셔져 있었다. 지금이야 중국 전역에 신라면이 깔렸지만 내가 여행다닐 때만해도 북경, 상해 등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규모가 큰 수퍼에서도 신라면을 구할 수가 없었다. 중국남쪽을 여행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을 거다. 비가 많이 와서 그날은 아무데도 못 가고 하루종일 비그치기만 기다리며 방에서 바깥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한없이 처량맞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들고다니는 일기장에 몇페이지를 끄적거렸는데도 이 이상한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는 거다. (혼자 이렇게 지내다보면 모국어를 읽고, 쓰는 행위만으로도 향수병이 가시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나는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향수병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결국 아끼던 그 신라면을 꺼냈다. 배낭위에 넣고 다녔는데도 박스가 다 찌그러져 간신히 모양을 만든 후 뜨거운 물을 표시된 점선 위까지 부었다. 그 좁은 박스 안에서 라면이 맛을 내기 위해 스프와 몸을 섞으며 숨가쁘게 요동쳤을 3분 동안의 그 냄새를 난 아직도 기억한다. 비가 그치고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기어나가는데 기분이 어찌나 좋던지...한국 신라면이 보약이라고 느꼈을 때다.
에티오피아에 처음 도착한 후 한달간은 현지인 이외에 한국인을 전혀 만날 수 없었다. 한달만에 만난 태권도 사범이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말에 갑자기 눈물이 쏙 나왔다. 서럽고 슬프고 이런 것과 관련된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 올라왔다. 대사관에서 추석선물로 받았다며 신라면 다섯봉지를 내게 선물로 주는데, 어찌나 울컥하던지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의 슬픈 장면이다. 물론 그 사범 앞에서 질질짜고 그러지는 않았다. 가증스럽게도 겉으로는 쿨한척 뭘 이런 걸, 그랬었다.
내가 머물던 집에서 일하던 아싸데한테 물을 끓이라고 한 후 신라면봉지의 깨알 같은 글들을 읽으며 농심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날 난 일기장에 만일 농심에 문제가 생기면 머리에 띠 두르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힘을 보태리라, 이런 웃긴 글을 적고야 말았다. 물이 끓어 라면을 넣고 있는데 집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내 주위로 모여 요리 이름은 뭐냐, 손으로 이걸 어떻게 먹냐 등 다양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냥 간단하게 코리아 스파게티라고 소개했다. 아하, 그제야 고개를 끄떡인다. 이탈리아 점령기 5년의 영향으로 에티오피아 어디를 가도 식당에는 스파게티가 메뉴에 포함되어 있고, 집집마다 스파게티, 라자냐 정도는 우리가 수제비 끓여먹듯 간단하게 해먹는다. 라면 한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나니 한달간 낯선곳에서 내가 받은 각종 스트레스들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밖에 나오면 라면도 보약이 되는 또 한번의 경험이었다.
*컵라면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얻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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