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로 떠날 때 돌아오면 다시 기숙사 사감자리를 얻을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신은 내편이었다. 두달 넘게 남의 집 살이를 하다가 드디어 새 기숙사에 입주했다. 자질구레하게 할 일들이 있지만 당근, 공짜 기숙사다. 이런 것도 협찬인생이라고 해야하나. 정북향에 햇살 한줄기 안 들어오지만 스튜디오 타입이라 생활하기 편하고 경치가 아주 죽인다. 게다가 난방이 잘되어 좋다. 여름엔 좀 더울려나? 여기서 졸업할 때까지 살 계획이다.

독립영화 <레인보우>에 보면 시나리오 작가인 주인공 여자가 PD앞에서 자기를 '고기주의'라고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워낙 붉은 고기를 좋아해 나도 나를 고기주의자라고 그러곤 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내심 반가웠다. 고기를 잘, 맛있게 먹는 것까지는 좋은데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분노가 폭발할 때는 원인을 고기로 돌릴 때가 많다. 아, 내가 고기를 너무 먹었구나. 그 생각하다보면 분노의 이유를 까먹을 때도 있다.

저녁 7시에 약속이 있었다. 전에 사감일 할 때는 고참이 없고 바로 담당 직원으로 연결이 되었는데 이사 오던 날 완장 찬 애가 하나 등장하더니 자기를 내 고참이라고 소개한다. 새로 왔으니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오늘 꼭 7시에 만자나고 그랬다. 아주 응급한 상황이니 자기방으로 오라고 해서 갔던 날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대뜸 그 얘기였다. 7시에 보자는. 참 뜬금없는 완장이구나, 그랬지. 나한테 괜찮은 시간을 묻더니 다이어리도 아니고 너덜한 수첩쪼가리에 대충 시간을 적는 걸 보고 일어섰다. 방을 나오면서 앞으로 부딛힐 일 많을 것 같은데 저 완장 믿어도 될까 싶었다.

저녁 7시하고도 30분이 지났는데 이 인간이 안 나타나서 어떻게 된 거냐고 전화를 했더니 지금 저녁 먹고 있으니 조금 늦게 보잔다. 아니 그럴려면 늦는다고 전화를 하던지. 시에스타가 있는 나라에서 온 인간이라 시간개념이 없나? 아님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지난 수요일에도 약속을 해놓고 연락없이 나를 포함한 일행들을 바람맞힌 전적이 있는 인간이었다. 내가 곧 손님이 올 거라서 더 이상 시간 내기 힘들다고 했더니 손님이 가고 나서 보자고 그런다. 오리엔테이션이 그렇게 급한 일이면 저녁 먹기 전에 와야지. 안된다고 했더니 내일 보잔다. 그게 그렇게 급한 일이 아니었나 보다. 

전화를 끊고나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글을 쓰면서 조금 전의 분노가 조금은 다스려진 느낌인데, 오늘의 분노는 확실히 고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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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