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어느 금요일 오후. 방문을 열자마자 메모가 눈에 띈다. 1층의 파키스탄 M이 원래 오늘 퇴실을 해야하는데 갑자기 런던에 가게 되었고, 일요일에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담당하는 학생도 아닌데 이걸 왜 나한테 남겨놨지 싶어서 담당 사감한테 연락을 했더니 난리가 났다. 학생이 떠나야 하는 날 떠나지 않으면 여러가지 복잡한 일들이 생긴다. 새 입주자가 당일 오는 경우도 있고, 당일이 아니더라도 청소업체에 용역을 의뢰했다면 퇴실한 방 청소를 위해 온 여러명의 청소부가 허탕을 쳐야한다. 일단 난 내 할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안심을 했는데 복도에서 파키스탄 M 친구를 만났다. 혹시 파키스탄 M이랑 연락이 되면 지금 난리가 났으니 빨리 와서 퇴실 준비를 하라는 연락을 부탁했다. 


파키스탄 M이며 복도에서 만난 파키스탄 M 친구, 그외 두명은 벌점이 누락되어 갑자기 기숙사를 떠나게 된 학생들이었다. 사감들은 일주일에 하루 저녁 기숙사를 떠날 수 있는데 영국인이 아닌 이상 대개는 그런 날도 기숙사에 머물기 마련이다. 나도 데이오프인 날은 방문에 방해하지 말라는 메모를 붙여놓고 사감 일에서 잠시 벗어난다. 복도에서 만난 파키스탄 M 친구는 내 담당이었는데 내가 데이오프였던 날 이 친구를 주축으로 애들이 공용부엌에 모여 요란한 파티를 하다 걸렸다. 새벽 3시쯤이었는데 도저히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다른 사감 둘에게 연락을 해서 정리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밖을 내다보며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지 보는데 애들이 담배들을 꼬나물고 아주 신이 났다. 이런 날은 쉬어야하지 않나, 이거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하면서 결국 옷을 챙겨입고 한층 아래에 있는 공용부엌을 가봤다. 이미 다른 두명의 사감이 애들을 잡고 있었다. 스피커를 쾅쾅 울리면서 음악을 틀어놓고, 카드 게임을 하다 걸린거다. 이 기숙사는 11시가 넘었는데 파티를 하거나, 떠들거나 하면 그냥 바로 보고가 되는 시스템인데 누적되면 강제퇴실을 당한다. 게다가 그날 화재경보기를 비닐로 막아놓고 담배를 폈다고 했으니 단순한 벌점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영국은 화재경보기로 장난을 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상황파악을 하고, 어떤 규정을 어겼는지 설명한 후 난 그 자리를 떠났다. 내 담당구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다른 두 사감이 오늘 저녁은 커버를 해야해서 사무실에 보고하는 일도 두 친구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며칠 후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애들은 전부 강제퇴실 조치가 내려졌다고 들었다. 바로 그날 파키스탄 M이 나를 찾아와 자기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담배를 피지 않았으니 선처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사실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온 이 악동들은 기숙사에서도 아주 악명이 높은 트러블메이커들이었는데 난 잘 몰랐다. 보고는 내가 안해서 잘 모르지만 알았다고 한 후 내 최고상관에게 선처를 바라는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창쪽에 앉은 학생은 원래 담배를 안피우는 학생이라고 들었고, 파키스탄 M이 그 창쪽에 앉아있었다면 그는 담배를 안피웠을 거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상관에게 쓴 내 충정어린 메일은 전혀 약발이 듣지 않았고, 결국 파키스탄 M 일당은 일주일 후에 방을 나가야 했는데 그게 그날 금요일이었나보다. 애들이 잘못해서 내려진 조처라서 내가 미안해할 일은 없었지만 그렇게 공부중간에 떠나는 게 맘에 걸려 어떻게라도 도와주고 싶어 결국 일요일 오후에 떠날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해줬다.


일요일 오후 세탁방에 갔다 오다가 그 애들 일당을 다시 만났다. 빨래를 하러 가는지 양손에 이불이며 옷가지들이 잔뜩이었다. 시간상 파키스탄 M은 벌써 떠나야했는데 그 자리에 있어 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사정이 있겠지, 하며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하이' 했는데, 이 인간들이 단체로 얼굴을 싹 돌리며 그냥 지나가는 거다. 배신감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아, 저런 싸가지를 위해 장문의 메일을 쓰고, 전화를 몇통씩이나 하고, 건물 1층에서 3층을 몇번이나 왔다갔다했다니 참 나 원.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비애로 몹시 씁쓸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아침 일찍 문을 따달라는 학생이 있어 갔다가 오는데 파키스탄 M과 다른 학생 둘을 또 만났다.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나는 그를 알아봤고,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놈이 먼저 고개를 돌리고는 그냥 쓰윽 내 옆을 지나갔다.


파키스탄 M은 키도 크고 연예인처럼 아주 잘생겼다. 나한테 선처를 부탁하러 왔을 때도 비굴하다싶을만큼 공손했고, 퇴실을 못하게 되었다고 남긴 메모의 내용도 굉장히 공손한 영어였다. 그런데 사실은 시궁창이었던 것이다. 새벽에 떠들면서 담배 한번 핀 걸로 단번에 학생을 퇴실시키다니, 하면서 사무실의 강력한 조치에 좀 놀랐는데 스모킹으로 누적된 보고가 그 이전에도 다섯번이나 더 있었단다. 나를 완전 속인 거였다. 상관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메일에 별다른 답변을 안 했던 거였다. 그날 그자리에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담배를 폈고, 전부 체인스모커였단다.


난 어떤 학생들에게는 친절하고, 어떤 학생들에게는 엄하게 하고 그러지 않는다. 학생들이 전부 같이 수업을 듣기 때문에 학생들한테 왜 나만 차별해요, 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 물어오는 애들한테는 최대한 친절하게 해주고, 규정을 어긴 학생들에게는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나 싶게 엄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건물 입구에 걸린 기숙사 사감 리스트에 내 얼굴은 사라진지 오래다. 애들이 핀으로 아주 자글자글하게 구멍을 내 놔서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논문 쓰고 나면 이일도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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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