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그대로였다. 가족들의 사랑도 여전했고, 친구들도 변함이 없었다. 그들이 수다스러워진 건지, 내 감각이 떨어진 건지 언제 대화에 끼어들어야 할지 망설여야했던 것 말고는. 눈이 오던 날 화천에 가서 축제조직위 사람들도 만나고 만능엔터테이너로 완전 떠버린 이외수샘도 만나 내 사는 세상과 완전 다른 이야기를 하며 추억에 젖어보기도 했다. 고향이 이래서 필요한가 보다.
피지에서 온 디팔과 바레인에서 온 핫산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엊그제 일본을 떠났다. 떠나기 전날 기노시타상 집에 모여 날을 새며 놀았다. 정말 가족처럼 우리를 대해주셨는데 많이 아쉬워하시는 것 같아 저녁만 먹을 게 아니라 그냥 자고 가자고 합의를 봤다. 기노시타상은 부엌 옆의 기둥에 우리를 다 세워놓고 키를 재시면서 다음엔 더 커서 돌아오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20년간 자원봉사활동을 하셨으니 그동안 인연을 맺은 유학생들이 많으셨을 텐데 기둥에는 가족들 키를 잰 표시 이외에는 없었다. 그만큼 우리한테 애틋하셨던 것 같다. 새벽 3시까지 끊임없이 먹을 것을 내놓으며 잠들지 못하는 기노시타상을 뒤로 하고 우린 화투 삼매경에 빠졌다. 이번에 한국에서 화투를 가져왔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 몰랐다. 화투장을 날리며 4장씩 12개 그룹을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두번 만에 짝을 다 찾는 바람에 같이 게임을 하는데 무리는 없었다. 내가 룰이라고 말해주면 무조건 트릭을 쓴다며 야유를 보냈지만 즐거웠다. 비풍초, 이런 거 설명하는 게 어려웠지만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디팔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고 핫산은 날마다 행복하다는 연락이 왔다.
오후 2시부터 입학식이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데 가야하는 지 고민이다. 졸업식도 안갔으니 가줘야 할 것 같은데. 내 인생에 또 박사공부를 할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어쨌든 문방구에 가서 새학기 기념으로 펜이나 노트라도 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