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만 가면 행복해지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 서점과 호텔, 그리고 공항이다. 서점은 당연히 책이 많아 좋고, 호텔은 가면 알아서 다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좋다. 공항은 내 일상과는 확실히 다른 공간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가는 동안 늘 셀렌다. 공항에 가면 떠나든 돌아오든 약간 들뜨게 되는데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또 수속을 밟으며, 비행기를 기다리며, 나처럼 들떠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다.
2000년 여름 중국에 갔었고, 거기서 한 2년 살았던가. 그리고 띄엄띄엄 한국에서도 지냈지만 어찌되었건 따져보니 어느새 객국생활이 10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까지 생각하다 거슬러올라 처음 비행기 타던 생각이 났다. 그때 그 알 수 없는 설레임이 나를 계속 비행기 타게 하는 건 아닌지.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그 때였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넜고, 싱가포르의 창이공항에 내렸다. 당시 인천공항이 없을 때였으니까 출발지는 김포공항이었다. 기내에서 일반 여성의 인체비율을 전혀 따르지 않는 싱가포르항공 여자승무원을 보고 살짝 쇼크를 먹었던 것 같고, 비행기 의자 뒤의 스크린이 메이드 인 대우전자라서 약간 우쭐했었던 것도 같다. 기내식, 당근 기억 안난다. 거리를 감안하면 영화를 두편 정도 봤을 것 같은데 뭘 봤는지는 모르겠다.
훅-하고 날아오는 더운김을 맞으며 창이공항에 도착했는데 이게 참 별천지인 거라. 지금 생각하면 딱 버스터미널 규모의 김포공항과 당시 아시아 항공물류의 중심지였던 창이공항과는 애초부터 게임이 되지 않았다. 바깥 세상에 이런 게 있었는데 나원참 그걸 몰랐네, 하며 좀 억울해했던 것도 같다. 혼자 어떻게 짐을 찾았는지, 어떻게 세관을 통과했는지 역시 기억 안난다. 택시기사가 하는 말이 중국어인지 영어인지 감이 안잡혔지만 날씨도 물었던 것 같고, 가로수의 종류(까지나)도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호텔까지 가면서 나눴던 대화 중에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 한가지.
아저씨, 아파트들이 상당히 넓어 보이는데 왜죠?
싱가포르의 모든 주택은 30평 이상으로 지어야 한다는 정부규제 때문이죠.
왜 하필 30평 이상이죠?
리콴유 총리가 집이 좁으면 아이들이 밖으로 돌기 때문에 무조건 30평 이상으로 지으라고 했거든요.
후텁지근한 데다 짠냄새 가득했던 그곳에서 딱 하루를 머물고 난 다시 다른 나라로 떠났다. 김포공항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창이공항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에 이상하게도 싱가포르에 갈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때 모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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