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24: 한국'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11.07.13 신간소식 <공부유랑> 7
  2. 2010.07.24 승가원 태호와의 재회 4
  3. 2010.02.03 이남이 아저씨 5
  4. 2009.08.19 서울방문-손선생님 9
  5. 2007.11.09 다시 인연(3) 4
  6. 2007.04.15 TV리뷰-태호의 도전
채널24: 한국/사람들2011. 7. 13. 16:30

다들 책 나오기 전에 저자가 직접 이런 일을 하는 것 같아 저도 '제 논에 물대는 심정'으로 이런 글 올려 봅니다.

작년 봄 한 출판사에서 여러나라 유학한 경험을 책으로 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연락을 해와서 계약을 했고, 그렇게 쓴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져 다음 주 초에 나온다고 합니다. 제목은 <공부유랑>. 느낌이 좀 오나요?  가격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방문객이 별로 없는 블로그 운영자인데 책을 내자고 해서 처음에 좀 쑥쓰러웠습니다.

표지시안을 보내준다고 해서 옵션이 많은 줄 알았는데 달랑 요거 하나 와서 아무래도 이걸로 결정이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에티오피아에 있다보니 교정작업도 그렇고 사진 보내주는 것도 그렇고 마음처럼 열심히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문맥이 이상한 부분도 있을 수 있고, 오탈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다 제 불찰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고, 수정사항이 있으면 이 게시판에 올려주세요. 출판사에서 추후에 혹시 책을 더 찍을 계획이 있을 때 반영하라고 하겠습니다.

담담하게 써내려가서 책이 재미있을지 모르겠지만 돈주고 사기에 아깝다, 이런 말만 안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외수샘이 추천사도 아주 쎄게 써주셨는데 이거 사기다, 그러면 정말 쪽팔리는 일이죠. 제 얼굴 나온 사진은 절대 책에 싣지 말라고 출판사에 신신당부했는데 애정이 듬뿍 담긴 외수샘 추천사 덕분에 띠지의 저 사진은 그대로 나갈 것 같습니다. 얼굴 크기가 선생님 1.5배쯤 되는 것 같아 망설였는데 이제 배는 떠나가서 할 수 없네요.

인터넷도 안되는 카파로 내려가면 한국 소식 자주 듣기 어려우니 이 블로그에 독후감 차곡차곡 올려주세요. 감동이 철철 넘치는 후기는 아주 쎄게 선물 쏘겠습니다. 물론 제가 못하니 출판사에 그렇게 하라고 내려가기 전에 부탁 넣어두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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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채널24: 한국/사람들2010. 7. 24. 20:19
2005년 한 TV프로그램에서 태호를 처음 만났다. 양팔이 없어 몸을 이리저리 굴려 이동하면서도 아이가 어찌나 씩씩하던지,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던 기억이 난다. 이 블로그에도 그때 감상기가 있다.(http://puandma.com/27)

어제 방송에서 태호를 다시 만났다. 당시 열살까지 살기 힘들다고 했었는데 태호는 어느새 열한살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장애인 학교가 아니라 일반인 학교였다.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라고 하도 자주 말해서 방송이 끝난 후에도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었는데 다시 만난 태호는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씩씩했다. 아빠가 되고 싶다던 꿈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열한살이 된 태호는 그림을 제법 잘 그렸고, 노래를 아주 좋아했다. 뭐든지 혼자하려했고,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마치 삶의 의무인 것처럼 살고 있었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에너지가 나올까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생각했다. 태호는 많은 사람의 도움없이 살 수 없는 운명이지만 독립심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 같이 입양되었던 성일이라는 아이가 있었다는데 난 기억도 못했다. 태호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다음주 같은 시간에 2부가 방송된다고 한다. 태호를 처음 봤을때 "10년, 아니 20년, 30년이 지난 후 태호의 모습을 꼭 다시 보고 싶다. 건강하게 잘 살아라, 태호야!!!" 그랬었는데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도 태호는 어제의 당찬 그 모습일 것 같다. 아니,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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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다. 폐암이었단다. 사람좋은 웃음으로 늘 반겨주셨는데 이제 한국에 가도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많이 슬프다. 남이 아저씨는 이외수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알게되었다. 석공예가 곡천 김봉준 선생과 함께 이외수샘의 의형제셨는데 두분이 모두 돌아가셔서 외수샘이 많이 쓸쓸하실 것 같다. 가까이 있었으면 훌쩍 다녀왔을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곡천 선생님 돌아가실 때는 그래도 한국에 있어 장지인 인제에 다녀왔었다. 공연을 하나 끝내고 직원들과 지방여행을 다녀오던 날이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고 한밤중에 부랴부랴 인제에 갔던 생각이 난다.

2000년대 초반인가 그 전이었던가 정확한 해는 기억이 안난다. 어쨌거나 두분이 살아 계실 때다. 춘천의 외수샘댁에 갔다가 나오면서 서울로 바로 안 올라오고 곡천 선생님이랑 남이 아저씨랑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새벽 대여섯시쯤이었을 거다. 두분이 춘천에서 제일 맛있는 순대국밥집에 데려가주셨는데 아, 정말 맛있었다. 지금 혼자 찾아가라면 못 찾을 것 같은데 춘천시장통에 있었고, 순대랑 기타등등을 산만큼 주는 그런 곳이었다. 울아빠가 대전의 중앙시장통에서 사주신 순대국밥과 함께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순대국밥이었다. 
 
사실 밥만 먹고 서울로 갈 생각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 남이 아저씨 차를 타고 주원이란 친구와 인제의 곡천 선생님 작업실에 가게 되었다. 한계령인지 고개를 하나 넘었던 것 같고, 차를 한잔 마셨는지 그냥 바람을 쏘였는지 차에서 내려 그 고개에서 포즈를 취하며 같이 사진도 찍은 것 같은데 그 사진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남이 아저씨는 그때도 줄담배셨다. 어떻게 찍어도 다 폼이 나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걱정아닌 걱정에 두분이 행복해하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은데 당시 졸려서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가 기억을 못하는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인제의 깔딱고개라는 데를 지나자마자 바로 작업장이었다. 선생님 작품에 비해 전시실이며 작업장이 많이 허름해서 좀 놀랐다. 전시실 옆에 화살 과녘처럼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나무판이 있어 무슨 용도냐고 여쭈었더니 곡천 선생님 왈.
처음 이사와서 군인애들이 자꾸 기웃기웃 하잖아.
외수형처럼 젓가락 던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지.
그랬더니 지금은 나를 보면 다들 인사를 하고 지나가.
곡천 선생님은 실내에서 치마를 입고 계셨다. 이게 엄청 편해, 이러시면서...

작업장을 구경하고 그새 허기가 져 뭐 먹을 게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라면 다 끓었다고 안에서 두분이 부르신다. 등산용 취사도구도 아니고 완전 애들 소꿉장난하는 그릇들에 라면이 분배되었고 우린 애들 소꿉장난하는 기분으로 그것들을 해치웠다. 얻어 먹었으니 설겆이는 제가 할게요, 했더니 일없단다. 두분이 아주 익숙한 솜씨로 플라스틱 그릇들을 휴지로 쓱쓱 닦으시더니 설겆이 끄읕-,이란다. 내가 지리산에 갔을 때 하던 설겆이 방식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또 거기에 뭐 담아 먹어요, 그랬더니 두분이 동시에 그럼, 그러셔서 한참을 웃던 기억이 난다. 두분이 그렇게 지내셨나 보다.

방바닥이 뜨끈해지자 졸음이 쏟아졌다. 그리고 한숨이 아니라 두숨 정도 잔 것 같다. 외수샘 댁에서 날 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한 통에 잠이 한참이나 부족한 터였다. 깨어나니 먹을 치고 계셨는데 곡천 선생님 혼자였는지 남이 아저씨도 같이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곡천 선생님은 먹을 치시다 틀리면 그냥 버리시지않고 꼭 재활용을 하신다. 써야할 글자가 빠지면 v 표시를 한다음 거기에 빠진 글자를 집어 넣거나 획이 마음에 안들면 그 위에 덧칠을 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도 내가 한 거니까 괜찮아, 그러시면서....내가 중국에서 유학할 때 붓으로 쓰신 편지를 보내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도 역시나 빠진 글자는 v 표시 위해 적으셨던 것 같다. 그날 곡천 선생님 뒤를 이어 진달래석으로 도장파는 일을 하는 따님 일터에도 갔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남이 아저씨는 농담을 좋아하시고, 곡천 선생님은 장난을 좋아하셔서 같이 있는 내내 계속 웃어야했다. 그때의 남이 아저씨는 울고 싶어라, 노래할 때의 가수 이남이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의 곡천 선생님도 내 기억에 '돌'을 쪼다 'ㄹ'을 깨버렸다는 석공예가 김봉준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 외수샘 만났을 때 술이 거나해지시면 네가 예술을 알아, 예술이 뭐냐,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셔서 늘 긴장을 했었다. 물론 답변도 외수샘이 하시니 그냥 앉아 있으면 되는 건데 이 질문이 나오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사실 내 생각을 조리있게 말하면 되는데 예술이 뭐냐, 이러시면 예술이 뭐지, 이런 생각과 함께 머릿속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내 기억에 세분 모두 예술지상주의자들이신데 곡천 선생님은 예술이 무엇인지 가장 명쾌하게 정의하고 또 몸소 보여주신 분이셨다. 그리고 외수샘은 이십대 때부터 내가 그쪽에 관심가지고 계속 살아 올 수 있도록 나침반이 되어주셨다. 남이 아저씨는 두분의 진지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날 대해주셨고, 내가 하는 일에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아저씨의 백만불짜리 웃음 때문인지, 소탈한 성격 때문인지 나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유독 남이 아저씨만 이남이 선생님이 아니라 그냥 아저씨로 부른다. 

인제에 간 건 확실하게 기억나는데 그날 깔딱고개를 넘어 서울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잘 모르겠다. 담배를 쉬지않고 피우시던 남이 아저씨가 결국 폐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저씨랑 즐거웠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담배를 한손에 들고 언제나 씩 웃어주셨던 남이 아저씨도 그립고,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도 그립고, 그 공간도 그리운 날이다. 같이 찍은 사진은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남이 아저씨가 그려주신, 중광스님을 닮은 달마가 서울 집에 잘 모셔져 있다. 장지는 못갔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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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채널24: 한국/사람들2009. 8. 19. 07:07
일본에 있으니 한국에 자주오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마음은 수백번이라도 다녀오고 싶은데 그게 참 맘처럼 안된다. 비행기값 생각하면 오늘이라도 훌쩍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가려면 '마음'을 비롯해 준비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돌아오고 나면 또 그리움에 한동안 시달려야하기도 하고. 오랜 객지생활에도 그것만은 쉽게 바뀌지가 않는다. 내가 사람이란 증거인가. 고민하다가 결국 올 여름방학에도 내가 사는 기숙사 8층을 혼자 지키고 있다.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박사과정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큰맘 먹고 한국에 다녀왔다. 다녀와서 거의 3개월을 거지처럼 지내야했다. 한국에 가면 서점에 가서 읽고 싶었던 책도 많이 읽고, 또 많이 사오고 싶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남한산성이랑 경주에 다녀오고 싶었는데 그것도 못했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부지런히 친구들 만나느라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목표한 많은 것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그리 나쁜 여행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늘 바쁘신 손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다닐 때 문화정책을 강의하셨던 선생님이시다. 선생님한테 딱 한학기, 그 한과목을 배웠는데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선생님 말고도 소중한 인연을 많이 만들어주셨고, 마음이 따뜻한 분이시라 선생님이랑 같이 있으면 참 편하다. 2007년 여름에 도쿄에도 잠깐 오셨는데 다녀가신 증거를 확실하게 남겨주신 덕분에 선생님 만나고 난 후 한동안이 아주 즐거웠다. 

하시는 일이 많아 오래 시간 내기 힘드시다고 하셔서 이번에도 잠깐 만났다. 버스노선이 바뀐데다 만날 장소 건물이 개축을 하는 바람에 5분이나 지각을 했다. 그날 식당가를 몇바퀴나 돌았지만 자리가 없어 결국 카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선생님은 영국에서 유학을 하셨는데, 가난한 유학생 심정을 너무나 잘아신다. 오늘 사진 정리하다가 문득 그날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와 포스팅한다.

이름은 기억안나는데 요즘 젊은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 메뉴란다. 음료도 따라나온다 해서 이걸 둘이 하나씩 시켰다. 선생님은 한국에 오면 정말 맛있는 거 사주고 싶었는데 이런 흔한 거 사줘 계속 미안하다 그러셨다. 그러나 나한테는 굉장히 색다르고 맛있는 거였다. 메뉴판에 있는 사진만 보고 덜컥 시켰는데 막상 나온 걸 보고 도대체 어떻게 먹어야 폼이 나나 잠깐 생각했던 것 같다. 나, 정말 문명과 너무 동떨어지게, 게다가 그렇게 너무 오래 살았나보다.

그런데 이렇게 먹는 거였다. 좀 폼난다.

그리고 이게 이 요리의 최후의 모습이란다. 먹는 건 자유지만 대부분 예쁜 여자들은 이렇게 마무리를 한다고 선생님은 강조하셨다. 요렇게 먹고 차를 한잔 마시고 일어나면 되는 거였다.

이건 수년간 일품요리에 길들여진 가난한 유학생이 잠깐 휴식을 취할 때 찍은 사진이다. 물론 난 남김없이 다 먹어줬다. 

일본에 돌아온 후 만들어보려고 한번 시도했었는데 결국 실패했다. 다음에 한국에 나가면 저기가서 한번 더 먹어줘야 겠다. 그날 당부말씀도 많았고, 위로말씀도 많았는데 사진보니 잠시 그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한국에서 다른 사진은 거의 안찍고 내가 먹은 음식들 사진만 잔뜩 찍어왔는데 이게 나를 추억으로 데려다줄 줄 그때는 몰랐다. 손선생님은 여전히 건강하신지 궁금하다. 당장 메일이라도 날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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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채널24: 한국/사람들2007. 11. 9. 12:35
자전거 패달을 힘껏 밟아 학교에 도착했는데 외국인 선생이 감기 때문에 학교에 못나와 휴강한다는 메시지가 교실문 앞에 붙어 있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데 꼭 해야 할 일을 몸이 아파 못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이제 몸 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지에 시간이 떠 버려서 그 기념으로 포스팅한다. 어제에 이어 내가 만난 아름다운(내 맘이다.) 인연 3탄이다.

일본국제교류기금 초청으로 2005년 10월부터 2006년 5월까지 간사이에서 체류하면서 일본 축제 공부를 아주 실컷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이었다. 3개월 후인 8월에는 에티오피아에 갈 계획이라 이 기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하던 참에 화천 나라축제조직위 기획팀장인 어랍쇼라는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사람이 많으니 특별히 할 일은 없지만 알바거리는 있단다. 그렇게 해서 강원도 화천에 가게 됐다.

정말 특별히 할 일은 없었지만 아주 바빴고 그 와중에 내가 꼭 해야하고 나밖에 못하는 일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았다. 화천 사람들은 어랍쇼를 비롯해 마치 동화 속에 있는 사람들 같은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 어디에도 없고 화천에만 있는 그런 사람들 덕분에 나의 3개월은 참으로 유익했고 또 행복했다.

화천에 갈 때까지만 해도 내가 여관살이를 그렇게 오래할 줄 몰랐다. 콘서트를 할 때는 유명 아티스트들과 함께 가기 때문에 지역에서 제일 좋은 호텔에서 머물렀는데 화천엔 호텔 자체가 없었다. 장급 여관이라고 강조를 했지만 나한테 여관은 참으로 낯선 곳이었다. 군장병들이 군민 수보다 많은 화천이라는데 여관을 드나드는 군인아저씨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어쨌거나 알바생 주제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그냥 조직위에서 정해주는 <용화장>이라는 여관에 짐을 풀었다. 조직위에서도 나 같은 사람을 채용해 쓰는 게 처음이라 처우를 어떻게 해 줘야 할 지 모르겠다면서 나한테 물을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여관 독방도 과분했던 것 같다.

그냥 배낭여행을 하는 중에 잠시 들른 곳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면서 여관살이가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장님(주인 아주머니)이 어찌나 친절하신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세탁물이 싹 개어져 방 앞에 놓여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꼭 먹어보라고 방문을 두드리셨다. 여관의 벽 때문에 인터넷 사용하는데 무려 한달이 걸렸고 내가 지내던 방이 좀 습한 것 말고는 여관에서 석달을 보내는 데 큰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일이 잘 끝나서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화천 군수님이 밥을 사신다고 하셨는데 그냥 순대국밥 한 그릇으로 떼우게 되었고, 그러고나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릴 생각이었는데 그날 하필 춘천으로 나들이를 가셨단다. 졸지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핸드폰으로 대신하고 쓰던 짐들은 알아서 처분해 주세요, 하고 화천을 떠났다.

조직위 장석범 본부장님이 겨울에 또 올거지, 이 말씀을 안 하셨으면 다시 화천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에티오피아에 있으면서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 결국 작년 겨울에 다시 화천으로 향했다. 여름의 쪽배축제보다 규모가 훨씬 큰 대한민국 제1의 겨울축제인 산천어축제를 홍보하는 일이 내가 할 일이었다. 조직위가 아닌 화천군에서 지난 여름에 불편하셨던 것 같은데 이번 겨울에는 다른 곳에서 묵는 게 어떠냐고 의향을 물어와 춥지만 않으면 그냥 <용화장>에서 묵을 거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하고 동서울에서 버스를 탔다.

화천에 가던 날 눈이 살짝 내렸던 것도 같고 아무튼 그날 몹시 추웠다. 조직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용화장>으로 귀가를 했다. 아주머니가 어찌나 반가워 하시던지 그 겨울에 대한 예감이 아주 좋았다. 여름에 책상이 없어서 밥상을 하나 사서 노트북을 올려놓고 사용했는데 그걸 박스에서 꺼내 주시면서 다시 오실 것 같아 보관해 두고 있었다, 고 하셔서 감동을 흠뻑 먹었다. 또 내가 쓰던 샴푸며 비누며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것도 그대로 주시는 게 아닌가. 감동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아침 8시만 되면 전화를 해서 얼른 와서 한술 뜨고 가쇼, 이 말씀을 하고는 대답도 안 듣고 끊으시는 통에 일주일을 버티다 여관집 안방에 들어가 아침까지 얻어 먹게 되었다. 내 밥그릇의 밥은 늘 막내 아들 밥보다 양이 많았는데 바깥 밥은 기름기를 걷어내서 영양가가 없으니 밖에서는 무조건 많이 먹어둬야 하니까 사양하지 말라시며 늘 산처럼 밥을 퍼 주셨다. 밥그릇에 밥이 거의 비워질 때쯤이면 아주머니는 옆에서 요쿠르트랑 이런저런 과일을 섞은 야채주스를 만드신다. 내가 밥상에 숟가락을 딱 놓으면 주스 한잔에 알로에 정제된 걸 더도 덜도 아닌 딱 여섯 알을 세어서 주셨다. 그리고 출근을 했다.

시골에서 고생한다고 친구들이 자원방래 할 때가 몇 번 있었는데 여관에서의 아침 식사는 친구들에게도 제공이 되었다. 이 친구들 왈, 여관에서 아침까지 얻어 먹을 줄 몰랐다면서 넌 어딜 가도 너한테 맞춰서 생활을 하는구나, 이러는 게 아닌가. 봉황이었던 사람들을 닭으로 만드는 건 많이 봤는데 넌 여관도 호텔로 만드는구나, 라고 덧붙이면서...

날씨가 많이 춥지 않아 축제가 잘 될 지 걱정을 했는데 산천어축제는 올해도 방문객 100만이란 숫자를 아주 가볍게 넘겼고 전세계 수십여개의 미디어에 화천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홍보하면서 한국의 재미있는 겨울 축제로 대서특필 되었다. 축제 일도 재미있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 화천에서의 겨울나기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용화장 사장님을 다시 만나 따뜻한 인간미를 체험할 수 있어 참으로 좋았다. 서울로 돌아와 감사하다는 기념으로 뭔가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칼날 튼튼한 믹서기를 하나 사서 택배로 보내드렸다. 다시 올거지유, 하셨는데 그냥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화천 갈 일을 못 만들었고 여전히 난 일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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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채널24: 한국/사람들2007. 4. 15. 13:59

MBC 시사매거진2580 2005. 8.7 일요일 오후 10:40~
[2580이 전하는 세상이야기]-태호의 도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팔도 없고 양발가락도 네 개씩 8개뿐인 태호를 보고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양 팔이 없는 태호는 몸을 데굴데굴 굴려 이동한다. 살아 남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살아 남았고, 앉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TV 속의 태호는 앉아 있었다. 이제 다들 이 꼬마가 설 수도 있을 거란 욕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수영으로 재활치료를 돕는 선생님은 태호가 수영선수가 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갖고 있었다.

어린 태호는 조그만한 발가락에 숟가락을 끼워 밥을 퍼 올리면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부했고 어설픈 양치질을 보고 도와주려고 해도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의지가 태호를 살아남게, 그리고 앉아있을 수 있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처음 시설에 왔을 때 팔도 없고, 발가락 수도 맞지 않는 태호는 얇은 거즈 수건에 덮힐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당시 고등학생인 미혼모에게 태호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태호는 구개열 수술 덕분에 말도 곧잘 하게 되었고 노래를 해서 용돈을 받아 내기도 하는 등 주변을 즐겁게 하는 재주도 가지고 있었다. 원장 스님은 가끔 힘든 일에 봉착했을 때 태호를 떠올린다고 한다. 앞으로 태호가 살아가면서 맞이할 난관에 비하면 이런 일은 사치에 불과하다고. 태호와 결연 가정을 맺고 있는 사람들도 태호 덕분에 가정에 활력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태호한테는 그런 힘이 느껴졌다.

태호는 다른 사람과 뭐가 달라요, 라고 PD가 물었더니 "저는 팔이 없어요, 발가락이 네 개예요´라고 씩씩하게 말한다. 어른들도 인정하기 힘든 ´다름´을 태호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팔이 없어 불편하지 않아요" 했더니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했더니 "예!!!"라고 다시 한번 씩씩하게 대답했다.

태호의 꿈은 아빠가 되는 거다. 아빠가 되어 넥타이를 메고 운전을 하고 싶단다. 일반인들에게는 소박한 꿈이지만 태호에게는 어쩌면 쉽지 않은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TV를 보며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저 놈은 꼭 성공할 거라고. 어른들한테 느낄 수 없는 강한 삶의 의지같은 게 엿보였다.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라고 씩씩하게 말하던 태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10년, 아니 20년, 30년이 지난 후 태호의 모습을 꼭 다시 보고 싶다. 건강하게 잘 살아라, 태호야!!!

태호가 사는 중증장애아동 요양시설 상락원 홈페이지
http://www.srw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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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