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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28 절대강자 대한민국 쇼트트랙 4
  2. 2009.09.27 추억의 힘 2
  3. 2009.09.21 짧은 인연-짱구는 못말려 2
  4. 2009.09.18 성공하는 유학생활 2
  5. 2009.09.14 자전거 소회 4
  6. 2009.09.11 한국인의 영문이름
  7. 2009.09.07 신라면 추억 2
  8. 2009.08.28 발효된 의문들 답을 얻다 4
  9. 2009.08.25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6
  10. 2009.08.16 도시락 그리고 반성 4

운동을 직접 하는 것 보다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현장에 가서 직접 보는 것 보다 구석구석 다 보여주는 TV 시청을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해설자가 혀가 짧지 않아야하고, 수다스럽지 않아야하고, 너무 대한민국을 편애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렇다. 집에 스포츠경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아주 어릴 때부터 혼자 보는 거에 익숙한데, 내가 TV를 보다가 박수치며 환호성을 지르면 가족들도 그러려니 그런다. 시차가 다른 나라에서 하는 올림픽대회나 세계선수권대회를 밤늦게 거실에 혼자 앉아 보는 나를 가족들은 좀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내가 그 경기를 보면서 느끼는 희열감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그런 것이다. 

그나마 외국 생활이 오래되면서 이제는 TV로 경기보는 일도 내겐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동영상 사이트들을 통해 볼 수 있지만, 이미 기사를 통해 경기결과를 알아버려 김이 빠진 상황이고, 그것도 유튜브가 아닌 이상 버퍼링 때문에 보는 일이 쉽지가 않다. 축구 국가대표 A매치 경기는 대부분 봐주는 편이었는데 요즘 그런 건 아예 포기했다. 좀 특이한 스포츠 기자가 그림처럼 경기관련 기사를 썼을 경우, 그 기사를 읽으면서 경기내용을 상상하는 것으로 대신할 때가 많다. 베이징 올림픽 때 일본 TV에서 찔끔찔끔 보여주는 한국팀 출전 경기를 볼 때는 아주 속터져 죽는 줄 알았다. 요즘은 꼭 보고 싶은 경기가 동영상으로 올라오면 그때 혼자 스크린 앞에서 경기를 보며 감격하는 일이 많다.

한국 유학생 하나가 왜 북경올림픽에 김연아와 쇼트트랙팀이 안나왔느냐는 생뚱맞은 질문을 해서 웃다가 내가 너무 오래 쇼트트랙에 무심했구나 하면서 동영상을 찾아봤다. 아직 한겨울은 아니지만 2009/2010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이 한창 열리고 있었다. 


안현수가 뛰는 경기를 다시 못봐서 아쉽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들 어찌나 잘하는지 원. 순발력이 좋아서? 라고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쇼트트랙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한국 국가대표 출신 코치가 지도하는 외국 쇼트트랙팀이 일취월장하는 것 보면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비장의 무기가 확실히 있는 것 같다. 쇼트트랙 장거리 계주 경기는 끝날 때까지 순위를 예측하기 힘든데 언제나 한편의 영화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토리노 동계 올림픽 때는 쇼트트랙 계주 경기를 보려고 수업을 빠진 적도 있는데, 고맙게도 우리 선수들은 수업 한 시간 빼먹은 게 아깝지 않을 명장면을 연출해주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쇼트트랙팀 경기 전략은 장거리 육상경기에서 아프리카 선수들이 뛰는 전략과 아주 비슷해 보인다. 계속 뒤따라가다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막판에 발휘, 눈깜짝할 사이 앞의 선수들을 쭈욱- 제치고 결승선에 제일 먼저 도착한다. 얼음판도 제대로 없고 선수 풀 자체가 다를 우리나라 선수들이 캐나다, 미국, 중국 선수들을 따돌리고 우승할 때는 내가 직접 경기를 한 것처럼 기쁘다. 

절대강자 대한민국 쇼트트랙 국개대표팀 출전 경기를 보면서 요즘 내가 시달리고 있는, 이유를 알 수없는 불안함과 우울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대한민국 만세다!! 
    
*사진출처
http://www.kyeongin.com/news/photo/200711/354403_55260_375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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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비자 신청도 끝냈고, 짐도 다 부쳤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야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많이 불안하다. 일본에 올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당최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가서 개고생할 걸 생각하니 두려운 건지 내 마음이 정리가 잘 안된다.

이것저것 사용하던 이메일 주소를 하나로 통일하면서 나한테 한번이라도 메일을 보낸 사람들 중에 연락을 꼭 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어제 메일을 죽 보냈다. 반송된 메일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것밖에 연락처가 없는 사람들은 이제 연락을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어 아쉽다.

의외로 여전히 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 속속 답장들이 도착하는 중인데 사람들 사는 게 참 재미있다. 여자인 친구들은 대개 결혼을 해서 애가 하나 혹은 둘 이상이 되어 물어보지 않아도 아줌마생활에 완전히 적응들을 한 것 같고, 남자인 친구들은 문장에서 아저씨 필이 마구마구 느껴진다. 나처럼 여전히 헤매며 사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대학 때 내 지도교수님은 내게 4년 내내 반말을 하셨었는데 지금은 깍뜻한 존칭어로 반가움을 표시해주셨다. 

10년도 전, 지금처럼 모두가 인터넷이랑 친하기 전에 웹진을 하나 만들다 결국 포기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필진으로 참여했던 분들 중에 쟁쟁한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해서 다들 잘 있는지 궁금하다는 안부 메일을 띄웠는데 이 사람들이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인터넷 카페 비슷한 것을 운영하던 분이 계셨는데 좋은 추억이었다며 개인블로그를 알려주셨다. 여전히 마음이 따뜻한 글들을 업데이트하고 계셨다. 웹진에 문화계 기대주를 인터뷰하는 코너가 있어 첫 인터뷰 대상자로 장진 씨를 선정해 기사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당시 장진씨를 인터뷰했던 친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을 하고 있다. 머리 숱이 적은 장진씨가 사진은 꼭 이것으로 실어달라고 직접 찍은 사진을 여러장 줬었는데 지금은 사진도 인터뷰자료도 남아있지 않다. 내 떠돌이 생활에 최후까지 살아남는 물건들이 뭐가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난 그때 석공예가 곡천 김봉준 선생을 인터뷰했었는데 이분은 몇년전 돌아가셨다. 장지가 강원도 인제라서 친구와 새벽에 거기까지 가면서 곡천 선생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만날 때마다 예술이란 무엇인지, 예술가로 사는 삶이란 무엇인지, 한국의 아름다움, 인생을 즐겁게 사는 법 등을 아주 쉽게 설명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몹시 선명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당시 필진 중에 일본인도 한명 있었는데 다음주에 같이 밥 먹자는 답장이 왔다. 당시에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몰랐는데 10년이란 세월동안 아주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웹진을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나를 도와줬던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다. 우리네 인생이 때론 내가 간절히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다.

세월은 변함없이 흘렀고, 나도 시간을 따라 여기까지 와 버렸다. 내가 잘 왔는지 잘 모르겠고, 지금 잘 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확실히 아는 한가지는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난 여전히 내 미래에 불안해하고 있지만 이렇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덕분에 어제 오늘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칭찬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도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때 만난 그 사람들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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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의 작가 우스이 요시토(臼井儀人)씨가 등산하다 실족사했다는 뉴스를 좀전에 봤다.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었다. 

<짱구는 못말려>를 처음 본 건 한국이 아니라 중국에서였다. 중국 TV 에서도 방영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짱구의 목소리를 연기한 중국의 성우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워 후외이 라일러!!(저 왔어요!!)" 그 만화로 중국어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처음엔 무슨 저런 어이없는 꼬마가 다 있나 그랬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짱구만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성우 목소리가 언어만 다르지 거의 흡사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일본에 와서 다시 짱구를 만났다. 오리지널 짱구 목소리를 비로소 들을 수 있었는데 한국, 중국의 성우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다. 전부 한사람이 연기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아주 비슷하다. 만화를 그다지 좋아하지않아 전부는 못 봤지만, 내 생각에 <짱구는 못말려>는 어른 대상의 만화이지 아이 대상의 만화는 확실히 아닌 것 같다. 짱구가 하는 대화며 행동이 몸만 아이이지 이건 완전히 어른이다. 볼 때는 재미있게 봤지만 짱구 또래의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만화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 작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많이 아쉽다.



한국에서 우스이 요시토 씨를 만난 적이 있었다. 만화페스티벌이었는지, 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우스이 요시토 씨가 행사 참여차 한국에 왔을 때였다. 행사가 끝나고 이외수 선생님 댁으로 자리를 옮겨 담소를 나눴었는데, 그림 이야기가 나왔고, 기념하기 좋아하는 친구들 덕분에 난 우스이 씨가 그 자리에서 그린 춤추는 짱구 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 <아기공룡 둘리>의 김수정 선생님도 오셨었는데, 내게 요리하는 희동이 그림을 즉석에서 그려 주셨다. 두 그림 다 서울집 어딘가에 잘 모셔져 있을 텐데 문득 다시 보고 싶어졌다.

두분 모두 한 나라를 대표하는 만화작가였는데 그 위상의 차이가 엄청나게 커서 좀 놀랐었다. 김수정 선생님은 혼자 그곳에 오셨고, 당시 우스이 요시토 씨는 수행하는 사람만 여덟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판 관계자,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카메라맨, 매니저 등등. 내가 기억하는 우스이씨는 우울증이 있지 않나 싶게 감정의 기복의 커보였는데 그래도 만화작가답게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왜 혼자 등산을 하다 그렇게 생을 마감했는지 의문이고, 이제 다시 그의 작품을 볼 수 없다니 안타깝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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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산책하러 나가다가 기숙사 앞에서 같은 층에 살던 한국인 유학생을 만났다.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왔었는데 모든 과정이 끝나 오늘 한국으로 돌아간단다. 나리타공항까지 같이 갈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잠도 안오고 방에서 할 일이 없어 일찍 나와 그냥 서성거리고 있다가 나를 만난 거였다. 산책은 좀 늦게가지, 하면서 그친구와 두런두런 몇마디 나누었는데, 만날 때마다 늘 느낀 거였지만 참 야무진 학생이다.

유학와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느냐고 물었더니, 후회는 하지말아야지 했는데 후회없으니 그런 것 같다고 당차게 대답하는 게 아닌가. 연구와 별개로 일본에 와서 책읽는 습관이 생겨서 좋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게 되어 그것도 큰 소득이란다. 타인의 취향을 인정한다는 게 쉬운일이 아닌데 이 친구는 1년만에 그걸 터득했단다. 자기가 확실하게 내적으로 성장했음을 느꼈다고 말했을 때, 이 친구가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난 아직도 유학생이지만 외국에 나와 있으면서 그동안 많은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을 만났다. 학위취득 과정이 아닌 유학생들 중에는 외국에 왜 나왔나 싶을만큼 엉망진창으로 생활하는 학생들이 많다. 특히 언어연수생이나 교환유학생들의 경우 현지에 적응하자마자 떠나야하는 경우가 많아 구체적인 계획없이 유학을 왔다가는 시간낭비하기 딱 좋다. 윗층에 사는 일본학생 하나는 꿈이 컸는데 사귀던 외국여학생이 덜컥 임신을 하는 바람에 모두 접고 여학생이 사는 나라에 가서 결혼해 아이 키우면서 영어교사로 살겠단다. 이제 스물이 좀 넘은 여학생은 일본어 공부하러 왔다가 1년동안 일본어도 못 배우고 아이만 하나 얻어 돌아갔다.

중국에서 유학생활 할 때는 나이 먹어서 유학 온 한국 남자들이 술마시고 추태부리는 게  늘 거슬렸는데, 일본에 유학와서는 이제 갓 스물 넘은 학생들이 이 사람 저 사람과 쉽게 동거하며 학업과는 거리가 멀게 생활하는 게 내 눈에 많이 거슬린다. 외국인과 사귀는게 무슨 훈장인지 묻지도 않았는데 제 남자친구가 외국인이거든요, 하면서 얘기를 꺼내는 한국인 여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며칠전 우리학교 유학생과의 과장님이 식사초대를 해서 만난 적이 있는데, 과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유학까지 와서 공부보다 아르바이트에 더 치중하는 학생들도 많고, 내가 유학을 왜 왔는지 방황하다 자살을 하거나 본국으로 그냥 돌아가는 학생들이 최근에 늘고 있단다. 유학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학생들도 불쌍하지만, 자기관리 못하면서 문란하게 생활하는 애들 만나면 진짜 욕나온다. 

모든 유학생들이 오늘 아침에 만난 한국인 학생처럼 성실하게 유학생활을 한다면 유학은 장려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전히 쟤는 왜 일본까지 와서 지 부모망신, 나라망신을 시키나 싶은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띈다. 이것도 타인의 취향이니 인정해줘야 하는 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 친구의 앞날에 다시한번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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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일본에 와서 첫 한달간은 자전거 없이 지냈었다. 통학을 전철로 했었고, 왠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던 습관이 있어 먼 줄도 모르고 처음에는 대개 걸어 다녔다. 그러다 게스트하우스에 사는 조선족 아가씨한테 자전거를 한대 얻었다. 산악자전거를 사게 되면서 필요가 없어졌단다. 내가 보기에 너무 멀쩡해서 덜컥 받은 후 거의 2년을 타고 다녔다.

그 사이 새것이나 다름없는 자전거가 두대나 생겼지만 전부 옆방의 김상한테 줘 버렸다. 늘 내 자전거를 빌려타는 통에 귀찮아서 내가 타던 헌 자전거가 아니라 새 자전거를 선물로 줬는데 한달도 안되어 잃어버렸단다. 그리고 몇개월간 내 자전거를 다시 빌려 탔었는데 또 한대의 자전거가 내게 생겼다. 이번에도 헌 게 아닌 새 것을 줬는데 그만 또 잃어버렸단다. 

자전거 세울 수 있는 곳이 아니면 가끔 날을 잡아 수거를 해가는데 아마 부주의하게 자전거를 세워놓는 바람에 그런 일이 생긴게 아닌가 싶다. 내 친구는 걔 혹시 중국인이냐고 물어보면서 아마 다른데다 팔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랬지만 난 김상을 믿기로 했다. 그러나 개인의 부주의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는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을 난 신뢰하지 않는다.

Autumn Cycle
Autumn Cycle by moriza 저작자 표시


올초 공부 끝나고 돌아가는 한국유학생이 자전거를 두대나 선물로 줬다. 일본에 와서 다섯번째 자전거 선물이다. 다들 팔고 일본을 떠난다는데 그런 자전거들이 전부 나한테 돌아왔다. 이 두대의 자전거는 기어도 있고, 산지 얼마 안된 자전거라 내겐 거의 벤츠급이었다. 같은 층의 한국 학생이 돈 아낀다고 학교를 걸어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한대를 냉큼 줘버렸다. 나보다 과정 일찍 끝나면 팔지말고 다시 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헌 자전거를 옆방 김상에게 인도하고 요즘은 그 벤츠를 타고 다닌다.

김상에게 세번째로 자전거를 주면서 그 얘기를 넌지시 했다. 잃어버리지 마라. 누가 그러더라. 너 혹시 자전거 파는 거 아니냐고. 내 자전거 세우는 곳에 아직도 있는 것 보면 이번엔 안 잃어버리고 잘 타고 다니는 것 같다. 내 벤츠와 한국학생이 타던 벤츠는 내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다들 몇대씩 잃어버리는 자전거를 지금까지 난 한번도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사고는 몇번이나 경험했고, 수술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그나마도 없어 부러워하는 자전거전용도로가 이곳에 마련되어 있지만 좁은 편이라 역주행하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위험하기 짝이 없고, 자전거전용도로와 자동차용도로 사이의 둔턱이 높아 비가 오는 날은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오늘 학교에 가다가 자전거를 타기 일보직전의 할아버지 한 분을 보게 되었다. 신호가 급하게 바뀌는 바람에 졸지에 할아버지 꽁무니에서 자전거를 멈추게 되었다. 할어버지는 자전거전용도로에서 자전거를 끌고 도로로 이동하신 상태라 할아버지가 출발하시면 곧 출발해야지, 하고 대기중이었는데 그냥 계속 멈춰서 계시는 거였다. 그 할아버지는 전방의 신호등을 보시고, 앞뒤를 또 몇 번이나 보시고, 크게 숨도 몇번 고르시고, 그러고 나서 안장에 앉아 페달을 밟으시는 것이었다. 일본의 어른신들을 만나면 한국의 어르신들이 자주 떠오르는데 지혜롭고 매사 조심스러워하시는 게 서로 꼭 닮았다. 

할아버지가 출발하신 후 뒤따라 나도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할아버지처럼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면 사고 날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더불어 했다. 내 경우 쌍방과실이었지만 좀더 여유롭게 출발하고, 저 할아버지처럼 앞뒤를 몇번이나 살피는 조심스러움이 있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었다. 사고 나면? 나만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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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그동안 외국을 많이 다녔고, 한곳에 몇년씩 살기도 했지만 영문이름으로 골치 아파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대개 다녔던 나라가 영어권 국가가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영문이름 때문에 신경쓸 일이 드디어 생겨버렸다. 그리고 그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동안 여권에 있는 그대로 Yun, Oh Soon 이렇게 영문이름을 표기하곤 했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써도 알아서 Ohsoon Yun 혹은 Ohsoon YUN으로 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러려니 했지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졸업장에도 영문이름이 들어갈 텐데 확인해보니 학교마다 다 다르다. 당연히 학교에서 발행해주는 증명서에도 내 영문이름은 제각각이다. Yun Oh Soon, Yun Oh-soon, Oh-Soon, Yun, Oh-soon, Yun, Oh-Soon, YUN, OHSOON YUN 등등. 내가 착각한 건지, 행정업무를 보던 사람이 실수했는지 잘 모르겠다. 신용카드를 보니 거기도 영문이름이 제각각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영어권 국가로 유학준비를 하면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처음 깨달았다. 내 이름을 보고는 다들 성은 Yun으로 중간이름은 Oh로 그리고 내 진짜 이름은 Soon으로 인식을 해버린다. 온라인 신청서에 서류를 작성하는데 이름에 스페이스가 있으면 아예 입력이 안되고 어떤 사이트는 중간이름 마지막이름으로 지가 알아서 분류가 되기도 했다. 이거 안되겠다 싶었다. 여권을 새로 신청하면서 영문이름을 정정했다. Ohsoon Yun으로 이름 사이의 공백을 아예 없애버렸다.

얼마전에 영문으로 작성된 몇가지 서류가 필요해 한국 집에 부탁을 했다. 혹시 몰라 서류를 보내기 전에 스캔해서 메일로 먼저 보내라고 했다. 과연, 영문 이름이 Oh-soon Yun으로 되어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다시 여권 복사본을 확인한 후 그것과 똑같이 변경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기관에 가서 발행을 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외국인들의 눈에 Ohsoon Yun과 Oh-soon Yun은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제 서류를 받았다. 서류는 확실하게 이름이 바뀌어서 왔는데 딸려 온 카드에 내 이름이 버젓이 OH SOON YUN으로 되어 있었다. 같은 기관인데 담당자의 영문이름 짓는 기준이 다르다보니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 것 같다.

한국은 이름의 로마자 표기부터 들쭉날쭉인데, 우리집의 경우 나는 YUN이라고 쓰는데 가족 중에 몇명은 YOON을 본인들의 영문 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이런 경우가 없는데 유독 한국사람
들 이름을 영어로 표기할 때 문제가 생긴다. 정해진 기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은 대개 넉자의 한자를 이름으로 사용하는데 일본어일 경우 앞의 두자가 성이고, 뒤의 두자가 이름이다. 영어로 이름을 표기할 때는 뒤의 두자가 앞으로, 앞의 두자가 뒤로 그 순서를 바꾸어 표기한다. 메이지유신부터 마련된 이 규칙은 외국 미디어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어 이름 때문에 사람들을 혼동에 빠뜨리지 않는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미디어에서도 그 이름의 순서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게 과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는데 이름표기에 관해서만큼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반 혹은 기문을 이름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을 기문이나 문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고. 이 분은 외교관 생활도 오래하셨고 외국생활 경험이 많으신데, 왜 처음부터 본인의 이름에 대한 기준을 홍보담당자들한테 얘기해주지 않았나 싶고, 기준을 이야기했는데 안지켜지고 있는 거라면 왜 정정하지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한국과 관련된 사건이 났을 때 영자신문을 보면 가관이다. 이름 표기가 전부 제각각이다. 국제경기에 참가하는 스포츠 선수들 이름도 예외는 아니다.

대한민국은 본인이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영어로 그 사람 이름를 쓸 수 없는 사회다. 왜 이렇게 이름표기가 자유로워졌는지 모르겠지만 민족성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비겁한 이유이고, 하루 빨리 정책결정자가 질서를 잡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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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6) 2009.08.25
Posted by 윤오순
일본으로 유학와서 좋은 이유가 몇가지 있는데(따져보니 그리 많지는 않다.) 그 중 하나가 음식이다. 한국음식처럼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담백하고 기름지지 않아 내 입에 딱 맞는 것 같다. 스트레스가 있을 때는 이상하게 매운 음식이 땡기는데 그때는 사서 먹으면 된다. 요즘 동네수퍼에 가면 신라면은 물론이고, 김치, 고추장, 쌈장 등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값은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그래도 이런 장류가 갖춰지면 엄마손맛까지는 안되더라도 한국음식 비스무레한걸 만들어낼 수 있다. 

도쿄의 신오오쿠보라는 곳에 가면 한국음식점이 즐비하다. 간판만 보면 그 촌스러움과 사정없이 자유로운 맞춤법에 중국 연변시내에 와 있는듯한 착각을 하게 되지만 내가 만들어낼 수 없는 한국음식이 고플때는 거기 가서 먹으면 된다.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신오오쿠보에 가서까지 먹고싶은 한국음식이 지금까지는 없었다. 일본인 친구들의 극성으로 몇번 가봤는데 내 입에는 안 맞는 한국음식들이라 정이 떨어져서 그런지 모르겠다. 파전이라고 정말 파밖에(그것도 듬성듬성) 안넣고 손바닥만하게 부쳐내서는 그걸 500엔씩 판다. 종이컵에 떡볶이를 가득 담아(떡이 몇개나 담기겠나) 파는데 이것도 500엔. 삼계탕이라면서 영계 반마리도 안될 것 같은데다 부위도 어딘지 의심스러운 걸 섞어 파는데, 가격은 1,300엔. 도대체 가격산정하는 기준을 모르겠다. 이런저런 복잡한 이유로 식사는 대부분 기숙사에서 해결한다. 내가 살림이랑 워낙 거리를 두고 살아서인지, 내 엄마는 내가 밥은 제대로 해먹나 늘 걱정하시는데 끼니 안 거르고 잘먹고 잘산다.

외국에 나오면 한국에서는 잘 먹지도 않는 라면까지 보약이 되곤한다. 중국에서 한창 여행다닐 때 배낭 맨 위에는 컵으로 된 신라면 몇개가 항상 신주단지처럼 모셔져 있었다. 지금이야 중국 전역에 신라면이 깔렸지만 내가 여행다닐 때만해도 북경, 상해 등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규모가 큰 수퍼에서도 신라면을 구할 수가 없었다. 중국남쪽을 여행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을 거다. 비가 많이 와서 그날은 아무데도 못 가고 하루종일 비그치기만 기다리며 방에서 바깥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한없이 처량맞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들고다니는 일기장에 몇페이지를 끄적거렸는데도 이 이상한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는 거다. (혼자 이렇게 지내다보면 모국어를 읽고, 쓰는 행위만으로도 향수병이 가시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나는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향수병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결국 아끼던 그 신라면을 꺼냈다. 배낭위에 넣고 다녔는데도 박스가 다 찌그러져 간신히 모양을 만든 후 뜨거운 물을 표시된 점선 위까지 부었다. 그 좁은 박스 안에서 라면이 맛을 내기 위해 스프와 몸을 섞으며 숨가쁘게 요동쳤을 3분 동안의 그 냄새를 난 아직도 기억한다. 비가 그치고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기어나가는데 기분이 어찌나 좋던지...한국 신라면이 보약이라고 느꼈을 때다. 

에티오피아에 처음 도착한 후 한달간은 현지인 이외에 한국인을 전혀 만날 수 없었다. 한달만에 만난 태권도 사범이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말에 갑자기 눈물이 쏙 나왔다. 서럽고 슬프고 이런 것과 관련된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 올라왔다. 대사관에서 추석선물로 받았다며 신라면 다섯봉지를 내게 선물로 주는데, 어찌나 울컥하던지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의 슬픈 장면이다. 물론 그 사범 앞에서 질질짜고 그러지는 않았다. 가증스럽게도 겉으로는 쿨한척 뭘 이런 걸, 그랬었다.

내가 머물던 집에서 일하던 아싸데한테 물을 끓이라고 한 후 신라면봉지의 깨알 같은 글들을 읽으며 농심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날 난 일기장에 만일 농심에 문제가 생기면 머리에 띠 두르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힘을 보태리라, 이런 웃긴 글을 적고야 말았다. 물이 끓어 라면을 넣고 있는데 집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내 주위로 모여 요리 이름은 뭐냐, 손으로 이걸 어떻게 먹냐 등 다양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냥 간단하게 코리아 스파게티라고 소개했다. 아하, 그제야 고개를 끄떡인다. 이탈리아 점령기 5년의 영향으로 에티오피아 어디를 가도 식당에는 스파게티가 메뉴에 포함되어 있고, 집집마다 스파게티, 라자냐 정도는 우리가 수제비 끓여먹듯 간단하게 해먹는다. 라면 한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나니 한달간 낯선곳에서 내가 받은 각종 스트레스들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밖에 나오면 라면도 보약이 되는 또 한번의 경험이었다.

*컵라면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얻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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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1. 닛산 MARCH 오렌지색

한국에서도 박사과정 학생들의 생활은 유학생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단조롭고 때론 심심해보이기까지 하다. 사실 마음은 한없이 조금하고 여유가 없지만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 좀 꿈지럭거리다 밥먹고 학교가서 또 꿈지럭거리다 때되면 또 밥먹고 또 꿈지럭거리다 해 떨어지면 집에 온다.
날마다 주말이라서 토요일 일요일이 특별하지도 않다. 이런 생활에 변화라면 내 경우 집근처 숲길 산책이나 시립도서관에 다녀오는 일이다. 읽을만한 책 수는 학교 도서관과 비교할 수 없지만 영상물 대출도 해주고, 없는 책들은 주문하면 며칠 후에 받아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교도서관보다 가깝다.

기숙사에서 도서관으로 향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기숙사 정문에서 출발해 직진 우회전 다시 직진하는 방법, 우회전하다 한없이 직진하는 방법, 수도 없이 우회전 마지막으로 직진하는 방법 등이다. 이 중에서 직진 우회전 다시 직진하는 방법으로 갈 경우 우회전하기 직전에 이 문제의 차를 만날 수 있다. 닛산 MARCH 오렌지색 소형차이다.

내가 지금 기숙사에 온지 올해 3년째인데 이 차는 한번도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 말이다. 주차장이라지만 천장이 없고 쇠줄 하나로 경계를 표시한 정도인데 내가 그 앞을 지날 때 그 차는 늘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사쿠라가 필 때도 장대비가 쏟아질 때도 찬바람 불고 다시 눈이 내리던 그 때도 오렌지색 그 차는 거기에 있었다.

차는 항상 세차되어 있었고 내가 차의 안위를 걱정할만큼 요지부동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떤 날은 꿈을 꾼 적도 있다. 이 차가 몇년째 탈출을 시도했는데 그러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을 한 후 도로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꿈이었다. 도로 한가운데 이 차가 움직이고 다른 큰 차들이 보디가드처럼 따라가는 걸 보고 안심하며 잠을 깼는데, 싱거우면서 내 스스로 어이가 없어 그날 하루종일 실실 웃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그 집 앞에 가서 그 차가 여전히 그곳에 있음을 확인하고 돌아온 적도 있다.

지난 주말에 드디어 이 차의 운전자를 만났다. 운전이 가능할까 싶은 할머니가 운전대에 앉아 계셨다. 옆자리에는 애완견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반가워 손을 흔들었는데 할머니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셨다. 3년째 궁금했던 의문이 그렇게 풀렸다. 좀 아쉽다.




2. 쓰레기통 옆의 물병 두개

기숙사 방에서 나가 엘레베이터로 가는 좌측에는 분리수거함과 함께 몇개의 쓰레기통이 항상 도열해 있다. 빈깡통만 넣는 통, 빈유리병만 넣는 통, PET병만 넣는 통, 그리고 불에 타는 것, 안타는 것을 나누어 담는 통. 외국학생들이 통 표면의 글자를 못 읽을까봐 친절하게 그림도 그려 붙여놨다. 근데 그뿐이다. 시청에서 지적도 받았다고 하고,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더 이상 8층의 쓰레기는 수거해가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는데도 소용이 없다.

나도 왜 다들 분리수거에 동참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8층 쓰레기통에 까마귀떼들이 시도때도없이 방문하면서 일이 좀 커졌다. 비닐봉지에 닥치는대로 담은 쓰레기를 제대로 통에 넣지 않아 이 까마귀들이 와서 성찬을 즐기다 돌아가면 쓰레기통 주변이 완전 난지도로 바뀌는 것이다.
관리실에서 경고차원으로 사진을 찍어서 붙이고 이틀전부터는 불투명 쓰레기통이 투명 쓰레기통으로 바뀌어 놓여져 있다. 남의 나라에 와서 뭘 열심히 배우겠다는 사람들일 텐데, 쓰레기통 앞에 섰을 때, 공동부엌 개수대 앞에 섰을 때 8층 거주자들의 개념없음에 확 밀려오는 짜증을 주체하기 힘들다.

이 쓰레기통 옆에 내가 이사올 때부터 1.5리터 짜리 PET병 두개가 항상 물이 가득 담긴 채 놓여 있었다. 내가 궁금해 몇번 자리를 옮겨 봤는데 다음날 보면 역시나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병 표면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지만 물은 누가 갈아 주는지 늘 깨끗해 보였다.
화재예방차원으로 세워 놓기에는 물의 양이 적어 보였고, 누가 저걸 늘 같은 자리에 가져다 놓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니 확실히 물이었다. 그 중의 한 병의 물을 따라 버리고 병을 PET병 수거함에 버린 적이 있는데 그 다음날 보면 또 그 자리에 물이 담겨 놓여 있었다.

참으로 의문이로고. 닛산 오렌지색 경차만큼 내겐 미스테리였는데 오늘 아침 드디어 그 의문이 풀렸다. 이런.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쓰레기통에서 쓰레기들을 꺼내 옮긴 후 손을 닦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아, 쪽팔려. 허무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그게 그건가.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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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생일을 잊고산지 오래지만 그래도 매년 생일을 기념해 새로운 것 한가지씩 시도하려 노력한다. 기념이라고 뭐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고, 헌혈을 한다거나, 장기기증서약을 하거나(다 기증했기 때문에 몸관리를 잘 해야한다),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사거나, 여행을 다녀오거나,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서 참배를 하거나 평소에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던 일을 그날 해보는 것이다. 살다보니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도 뭔가 기념해주는 습관이 중요하면서 꼭 필요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개 내가 먼저 내 생일을 기억하기보다, 전화가 오거나 축하메일을 보고 아, 생일이군, 그럴 때가 많다. 부모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하니 꼭 기억해야 하는데 사실 그게 잘 안된다. 

올해는 친구의 권유로 트위터(http://twitter.com/puandma)를 시작했다. 온라인커뮤니티 활동에 거부감이 있어, 계속 미뤘었는데 그날 생일기념으로 첫 메시지를 남겼다. 내용은 몹시 시시한 거였는데 트위터 이용자들 대부분이 다들 나 같은 전철을 밟는 것 같다. 아는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외수 선생님(http://twitter.com/oisoo)도 거기 계셨다. 냅다 친구들을 팔로잉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에 메시지 남기는 것만으로는 심심해 이외수 선생님 트위터 메시지를 친구와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다. 처음은 취미였는데 이제는 미루면 아주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하루에 한두개 올라올 줄 알았던 선생님의 메시지가 하루에 열개씩도 올라오니 번역하는 일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번역된 메시지는 트위터와 다른 별도의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트위터는 140자 이내에서 생각을 표현해야하는데 영어로 외수샘의 메시지와 같은(그건 사실 불가능하고, 비슷한...) 의미를 표현하려면 140자로는 부족해서 만능재주꾼인 친구 어랍쇼((http://twitter.com/arapshow)가 찾아낸 사이트(http://oisoo.tumblr.com/)이다.

각설하고, 
오늘 메시지 번역하는 데 이런 게 있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을 믿지 말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에 수없는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이외수

Never believe the lyrics that say, "you were born to be loved". You are born not to be loved but to give love. If you don't realize this, you will feel betrayed many times by the lyrics: "you were born to be loved".   - 번역: 윤오순 / Hasan Hujairi


메시지 의미보다 갑자기 저 노래에 관한 추억이 떠올랐다.

2003년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아이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양평에 가서 공연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공연이야기는 이 블로그에도 소개한 적이 있다(http://www.puandma.com/25). 첫날 리허설을 마치고 연주자들을 숙소에 다 데려다 준 후 전화를 받았다. 이외수 선생님과 내 친구들이 근처의 한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거길 찾아갔다. 당시 선생님은 지금의 화천이 아닌 춘천에 사셨는데, 춘천에서 양평까지 한시간 거리라지만 직접 오실 줄 몰랐고, 친구들과 함께 그런 자리가 마련되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소설가 박민규씨도 그 자리에 수줍게 앉아 있었는데 등단한 후였는지, 그 전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친구 하나가 이미 결혼한 박민규씨한테 몹시도 들이댔었는데 다른 남자와 결혼해 곧 애기엄마가 된단다. 노래를 시켜서 빼다 결국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을 중국어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나를 위해 저 노래를 불러줬다.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기타도 누가 쳤던 것 같은데 그건 기억이 안난다. 선생님이었나? 아니면 철가방프로젝트 멤버였던가? 이외수 선생님의 코러스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봄봄 봄봄~~~". 늦은 시간까지 함께해준 친구들의 좋은 기운 덕분에 그 다음날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그후 또 한번 저 노래를 기억할 일이 있었다.

2006년 일본 간사이에 있던 시절 일본인 집에 초대를 받아 하룻밤을 묵었던 적이 있다. 그 다음날이 일요일이었는데 가족들이 일본에서는 드물게 기독교인들이라 교회에 함께 가게 되었다. 난 종교는 없지만 일본의 교회가 궁금하기도 해서 선뜻 따라나섰다. 교회는 우리나라 개척교회처럼 아주 작은 규모였다. 교회에서 만난 일본인들에게 수천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한국에 많다고 했더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단다. 사실 나도 믿기가 힘든데 직접 보지못한 그 사람들이야 오죽하려고... 미국의 한 교회에서 온 목사가 이날 영어설교를 하는데 축하노래로 준비된 게 일본어 버전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호스트 패밀리 아주머니가 이 노래 한국어버전도 있지 않느냐며, 오늘 예배에 한국인이 참여했는데 오리지널 한국어버전으로 이 노래를 들어보자는 게 아닌가. 나 그날 진짜 당황했었다. 다들 박수를 치는데 도망갈 구멍이 없었고, 난 신들린 부흥회의 목사같은 포즈로 막상 마이크는 잡았지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저 노래를 간신히 불러야했다. 한국노래가 반주로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노래방도 싫어하는데 남들 강요에 의해 무대에 올라 불러야했던 노래가 하필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오늘 아침 트위터 메시지 번역하면서 인터넷에서 다시 저 노래가사를 찾아 읽어봤다. 지금 난 양평의 그날 그 카페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날 그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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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요게 뭐냐고? 종이손수건이라고 해야하나? 내가 일본에서 오카아상(일본어로 엄마)이라 부르는 기노시타 씨와 여행을 가면 항상 나오는 셋트메뉴이다. 이렇게 이쁜 걸 깔고 도시락을 먹는다. 기분이 좋아지지않느냐며 그래야 한단다. 2007년 5월에 처음 만나 올해로 3년째인데 그분 덕분에 일본문화도 많이 알게 되었고, 일본에 대한 좋은 이미지도 많이 얻게 되었다. 여행 갈 때마다 환상적인 도시락이 준비되어 여행목적지보다 이제는 도시락을 더 많이 기다리게 된다.


이 날은 주먹밥 세개와 과일, 기타 등등이 준비되었다. 가뜩이나 밥을 늦게 먹는데 종류도 많고 양도 많으니 이날 남들 다 먹고 일어설 때 난 그제야 주먹밥 하나를 끝내고 있었다. 


사실 맜있었는데 사진은 그리 먹음직스럽게 나오지 않았다. 옆방의 중국인 친구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 친구 도시락도 같은 내용으로 준비해주셨다. 고맙고 미안하고 그랬다.

내게 정성스런 도시락을 싸준 분은 기노시타 씨가 처음은 아니었다. 대학다닐 때 같은 과의 희영이란 친구와 친했었는데 반년인가 1년간 희영이 어머니의 도시락을 먹은 적이 있다. 쿠키 굽는 호일 9개에 반찬이 나누어 담기고 맨 위에는 항상 생선구이가 올려져 있었다. 10가지 반찬이 딸린 똑같은 두 개의 도시락이 학교에 나가는 날엔 희영이 손에 들려왔다. 반찬은 늘 똑같지 않았고 달랐었던 것 같다. 도시락 뚜껑을 열 때마다 이거 먹고 진짜 공부 열심히 해야지 그랬었는데 도시락이 배달되던 그 시절 내 학과 성적은 그리 좋았던 것 같지 않다. 학교 선생님이시라 시간이 넉넉하지도 않으셨을 텐데... 다시 생각해도 참 고마운 분이다. 희영이도 고맙고, 희영이 어머니도 고맙고. 

스치기만 하면 좋은 인연이 생기는 통에 정말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하는데 난 여전히 내 삶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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