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 헌책방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책방이라기에는 좀 부족한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시간이 나면 들어갔다 그냥 나오지 못하고 서너권씩 구입을 했는데 일주일에 적어도 두번은 갔으니 그때 책을 꽤 사서 모았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비를 타는 날이면 10권짜리 대하소설도 큰맘 먹고 샀고, 이런 날 서점 주인부부는 아예 양손으로 들고가기 좋게 책을 묶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정류장에서 내려 집에까지 걸어가는 동안 몇번이나 손을 바꿔야했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가벼웠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산 책들중 대하소설들은 주로 중간고사기간에 해치웠다. 교양수업을 다른 과 전공으로 대체를 하면서 교양시험 일주일(앞뒤 주말을 포함하면 열흘쯤 된다) 동안 학교에 가지 않기 때문에 먹고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한참 태백산백, 아리랑을 읽을 때 나를 만난 사람들은 고향이 전라도냐고 자주 물었었다. 책 속의 사투리 지문을 혼자 따라하면서 읽다보니 어느새 그게 입에 붙었었나 보다. '몰입'과 관련된 책이 불티나게 팔렸었나 본데 난 그 시절 폭발적인 독서를 통해 몰입을 경험하지 않았나 싶다.
가족을 비롯해 좋은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 엄마가 해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못 먹는 것, 다른 자식들 보다 부모님 잔소리를 덜 듣는 것, 그리고 모국어로 된 책을 많이 못 읽은 것 등은 유랑생활이 길어지면서 느끼는 아쉬운 점들이다. 그중 모국어로 된 독서는 내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시나 소설같은 문학작품은 20대 이전에 다 끝내야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건 그 사람들 이야기고, 난 여전히 한국어로 된 시나 소설읽기를 좋아한다. 번역서들은 대개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데 한국 문학작품들은 그때그때 챙겨보기가 쉽지 않다. 사실 중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그런 독서는 거의 포기를 했던 것 같다. 가끔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보내주는 책들, 한국에 들어갔을 때 챙겨오는 책들이 있지만 일주일을 못 넘긴다. 요즘도 전자책을 비롯해 인터넷 읽을 거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는 모국어의 성찬이 그리운 게 사실이다.
박사과정 학생이 주로 해야하는 일이 늘 읽고, 쓰고, 생각하는 건데 지금도 난 여전히 소망한다. 한 일년만 그냥 아무 걱정없이 읽고 싶은 책 읽으면서 뒹굴뒹굴 지냈으면 좋겠다. 대학시절 교양시험 주간에 그랬던 것처럼. 특히 2000년 이후 쏟아져나온 젊은 작가들 책을 많이 읽고 싶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