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설

 
엄청나게 눈이 오는 바람에 기숙사에서 연구실 가는 길이 참 멀었지. 폭설로 한국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보낸 우편물을 몇개 잃어버렸고, EMS로 보낸 우편물을 보름이나 지나서 찾았다. 그것도 전혀 엉뚱한 건물에 내 우편물이 도착해 있었다. 눈 그거 좀 왔다고 시스템이 완전 맛간 나라라는 이미지가 저절로 생겼다. 그리고 인풀루엔자로 한달 넘게 고생하면서 면역력 증대와 마누라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2. 망중한

 
에티오피아에 가야해서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다. 주사도 맞아야했고, 자료도 챙겨야했고, 만날 사람들한테 미리미리 연락도 해두어야했고, 이삿짐도 챙겨야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연구실에서 걸어서 40분쯤 걸리는 키(Quay)라는 곳에 가서 혼자 크림티를 마셨다. 아무것도 안해도 집으로 돌아갈 때쯤 숙제를 끝낸 기분이 들었다.

3. 영국동물원


내가 받는 장학금 조건에는 1년에 44시간 의무적으로 티칭을 하라는 게 포함되는데 가끔 공짜 같은 수업이 있다. 동물원에 간다든지 하는 야외수업이다. 교수님 따라 동물원에 가서 애들이랑 사진에 있는 쟤처럼 지칠 때까지 놀았다. 많이 답답했는데 동물원 야외수업으로 기분전환이 되었다.


4. 굿바이, 103호


15개월을 살던 기숙사였는데 에티오피아로 가면서 이별을 고했다. 겨울에 좀 추웠지만 남향에다 조용해서 참 좋아 했었다. 부엌이 넓었고, 햇살이 아주 깊숙히 들어왔었다. 

 
5. 다시 에티오피아, 그리고 커피


지금은 내가 에티오피아에 갔었나 싶은데 6개월간 오로지 커피와 함께 한 시간들이었다. 재미도 있었고, 의미도 있었지만 솔직히 힘들었다. 당분간은 에티오피아 갈 이유를 안 만들 것 같다. 

 6. 충전용 배터리

 
가끔 만나는 이런 꼬마들이 방전된 내 배터리를 콱콱 채워줬다. 가방을 잡아 당기며 돈을 달라는 아이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래도 나를 즐겁게 해주는 꼬마들을 에티오피아 여기저기에서 많이 만났다.

7. <공부유랑> 출간
 

 
에티오피아 가기 전에 자신이 없어 출판사에 접자고 연락을 했었는데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안 우여곡절 끝에 책이 출간되었다. 외수샘의 추천사에도 불구하고 판매는 거의 안되는 것 같지만 가족들이 내 사는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고, 친구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많이 받아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8. 카파에서

 
아라비카 커피의 발상지인 카파(Kaffa)에서 커피와 함께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카파 아이들과 지도만들기 수업도 하고 (기사참조: http://www.artezine.kr/foreign/view.jsp?articleIdx=1512), 카파 사람들과 다양한 커피투어리즘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9. 카파버전 새마을 운동 

 
카파 사람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한국의 새마을운동본부에도 연락해보고, 에티오피아에 나와 있는 NGO단체에도 연락해보고,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도 연락해 봤는데 여력이 없다거나, 계획이 없다거나, 관심이 없다거나 해서 내 방식으로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전파하기로 했다. 에티오피아에 진출해있는 한국의 건설회사인 경남기업에서 일하시는 안성필 상무님을 초청해 그분이 어떻게 그 시대(1960년대, 70년대)를 겪었는지 생생하게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약 200명 정도의 공무원과 NGO단체, 종교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했고, 약 2시간 동안 영어와 암하릭, 카피초(카피노노) 3개국어로 진행되었다.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 "나는 하루에 16시간 일했고, 1년에 360일을 일했지만 회사에 인센티브를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 세대의 희생으로 다음 세대가 가난을 겪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도 느끼는 게 많았던 강연이었다.  

 
10. 영국여행


영국에 돌아와서는 방을 못 구해 남의 집살이를 약 2개월 했다. 마음을 못 붙인 데다 날씨가 좋은 바람에 그동안 가고 싶었지만 못 갔던 곳들을 여행했다. 여왕님이 사시는 윈저성에도 다녀오고, 코벤트리의 자동차박물관에도 가보고, 셰익스피어의 생가가 있는 곳도 다녀왔다. 한풀이하듯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보면 들어가서 이것저것 시켜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옥스포드에 갔을 때는 고풍스런 학교 건물보다는 영국에서 제일 처음 오픈했다는 커피하우스를 보고 감동하면서 아, 나한테도 직업병이 생겼구나, 싶었다.
 
11. 잡스를 애도하며



잡스가 창조해내는 획기적인 애플상품을 더 즐겨야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잡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아이패드 2를 질렀다. 자서전은 아직 못 읽고 있는데 짬짬이 읽어야지.

12. 새 보금자리


두달간의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새보금자리로 이사했다. 북향이라 햇살 한줄기 안 들어오지만 창으로 이런 낙락장송을 늘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가 된 기분이다. 조도가 일정해 공부하기 딱 좋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북향집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같은 과의 동기가 이사하기 싫어서 계속 한집에만 산다고 했는데 올해 내 이사만 두번을 도와주면서 이사하던 날 아주 녹초가 되었다. 그날 미안하다, 고맙다를 수도없이 말했는데 그 뒤로 미안해서 아직 아무 연락을 못하고 있다. 그 집에 아직 내 짐이 몇개 있어 연락을 하긴 해야 하는데... 또 다른 여자 동기가 자기도 그랬는데 기다리면 물김치 싸가지고 맡긴 짐 들고 찾아올 테니 기다리라고 해서 그냥 기다리는 중이다. 내가 1월에 감기로 고생할 때 와이프한테 육개장을 부탁해 만들어온 친구다. 내년엔 협찬인생 벗어날 수 있으려나...

올해 물심양면 도와주신 많은 분들 이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뜻깊고 보람찬 2012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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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