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조 라면, 란저우(蘭州) 라미엔

인스턴트 라면을 비롯해 우리가 지금 먹는 라면의 원조는 일본이다. 중국의 국수가 마르코 폴로 덕분에 서양으로 건너가 스파게티가 되었고, 그 국수가 한국을 거쳐 일본에 가서는 라면이 되었다. 중국에도 맛이 다른 이 라면이 있다. 우리가 흔히 수퍼에서 사다먹는 라면도 있지만 중국에서 보통 라면(拉面, '라미엔'이라고 읽는다.)이라고 하면 손으로 뽑은 면을 각 종 재료로 끓인 걸 말한다. 소고기가 좀 들어가면 소고기 라면이고 닭고기가 들어가면 닭고기 라면이 되는 것이다. 길게 잡아 늘릴 라(拉, 한국식으로 읽으면 ‘납’), 면자는 우리가 쓰는 글자랑 다른 면(面, '미엔'이라고 읽는다.)이다.

 

이 라면이 제일 맛있는 곳이 란저우(蘭州)라는 곳이다. 베이징에서도 아침 시장에서 소고기 라미엔을 1원씩 주고 먹어 봤지만 란저우 라미엔은 정말 맛있다. 우리도 원조 원조 하는데 중국도 마찬가지다. 라미엔집 상호에 란저우가 들어가 있는 집이 많다. 물론 본고장 란저우에 가면 여기저기 원조 라미엔 천지다.

 

원조 라미엔을 먹고 란저우에서 은추완((銀川, 한글로 은천인데 이름이 참 예쁘지 않은가?)을 지나 내몽고로 향할 때였다. 서른 시간 넘게 타고 다니는 기차 여행에 익숙해지니까 열 대여섯 시간 입석은 이제 할 만하다. 청량리역에서 춘천까지 두 시간 거리, 좌석이 없으면 다음 기차로 미루던 때가 있었는데 나 원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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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Yann Layma

 

은추완에서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으로

은추완에서 내몽고 후허하오트어(呼和浩特)역까지 9시간인데 발디딜틈 없이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 기대지도 못하고 꼬박 서서 가야할 판이다. 뻔뻔한 사람들은 앉아있는 아가씨 옆으로 가서 자꾸만 자기 엉덩이를 들이밀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는 사람이 없다. 참 이상한 나라다. 나 말고는 주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임어당의 글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그게 다 민족성 때문이란다. 여기저기 관심 많은 사람 치고 잘 된 경우 없고, 그냥 내 일에만 관심 갖고 살면 세상 살기 편해서란다. 

 

새벽 한 시. 낮엔 가끔 사막이라도 볼 수 있었는데, 기암절벽도 볼 수 있었는데, 푸른 초원도 볼 수 있었는데, 깜깜해지니까 창에 어린 나 밖에 볼 수가 없다. 친구도 생각하고 가족도 생각하고 옛날 생각도 하고 앞으로 살 날 생각도 하고 그러면서 달리는 기차에 나를 내버려두고 있었다.


정확한 보통화를 구사하는 아주머니가 나를 자기 옆으로 앉으라고 그런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안돼보였는지 그래도 자꾸만 부른다. 그럴 때 누가 앉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 여섯 시간 만원 기차에서 서서 가다보면 바닥이라도 앉고 싶어진다.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 본 거다. 서서 오는 내내 나를 모른 척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갑자기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정말 갑자기, 느닷없이, 순식간에.


안재욱을 얘기해 줘야 했고 김희선이 진짜 봐도 예쁜지 설명해 줘야 했고 HOT의 멤버를 얘기해 줘야 하는데 난 걔네들 이름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국 사람이면 그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희망을 이어 줘야 했다. 내가 신고 다니는 발목 올라오는 신발을 보고 한국 애들은 다 그런 걸 신느냐 물으면 대답해 줘야 했고(사실 그 신발은 중국에서 산 건데.), 쓰고 있는 모자를 한 번만 써 봐도 되겠냐는 맞은 편 남학생한테 어색해하며 그 모자를 건네줘야 했다. 이게 아닌데 속으로 계속 되뇌어보지만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순간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는.

 

자리를 양보한 아주머니는 금방 일어나셨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입석으로 표를 끊어도 왔다갔다 하는 객차승무원이랑 말이 잘 되면 침대차로도 표를 바꿀 수가 있다는 거다. 은추완에서 베이징을 왔다갔다 하며 장사를 하신다는 그 아주머니는 시골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들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친절하게 순차통역을 해 주셨다. 젊을 때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부럽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여행 조심하라고는 떠나셨다.

 

아직도 중국은 여권 발급이 자유롭지 않고, 또 가려는 나라의 비자 문제가 매끄럽지 않다. 그래서 여권이랑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려는 중국 교포들이 브로커들한테 고액의 돈을 바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차에서 만난 용감한 형제

후허하오트어에는 왜 가냐고 앞에 앉아 있는, 베이징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학생이 자꾸 물어본다. 사막을 보러 간다고. 초원을 보러 간다고. 그런 걸 왜 보러 가냐고 그런다. 그냥.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좀 더 근사한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장학생으로 대학을 간다는 이 시골 청년은 베이징에 대한 환상이 굉장히 컸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기차도 신기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인과 얘기를 해 본다고 그 또한 신기해했다.

 

옆 좌석에는 이미 베이징에서 2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있는 형이 있었는데 전공이 무용이라면서 뜬금없이 한국의 댄스 가수들에 대한 계보를 죽 읊어대는 게 아닌가. 한국에서 불리는 이름이랑 중국에서 그들이 부르는 이름이 한자만 같지 발음이 달라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그 형이란 친구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참고로 안재욱은 중국에서 안자이쉐로 발음을 한다. 어떻게 한국에 살면서 그렇게 유명한 애들을 모를 수가 있느냐는 형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HOT 멤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떼로 나와서 노래하는 팀의 멤버들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 출출하다면서 건네는 컵라면을 그날 나는 먹지 못했다. 한국에서 새벽 네 시에도 먹었던 라면이 도무지 당기지를 않아서였다. 수북이 쌓아놓고 먹으라는 해바라기씨도 먹지 못했다. 원래 호박씨든 해바라기씨든 까먹는 건 감질나서 잘 안 먹는 편인데 새벽, 그 시간에는 더더욱 못 먹는다. 자기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제과점에서 사 온 빵이라면서 건네는 빵도 물론 못 먹었다. 그럼 포도는 어떠냐고 권하는데 그것도 역시 못 먹었다. 그 새벽, 그 기차 안에서 난 그 어떤 호의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참으로 미안하다.

 

원래 용간한 친구들인지 외국인인 나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형제들은 입석표를 가진 나와 다른 여자 승객한테 둘 다 자리를 양보했다. 나야 서 너 시간 후면 내몽고 역에서 내리지만 그들은 베이징까지 아직도 열 시간을 넘게 가야 하는데 말이다.

 

동생은 지금쯤 졸업을 했을 테고 여자친구가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벽 두 시 근방에 내몽고역에서 내리려는 나를 끝까지 배웅하던 친구였다.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무거운 배낭 메는 걸 도와주고 안 먹겠다고 고집피우던 음식들을 따로 비닐에 담아 손에 걸어주면서 문까지 따라와 인사하던 참으로 가슴이 따뜻한 친구들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이 친구들을 나는 그저 용감한 형제로 기억하고 있다. 은추완에서 내몽고로 가는 기차안에서 만난 용감한 형제로.


(여행시기: 2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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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Oh, Danny boy, the pipes, the pipes are calling~."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아일랜드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오 대니보이'의 첫 대목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2003 3월 아일랜드의 클래식 연주단체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아이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Irish Chamber Orchestra)가 그들이다. '오 대니보이' 에는 그들과 함께 했던 가슴 뛰는 추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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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rishchamberorchestra.info/


아시아 순회공연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아이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그 해 서울과 대전에서 두 개의 공식적인 공연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경기도 양평의 서종면에 있는 한 마을에서 비공식적인 연주회를 열게 되었다. 당시 그 공연의 기획자로 일을 했었는데, 처음엔 전체 일정에 비공식적인 연주회 일정을 잡기도 어려웠고, 출연료와 숙소 문제로 성사여부 조차 불투명했다. 그러나 시골 마을 연주회에 대해서 스무 명이나 되는 단원들이 뒤늦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기 때문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음악회를 여는 곳은 한마디로 예술인 마을이었다. 문화 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30여 회가 넘게 매 달 음악회를 열고 있었는데 인연이 닿아서 아일랜드의 실내악단이 이 마을을 찾게 된 것이다. 마을이 만들어지고 난 후 벽안의 외국인이 한꺼번에 스무 명이나 찾아오기는 그 때가 처음이란다.

공연 하루 전날 조마조마해 하면서 마을로 진입하는데 입구에서부터 마을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영어가 아닌 한글의 "환 아이리쉬챔버오케스트라 영"이라는 하얀색 플래카드가 마을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단원들한테 설명을 해줬더니 모두 입이 벌어졌다. 호기심 많은 젊은 단원들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이건 뭐냐, 저건 뭐냐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연주는 하루를 쉬고 그 다음 날 오후에 진행하기로 약속을 한 터였다. 여장을 풀고 마을 주민들이 준비한 환영회 자리로 이동을 했다. 다들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들이었다.

한국식 온돌방이 처음이라서 그런지 바닥에 앉은 모습들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그럼에도 삼겹살이 지글지글 구워지고 술잔이 오가면서 분위기는 출렁출렁, 점점 더 무르익어 갔다. 여기저기에서 상추는 이렇게 싸먹는 거다, 젓가락은 이렇게 사용하는 거다, 손짓과 몸짓이 몹시 분주했다. 불콰해진 모습으로 단원들에게 한국식 주도(酒道)를 가르치는 분도 있었다.

다음 날 점심으로 제공된 산채비빔밥에 단원들은 "판타스틱(Fantastic!!)"을 연발했다. 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우리나라 산채비빔밥은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식단이 아니던가. 김치를 처음 먹어 본다고, 고추장을 처음 먹어 본다고, 된장찌개를 처음 먹어 본다고, 그래도 맛있다고, 다들 즐거워 했다. 고추장이 입에 맞았던지 한국 공연 후 중국으로 떠나는 단원들의 짐에서 빨간색 플라스틱 고추장 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어 시간의 리허설을 위해 연주 장소로 미리 움직였다. 15cm높이의 단상과 약간의 조명시설, 그리고 200개의 플라스틱으로 된 간이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단원들이 단상에 올라갔더니 무대가 꽉 차보였다. 활 긋는 소리가 몇 번 나고 리허설은 바로 시작되었다.


공연이 시작될 저녁 7시가 가까워오자 입구가 술렁술렁 시끄럽기 시작했다. 조용히 하라는 소리, 줄을 서라는 소리, 비키라는 소리로 밖은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어른은 1,000, 아이는 500원의 입장료를 내야 입장할 수 있는 전 석 유료의 음악회였다. 사람들이 천천히 입장하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좌석 200개가 모두 차버렸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서 관계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입장하려는 사람들의 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전체 좌석을 뒤로 밀고 공간이 남는 곳으로 의자를 움직여 열이나 줄 맞출 필요 없이 앉기로 했다. 아이들은 무조건 앞으로 나와 바닥에 앉고 안을 수 있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안고 음악회를 보기로 했다. 장소가 비좁아 창문의 난간에까지 사람들이 위험하게 매달렸다. 복도 바깥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복도와 공연장 가운데의 창문은 모두 열어 놓았다. 음악회는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200석 규모의 공연장에 그 날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입장을 했다.


무대 위의 연주자들은 몹시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단상 바로 아래에서 와글와글 100명은 좋이 넘는 꼬마들이 의자도 아닌 바닥에 앉아 연주를 들으려는 모습은 내게도 진풍경이었다. 드디어 음악회가 시작되었다. 비발디의 '사계' 운율이 창문을 타고 지붕을 타고 온 마을에 흘러 넘쳤다. 3월도 중순인데 봄과 여름이, 가을과 또 겨울이 한꺼번에 이 마을을 찾아 왔다. 어른들은 음악에 취했고 아이들은 잠에 취했다. 4악장이 지루했는지 꼬마들은 '여름'이 찾아올 때부터 벌써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일부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어른들의 "~!!", "~!!" 소리가 나자 결국 악장 중간에 지휘자가 연주를 멈췄다. "노 프라브럼(No problem)!!" 잔뜩 긴장한 객석을 향해 날아온 거장의 한 마디였다.


연주가 끝났는데도 사람들은 떠날 줄 모르고 계속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에 자다 깬 아이들은 더 큰 몸짓으로 합세를 했다. 연주자들은 그 좁은 무대 위에서 객석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가 또 고개를 숙이는 일을 반복했다. 아무도 음악회가 끝났다고 박수를 끊지 못했고 계속되는 박수 소리는 앙코르 연주 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언제 끝날 줄 모르던 긴 박수가 멈추면서 음악회가 끝이 났다.
 

간단한 저녁식사로 예상했던 뒤풀이는 동네음악회의 2부 순서가 되고 말았다. 술잔이 몇 순 배 돌아가자 흥이 난 단원들이 가방에서 악기를 꺼내 아일랜드의 민속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비올라가 나왔고 만돌린도 나왔다. 연주회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북이 등장하자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단원 몇 명이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음악에 맞춰 주민들과 서로 팔을 걸며 방안을 빙- 돌기 시작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어났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팔을 엇갈려 돌면서 다들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아리랑'이 독창으로, 또 합창으로 흘렀고, '오 대니보이'도 독창으로, 또 합창으로 흘렀다. 아일랜드 사람들은아리랑을 배웠고, 한국 사람들은오 대니보이를 배웠다.

 

축제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다시 한국에 오고 싶다고, 꼭 다시 한국에 오겠다면서 내게 아름다운 추억하나 달랑 남겨두고 그들은 한국을 떠났다.

 

Posted by 윤오순
채널24: 에티오피아2007. 4. 14. 16:56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주변에 미국이 몇 개의 주로 이루어졌는지 물었을 때 답변을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뉴욕이 어디에 있고 플로리다가 어디에 있는지도 그들은 훤히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을 방문한 적이 없어도, 또 그곳에 친척이나 지인이 살고 있지 않아도 그들은 그렇게 미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아프리카에 몇 개의 나라가 있는지 물어 보았다. 토고와 가나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을 이번 월드컵을 통해 알았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정확하게 그 숫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프리카에는 가장 최근에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에리트리아를 포함해 53개의 나라가 있다.(모로코까지 포함하면 54개국이지만 모로코는 아직 AU(African Union)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 지구상에 아프리카라는 대륙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우린 마치 그런 세상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심지어 개별 국가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아프리카에 있는 한 나라를 아프리카라고 하는 단일개념으로 이해하려고까지 한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시아에 내포된 개념으로 동일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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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의 중심 에티오피아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아프리카를 찾아보면 북동쪽 근방에 뾰족한 뿔 모양을 한 대륙 에티오피아가 보인다. 에리트리아, 지부티, 수단, 케냐,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의 이웃 나라이다. 이집트도 이곳에서 아주 가깝다. 아프리카에서 전혀 아프리카답지 않은 땅 에티오피아에 대해 소개하려다 서두가 길어졌다.

아프리카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우린 에티오피아에 대해서도 그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맨발로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아베베의 나라, 세계 최빈국으로 UN이나 NGO단체의 지원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나라, HIV/AIDS 천국의 나라, 이 정도가 우리가 에티오피아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 전부가 아닐까 싶다.

 

80여 여개 종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

에티오피아는 대한민국의 5배 정도 되는 땅덩어리에 현재 약 77백여만 명이 살고 있다. 민족 구성은 오로모족, 암하라족, 티그레이족, 거라게족 등 약 80여 개의 종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현재 총리를 비롯해 정치적 실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고 있는 티그레이족이고 상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약 4%를 차지하고 있는 거라게족이다. 특히 거라게족은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민족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는 어린 꼬마나 차가 섰을 때 쏜살같이 뛰어가 화장지 꾸러미를 파는 청년들은 대부분 이 거라게족이다.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는 에티오피아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평균 해발 고도가 2,300m 정도의 고지대로 약 3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Addis아디스’는 여기 말로 ‘New’를, Ababa아바바’는 ‘Flower’를 의미한다. 공식 언어는 영어와 암하릭(Amharic)어로 간판 등에 영어와 암하릭어를 병기하고 있지만 암하릭어를 알면 에티오피아에서의 생활이 아주 편해진다.


서울에서 출발해 홍콩이나 태국의 방콕을 경유해서 이곳에 올 수 있다. 유럽에서 올 경우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고 아프리카 항공을 이용할 경우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케냐 등을 경유한다. 두바이 공항에서는 약 네 시간만 비행하면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한다. 역사가 60년이 넘는 에티오피아 에어라인이 한국에 취항하지 않는 관계로 에티오피아 땅을 밟으려면 아직까지는 몇 나라를 거치거나 공항에서 하릴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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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때 지상군을 파견한 아프리카 유일의 나라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6천여명의 지상군을 파견한 나라이다. ‘칵뉴부대’라고 불리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황제의 근위병들로 단 한명의 포로도 없이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전쟁이 끝난 후 잔류 부대원들은 DMZ근방에 고아원을 만들어 당시 전쟁고아들을 돌보기까지 했다. 지금은 우리가 국제협력단의 봉사단원 파견을 비롯해 정부차원에서 혹은 각 종 NGO 및 선교단체들이 에티오피아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지만 불과 50여 년 전에 에티오피아가 우리를 도와주던 시절이 있었다. 현재 한국에 참전용사후원회가 있어 아디스아바바에 참전용사회관을 건립하는 등 한국과 에티오피아와의 인연의 끈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1년은 13개월, 올해는 1999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가 영국이나 프랑스로부터의 오랜 식민지 경험이 있는 것에 반해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 잠깐 점령당한 것 이외에는 식민지 경험이 없어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고유의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공식 언어로도 사용되는 암하릭어는 표음문자로 33자의 자음과 7자의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우리가 사용하는 보편적인 서역 Gregorian을 사용하지 않고 Julian Solar 캘린더를 사용하고 있어 에티오피아역으로 계산하면 1년이 12개월이 아니라 13개월이 된다. 한 달을 30일씩 계산하니까 남은 5일 혹은 6일이 이들에겐 13월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다 보니 우리의 신년이 에티오피아에서는 1 1일이 아니라 9 11일이 된다. 그래서 모든 에티오피아의 달력은 1월부터가 아니라 9월부터 시작한다. 물론 올해도 이곳은 2006년이 아니라 1999년이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다 치룬 밀레니엄을 이들은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다.

 

고대 기독교 문명의 보고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는 고유의 토착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 북아프리카 정도까지만 포교가 되었다는 아프리카에 수백년동안 번성했던 기독교 왕국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에티오피아이다. 교리상의 차이로 서구 기독교 문화와는 단절된 에티오피아만의 독특한 기독교 문화를 형성해 왔는데 현재 약 50%정도가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이고 이를 바짝 뒤쫓는 게 이슬람교 신자이다. 전설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최초의 왕조인 악숨(Axum) 왕조는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시바여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메넬릭(Menelik) 1세가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라고 한다. Lalibela 교회(거대한 돌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교회)를 비롯해 악숨 오벨리스크, 곤다르(Gondar) 등 에티오피아 곳곳에는 기독교 문화유산을 비롯해 지난날의 번성을 짐작케 하는 문명의 보고들이 많이 남아 있고 이들 중 대부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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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Paul Zizka


커피와 인류문명의 발상지

커피의 발상지가 어디인지 아는가. 그렇다. 에티오피아이다. 에티오피아를 설명할 때 이 커피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수출량의 대부분도 이 커피가 차지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커피를 ‘분나’라고 하며, 독특한 의식을 통해 커피를 마신다. 이를 ‘커피 세레모니’라고 하는데 에티오피아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호텔이나 커피 전문점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커피 세레모니를 만날 수 있다. 생두를 직접 볶아 이것을 절구에 곱게 빻은 후 이 가루로 커피를 만드는데,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에스프레소처럼 작은 잔에 담아 나온다. 향은 물론이고 색깔이나 그 맛이 아주 진하다. 여기에 홍차를 섞어 마시기도 한다.
 

한편, 에티오피아의 국립박물관에 가면 그들이 자랑하는 ‘루시’를 만날 수 있다. 에티오피아가 인류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루시’ 때문인데, 박물관 지하 한 켠에 350만년전 인류화석인 ‘루시’의 뼈 조각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이 화석은 현재도 조사 중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인류화석 보다 앞선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 에티오피아가 처음이라고 자랑하는 게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블루 나일’이라는 것이다. 블루 나일은 이집트 나일강의 발원지이다. 화이트 나일의 발원지는 우간다의 그린 힐이고, 블루 나일은 이곳 에티오피아의 하이랜드가 그 원류이다. 아디스아바바에서 갈 경우 자동차로는 이틀을 잡아야 하고 비행기로는 45분이면 블루 나일에 도착한다. 처음 보는 사람은 그 장엄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 한다.

 

아프리카의 허브 에티오피아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미디어란 미디어는 온통 에티오피아의 가난과 기근밖에 보여 준 적이 없어서 비행기가 착륙할 공항이나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문명이란 잣대로 봤을 때는 우리 보다 조금 늦은 곳이고 환경이란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이곳은 아직 자연과 많이 가까운 곳이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나라가 얼마나 매력적인가 알 수 있을 텐데도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에티오피아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그간 무관심으로 일관한 면이 없지 않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아프리카의 제네바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뉴욕, 브뤼셀, 제네바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외교공관이 많다. 한국에서는 자주 접하기 힘든 나라를 비롯해 100여개가 넘는 대사관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있다. AU(African Union), UNECA(UN Economic commission for africa) 등 주요 국제기구가 이곳에 본부를 두고 있다.
2006년 한국의 대통령은 에티오피아를 외면했지만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일본의 고이즈미 전 총리가 차례로 이곳을 다녀갔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말리아와 에리트리아와의 불안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지만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허브로서 여전히 그 존재가치를 무시할 수 없는 곳이다.

(월간 '문화공간' 2006년 11월호-세종문화회관 발간)

Posted by 윤오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겨울축제로 자리 잡은 ‘2007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가 “얼지않은 인정, 녹지않는 추억”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난 2007 16()부터 1 28()까지 총 23일간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화천천 일대에서 개최되었다. 산천어축제는 1급수 어종인 산천어를 얼음낚시와 루어낚시 등으로 잡으며 즐길 수 있는 이색 체험 축제로 40cm 이상 꽁꽁 언 얼음판 위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참여 수 있는 ‘산천어 얼음낚시’, ‘산천어 루어낚시’, ‘산천어 맨손잡기’등의 산천어 체험 프로그램들과 ‘얼음썰매’, ‘눈썰매’, ‘눈조각’, ‘얼음축구’등의 겨울 체험 프로그램들이 다채롭게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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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제5회째를 맞이한 이번 축제는 총 방문객 약 125만여명, 지역경제 파급효과 약 450억원(직접유입액 추정치), 축제 공식 홈페이지 접속자수 약 50만을 기록하며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산천어 얼음낚시를 비롯한 산천어 프로그램 체험시 제공했던 ‘농촌사랑나눔권’ 발행액은 총 51백여만원, 썰매 체험시 제공했던 '화천사랑상품권' 발행액은 총 36백여만원으로 최종 집계되었다. 특히 농촌사랑나눔권은 화천의 지역 농민들에게, 화천사랑상품권은 화천의 지역 상인들에게 그 혜택이 되돌아간다.

 

산천어축제는 2005, 2006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문화관광축제의 ‘예비축제’ 부문에 선정된 데 이어 2007년에는 문화관광축제 중 ‘유망축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이렇듯 3회 연속 정부가 공인한 산천어축제를 올해는 전 세계가 주목했다. AP, AFP, EPA 등 세계적인 통신사가 앞 다퉈 산천어축제를 소개했고, 영국 BBC, 독일 슈피겔 등 유명 언론 매체의 국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Hwacheon(화천)' 'Sancheoneo(산천어)’를 해외에 확실하게 알렸다. 산천어축제의 개최목적이 청정지역 화천을 홍보하고 어려운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였는데 이번 축제를 통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평가한다.

 

산천어축제가 열리는 강원도 화천군은 북한강의 최상류지역으로 상수도보호구역, 군사보호구역, 산림보호구역 등 각종 개발금지구역으로 묶여 있던 인구 25천의 작은 마을이었다. 80%이상이 산과 물로 이뤄져 있던 이곳에 북한의 금강산댐에 대응하기 위한 평화의 댐 공사를 하게 되면서 낚시의 메카로 불리던 파로호가 서서히 말라갔다. 자연히 낚시 이용객은 줄어들었고, 한 술 더 떠 군장병의 외출외박 정량제까지 시행되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1차 산업과 군장병 면회객, 낚시객을 대상으로 하는 3차 산업이 전부였던 화천의 지역경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생계가 막막해진 지역주민들은 하나둘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2002년 가을, 산천어축제의 모태(母胎)이자 화천의 지역축제였던 ‘낭천얼음축제’를 준비하고 진행하던 민간인 3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각종 규제(수도권 상수원 보호법, 군사시설보호법, 고도제한법 등등)에 묶여 개발되지 못한 청정한 자연과 사람뿐이었다. 화천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원인 자연을 보호하면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당시 이들이 내린 결론은 결국 자연과 생태만이 화천이 살 길이라는 것이었다. 화천만이 가지고 있는 자연생태에 대한 이해와 상생(相生)이 바로 답이었다. 그날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그냥 지나는 길에 들렀어.”라며 합석해 묵묵히 자리를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정갑철 화천 군수(현재)였다. 화천에 공장이 들어올 수 없다면 ‘굴뚝없는 공장’인 관광상품을 개발하자, 그것으로 지역 활성화를 꾀할 수 있음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그에게 지역주민들의 이런 자발적인 움직임은 큰 힘이었다.  

 

1회 산천어축제의 개최결과로 축제의 성공가능성을 확인했고, 진정으로 화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축제의 기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실질적으로 화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축제가 되려면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담당부서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개최 주기가 1년인 축제가 끝이 나면 다음년도 축제를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결국 1회 축제 때 주축이 되었던 민간추진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재단법인을 설립하게 되었다. 산천어축제를 기획하게 된 장석범 운영본부장을 주축으로 산천어축제를 경험한 홍보, 운영부분의 담당자로 구성된 나라축제조직위원회는 화천군의 행정적인 협조를 받아 그때부터 민과 관이 함께 하는 축제를 기획해 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축제조직위는 화천군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축제 기획들을 추진하며 화천 경제에 가시적인 효과를 이뤄 내고 있다. 올해의 경우 역사나 규모에 있어 그 차이가 확연한 중국 하얼빈의 빙등축제, 일본 삿뽀로의 눈축제간의 겨울축제 상생 네트워크를 마련하기 위한 국제 심포지엄을 축제기간에 개최한 바 있다. 게다가 지역축제에서는 처음으로 축제에 상품권을 도입함으로써 지역농민과 상인들에게 경제적인 힘을 실어줄 수 있게 했고축제장과 인근 산농촌지역의 연계프로그램인 ‘농촌사랑방마실’을 운영함으로써 화천 전체가 축제장이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산천어축제는 군에서 혹은 민에서 혼자 만들어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얼곰이부대(산천어축제의 공식 캐릭터이며 산천어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을 지칭한다.)라고 하는 화천군민 전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축제 기간 내내 온몸을 아끼지 않고 축제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한마음으로 똘똘 뭉친 얼곰이부대가 바로 산천어축제의 성공을 가져 온 힘이다. 이제 다섯 돌을 맞이한, 아직은 가야할 길이 많은 산천어축제지만 지금의 숫자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초심을 잃지 않고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축제가 되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월간 '자치행정' 2007년 3월호)
Posted by 윤오순


화천은 축제의 도시다. 화천을 아직도 군인이 많이 사는 그런 군사도시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줄로 안다. 그러나 청정지역 화천에는 군대만 있었던 게 아니라 화천만의 문화가 있었고 무엇보다 축제가 있었다. 화천을 대표하는 축제로는 1월의 산천어 축제, 6월의 비목문화제, 7월의 토마토축제, 7월에서 8월로 넘어갈 때 열리는 쪽배축제가 있다. 이 중 비목문화제와 토마토축제는 화천군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고, 겨울의 산천어 축제와 여름의 쪽배축제는 ‘화천군나라축제조직위원회’라는 축제조직위원회가 따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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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위원회와 관의 유기적 관계를 배우다

화천에서 축제란 그 힘이 아주 막강하다. 지난 1월에 있었던 산천어축제는 인구 25천이 사는 소읍인 화천에 무려 100만이 넘는 사람을 다녀가게 했다. 강원도 그 곳에 화천이 있는 줄도 몰랐던 시절이 있었지만 축제를 통해 이제 적어도 100만인의 사람이 ‘화천’이란 곳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천에서 이런 축제가 있기 전에 고향인 화천을 소개하기가 힘들어 ‘춘천’에서 가까운 곳, 혹은 그냥 ‘춘천’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는 분을 만났었다. 그 분은 지난 겨울 화천에 100만이 다녀가면서 각 종 매체에 화천이 나올 때마다 친구들을 불러 술을 사셨단다. 지역축제의 힘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올 여름 두 달 동안 화천에서 쪽배축제 일을 할 기회가 있었다. 축제일을 하면서 화천이란 곳을 다시 알게 되었고 화천에서 진행되는 축제의 특징을 체감할 수 있었다. 전국적으로 1,000여 개의 지역축제가 쉴 새 없이 오늘도 진행되고 있지만 해를 거듭해도 다 거기가 거기인 축제가 많은 게 사실이다. 화천 축제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에 대해 몇 가지 소개하면서 지역축제의 발전방향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나라축제조직위원회는 화천군의 예산으로 움직이지만 군청과 독립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축제를 만들고 있어 이는 여타의 지방축제와는 다른 운영상의 큰 차이점으로 보였다. 그러나 축제의 전반적인 기획은 조직위원회에서 나오지만 본 축제는 실과별로 담당부서가 있어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자치행정과에서는 축제 종합안내센터를 운영하고, 주민봉사과에서는 캠핑촌을 운영하는 식이다. 홍보의 경우 축제조직위원회에 홍보팀이 따로 운영되고 있지만 군청에서 매체의 언론취재활동에 대해 다각도로 지원해주고 있었다.

 

지역사랑상품권으로 먹고 쓰고 가세요
쪽배축제는 창작 쪽배 콘테스트가 주축이기 때문에 매년 기상천외한 쪽배를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겨울의 산천어 축제에는 창작 썰매 콘테스트가 있기 때문에 해마다 다른 프로그램을 만나볼 수가 있다. 이렇게 참가자가 주도적으로 변화를 주는 프로그램 이외에 기획자들이 머리를 굴려 만들어내는 참신한 프로그램들이 화천 축제에는 많이 보인다. 올해의 경우 1월 산천어 축제 때 사용했던 화천사랑 상품권 제도를 쪽배축제에서도 응용해 사용했다. 콘테스트의 상금 일부(10%)와 캠핑촌 이용료 등에 전부 이 상품권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화천지역사랑상품권은 화천지역에서는 현금과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지역화폐로 식사는 물론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서 넣을 수도 있다. 일반 축제장의 바가지요금을 경험하고 압력밥솥에 마실 물까지 다 싸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화천에 와서 최소한은 먹고 쓰고 가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주 획기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자원봉사자가 없으면 문화행사가 안될 정도라는 얘기가 들리고는 하는데 축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화행사에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많이 늘어나는 추세다. 행사에 자원봉사자를 활용할 경우 경제적인 이유 이외에도 긍정적인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화천에서는 축제에 참여하는 모든 도우미들에게 무료가 아닌 일당을 지급하면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제공하고 있었다. 대학생 도우미들에게 있어 축제는 사회생활의 예비과정으로서의 역할도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또 여름과 겨울에 축제가 개최되고 있기 때문에 방학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고향인 화천으로 오게 만드는 역할도 축제가 담당하고 있었다.

 

위기관리 대처 능력은 단연 탁월

올해는 여름에 비가 많아 쪽배축제의 경우 개최까지 세 번의 준비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애초에 붕어섬이란 곳이 축제 개최지로 결정돼 이곳에 축제 상황실을 비롯해 프로그램 관련 시설을 마련했지만 집중호우로 축제장소를 옮기는 게 불가피했다. 강원도 일부 지역이 비로 인해 축제 전면 취소를 결정했지만 화천은 개최지 변경만으로 또 다시 축제진행을 강행했다. 짧은 시간 내에 변경된 개최지에서 축제를 준비 중이었으나 또 다시 내린 폭우는 거의 절망 수준이었다. 이때도 신속하게 결정해서 시설을 철거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고 다시 주민이 합세해 결국 세 번째 준비한 프로그램으로 올 여름 쪽배축제를 진행할 수 있었다. 개최장소 변경이나 개최여부에 관해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은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순식간이었다. 하늘이 도와 축제 개막일 오전까지 내렸던 장대 같은 비는 오후부터 그쳐 축제가 끝나는 날까지 하늘은 맑음, 그 자체였다.


농촌체험 프로그램 연계,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참가 

올 여름 쪽배축제는 제한된 축제장에서만이 아니라 5개 읍면 7개 마을과 연계해서 운영되었다. 축제 본 행사장에도 30여 가지의 프로그램을 기획해 운영했지만 7개 마을에도 다양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해 외지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일부 마을에서는 강의실과 첨단 프리젠테이션 시설 장비도 마련해 워크숍이나 강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나라축제조직위원회에서는 축제 공식 홈페이지에 마을에 대한 안내는 물론 운영 프로그램까지 관리해주고 있었다. 내년은 좀 더 확대해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화천 축제의 최대 강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누구라도 만나면 소개하고 싶고, 축제에 관심있는 사람으로서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한 부분이었다. 화천엔 재주꾼이 많았다. 나라축제조직위원회의 본부장을 비롯해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들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많다보니 뭘 하나 만들어도 지역 안에서의 해결이 가능했다. 축제 참가자들을 위해 내 놓은 평상은 화천에 있는 황토한옥전수학교 전수생들이 만들었다. 평상이라고는 하지만 예술품으로 보였다. 이번 축제 때 화천천에는 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다리가 놓였는데 이 다리도 전부 지역주민들이 손수 놓은 다리들이다. 현재 하는 일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축제기간이 되면 이렇게 알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다. 목공에 재주있는 분들은 목공으로, 배선에 재주가 있는 분들은 배선으로 축제에 기여하고 있었다.

 

사실 축제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축제를 왜 할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하면 답이 보일지 모르겠다. 축제가 더 이상 지역만의 잔치가 아닌 시절은 벌써 지났다. 그렇다고 기획자들만의 시험 무대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축제를 참가하는 사람들만의 일인가. 그것도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을 힘 빠지게 하는 일이다. 축제는 장소를 제공해 준 사람, 또 만드는 사람, 그리고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 모두가 즐거워야 의미가 있다. 그래야 한해 한해 그 축제가 기다려지고 또 힘을 가지고 오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현대적인 축제들 중에서도 일본 시코쿠 고우치켄의 요사코이 마츠리나 삿뽀로의 유키 마츠리,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페스티벌 같은 것은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이제 그런 축제 하나 가져도 좋지 않겠나.

(월간 '너울' 2006년 8월호-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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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산천어축제 성과 및 성공원인  (2) 2007.04.14
Posted by 윤오순

시계방향으로 돌아돌아 중국 한 바퀴 

2001년 여름, 석달간 기차를 타고 시계방향으로 중국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여행하면서 내내 침이 나올 만큼 중국이 부러웠다. 문명의 세례를 흠뻑 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여전히 한없이 미개해 보이는 그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사는 터전인 천혜의 자연을 훔쳐올 수도 없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솔직히 너무 배가 아팠다

 

가진자들에게는 확실하게 서비스를 해주는 나라가 중국이다. 기차를 한 번 타봐도 그건 금방 알 수 있다. 여행 안내 책자에는 대개 기차를 네 종류로 등급을 구분해 놓는데 경험에 의하면 다섯 종류다. 제일 비싼 자리는 침대가 푹신한 곳, 그 다음은 딱딱한 침대, 그것보다 싼 자리는 뒤로 꺾을 수 없는 약간 푹신한 의자, 그리고 우리가 중국을 소개하는 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90도 각도의 자로 된 딱딱한 의자, 마지막이 입석이다.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남쪽 끝에서 북쪽으로 한 번 이동하려면 며칠이 걸린다. 이렇게 멀리 움직이는 기차에 입석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른 네시간 짜리 입석을 타본 적이 있는데 이건 타 본 사람만 알리라.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다리가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부어 걷기가 힘들 정도다.

 

내가 본 중국사람들은 새벽 두 시에도 해바라기씨를 까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이를 안고 밀폐된 공간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여담이지만 담배 한 대가 그냥 놔두면 7분이면 다 탄다는데 이 사람들은 한 대로 20분을 즐길 수가 있단다. 무서운 사람들. 컵라면을 먹고 국물이 질질 흐르는 바닥을 슥슥 발로 비비고는 그 기차 바닥에 몸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아직은 과일껍질이고 PET병이고 플라스틱 도시락이고 무조건 기차 밖으로 던지는 사람들이다. 급하면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보고, 볼 일을 보다가 자기 것(?)이 옆사람한테 튀어도 미안하단 말을 안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차가 고장이 나서 여섯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아도 승객들끼리 여유있게 담소를 즐기고, 그러다 차가 움직이면 운전기사한테 박수를 보내고 먹던 과일까지 전해주는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 지리 선생님이 중국은 전형적인 서고동저형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늘 헷갈렸는데 내가 밟아 본 중국은 확실히 동쪽은 평야가 많고 서쪽은 고산지대가 대부분인 서고동저형이 맞다. 선생님 말씀을 수십년이 지나 몸으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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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log.naver.com/rockcap

해발 고도 2,800m 산골짜기 랑무스(朗木寺)

도대체 어디까지 버스가 올라 갈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도착한 곳은 리틀 티베트라고도 부르는 랑무스(朗木寺)라는 곳이다. 시아허(夏河)에서 남쪽으로 버스로 5~6시간 더 내려가면 랑무스라는 작은 산골동네가 있다. 나는 위에서가 아니라 아랫동네인 송판이란 곳에서 위로 위로 올라가 이 곳에 도착했다. 해발 고도 2,800m. 도착하기 전까지 좌우로 펼쳐지는 광활한 초원(몽고에 도착한 후 그때까지 내가 봤던 초원은 진정한 초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은 아직도 원시를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 이름이 랑무스가 아니라 마을 안에 있는 절 이름이 랑무스였다. 라마교 6대 사찰 중의 하나로 작은 마을 규모에 비하면 제법 큰 절이었다.

 

중국은 넓은 땅덩어리 안에 여름에도 봄 가을 겨울 계절을 다 가지고 있는 나라다. 여행하고 싶어하는 나라들의 좋은 풍광에 계절마저 다 가지고 있으니 부러워할 수밖에. 내가 찾아간 랑무스는 바깥이 여름이라도 겨울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스위스를 느낄 수 있는 곳이지만 슬프게도 화장실이 없는 곳이었다. 해발 3,000m에 육박하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비로소 나는 나를 버릴 수 있었다.

 

랑무스에 있는 성도식당에서 젊은 친구를 하나 만났다. 쓰촨대학에 다니는 이 친구는 방학이 되면 식당을 하는 엄마를 도와주러 이 마을에 머문다고 한다. 관광객이 거의 없는 이곳에서 식당이 되나 싶었지만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식당이랑은 많이 달랐다. 주문하면 재료가 없어 요리 할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 결국 가지고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시켜 먹을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어 주문을 했는데 개념이 없는 두 모자는 도대체 그런 음식이 어디 있느냐는 거다. 팬을 기름에 달궈서 달걀 노른자가 가운데 동그랗게 살아있게 가져오면 된다고 설명했는데도 그게 없다는 거다. 기름에 범벅이 된 달걀 요리에 결국 내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직접 들어가서 반숙으로 된 달걀 프라이 요리를 해 오니 그렇게 익지도 않은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고 난리였다. 감자를 채 썰어 대충 볶아 먹었던 것도 같고, 이름도 모르는 밀가루 음식을 내와서 간신히 넘긴 기억도 난다. 내가 경험한 랑무스는 그런 곳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겁 없이 그곳에 갔었는데 여름인데도 야크 똥을 태워 난방에 쓰는 난로를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그 식당 안에도 난로가 있었다. 내가 하도 춥다 춥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겨울도 아닌 여름에 뭐가 그리 춥다고 난리냔다. 근데 비스듬히 들어올린 그 총각 바지 속에 내복이 들어있었다. 랑무스는 그렇게 여름에도 추운 곳이었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새벽 6시 반에 딱 한 대밖에 없는 마을이라 하루만 묵을 생각이었는데 나흘을 더 묵는 바람에 추억 거리가 많아졌다. 그 총각이 언제 떠나느냐 묻기에 내일 떠난다 그랬더니 몹시 아쉬워하면서 하루 더 머물고 가면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고 나를 잡았다. 아침 8에 절의 주지스님이 죽어서 장례식을 거행하는데 볼 생각이 있느냐는 거다. 배낭여행객들한테 마을의 행사는 그게 뭐가 되었든 봐주어야 한다는 게 내 여행철학이다. 결혼식이 되었든 그게 장례식이 되었든. 그러마 그러고 하루 종일 동네 구경을 했다. 동네라고 해 봤자 양떼들이 환장하고 뛰어 노는 동산 위에 올라가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이 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랑무스에 오기 전에 샀던 천도복숭아를 먹으면서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오호 통재라. 아침에 일어났더니 이미 10다. 장례식을 놓쳤다. 한없이 게으른 자세로 느리적 거리며 식당엘 갔더니 총각 어머니가 끓는 물에 쌀을 집어넣고 있었다. 죽을 먹고 싶다고 그랬더니 아침 일찍 오면 된다고 그랬는데 그 때까지 두 모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나한테 무슨 이런 복이 있나 그러면서 죽을 후후 불어 넘겼다. 북부의 서민들은 아침에 대부분 죽이랑 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만토(밀가루 빵)를 주식으로 먹는다. 남쪽 사람들은 밥을 주로 먹지만. 한 일년 북쪽에 살았더니 나도 그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죽이 먹고 싶어 그냥 한 말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날 감동시켰다. 죽에 대한 답례로 앞으로 이 동네에 외국 여행객들이 많이 올지 모르니까 메뉴판을 정비하자고 총각을 설득해 성도식당 메뉴판을 점검해 주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를 부록으로 가르쳐 주었다.

 

장례식을 놓쳐서 안 됐다는 표정을 짓더니 내일 또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면서 그냥 천장天葬이 있는 장소나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장례식이 8 있으니 그걸 보려면 천상 하루를 더 묵어야 하는데 고민이 됐다. 천천히 생각하자 그랬는데 며칠을 더 묵고 그 곳을 떠나면서 알았다. 나도 참 순진하기는. 어떻게 주지스님 장례식이 매일 있을 수가 있겠는가. 여행객이 뜸한 그 곳에서는 마을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내일도 또 내일도 장례식이 있으니 그걸 보고 가라 그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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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aychen


고산지대 천장(天葬)
 풍경

천장은 죽은 사람의 뼈를 잘게 부숴서 매나 독수리들이 먹을 수 있게 던져 놓는 것으로 고산지대에서 볼 수 있는 장례 풍습의 일종이다. 땅도 척박하고 묻어도 썩지 않으니 그런 식으로 장례를 지내는가 보다. 고산지대에 '조장鳥葬' 풍습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외부인에게 공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천장이 치러지는 곳은 마을에서 제일 높은 언덕으로 그곳에 제단이 있었다. 총각이랑 빨치산처럼 비탈을 돌아 능선을 타고 제단에 도착했다. 피 묻은 도끼도 그대로 있고 잘게 부순 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주변으로 오색 찬란한 헝겊들이 날리는 중간에 제를 지내는 단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시선으로 이 자리에서 내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도 사람 사는 마을인데 뭐, 그러면서 금방 긴장을 풀어버렸다.

 

밤이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빛 아래에서 라마승들이랑 동네아저씨들이 낯선 이방인 아가씨에게  쏟아 내는 질문을 건성으로 듣고 건성으로 답하면서 황하 맥주에 취해 랑무스에서의 며칠이 그렇게 흘러갔다.


떠나던 날 다행히 시간에 맞춰 일어나 새벽 6 30 차를 탈 수 있었다. 난 지금 그 친구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랑무스의 성도식당만을 기억하고 있다. 언제 또다시 그 곳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01년, 내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 (2001.7~9 중국 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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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네  (0) 2007.04.14
Posted by 윤오순

물고기를 잡아야 뱃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물을 던져 잡든 바늘로 잡든 뱃사람이라면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 물고기 안 잡는 뱃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배에서 생활한다. 뭍에 내려오기도 하지만 물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뱃사람인 탓에 배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그들은 배 위에서 먹고 배 위에서 배설하고 배 위에서 씻고 배 위에서 잠잔다. 이러니 뱃사람이 아닌가.


인천 제1국제여객터미널에 가서 중국행 배에 오르면 이런 뱃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뱃사람 중에는 조선족도 있고 (북한 억양이 섞인) 조선어가 아닌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중국 한족도 있다. 더러 한국인 뱃사람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물건을 교역하는 일에 종사한다. 한국 물건을 중국에 내다 팔기도 하고 중국 물건을 한국으로 들여오기도 한다. 국제여객터미널의 짐 붙이는 곳에 가면 우리 눈에 익숙한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아닌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가 표기된 커다란 박스가 산처럼 쌓인 채 승선을 기다리고 있다. 천진항이 목적지인 김 박스도 있고 단동항이 목적지인 라면 박스도 있다.


배에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고 화장실 안에는 탈수기까지 갖춰져 있다. 속옷을 비롯해 건조를 기다리는 옷가지들이 복도 여기저기에 내 걸려 있다. 열 대여섯 시간에서 스물 네 시간 배 여행을 하면서 빨래를 하는 여행객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이 뱃사람들 것이다. 그들은 승선하자마자 자리를 잡고 제빨리 빨래를 해서 넌다. 일반 관광객들이 티켓에 적힌 자기 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이 사람들은 이미 샤워까지 끝낸 상태다. 마치 집에 돌아온 사람들처럼 배 안에서의 모든 게 아주 익숙하다.


배가 인천항을 떠나고 나면 이들은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정보를 주고 받기도 하고 카드 놀이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배가 중국의 항구에 도착하면 이들은 제일 먼저 하선을 한다. 대개 단체 여행객들이 많아 배에서 내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짐을 붙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퀴도 안 달린 검은색의 커다란 이민 가방을 직접 메고 배에 오른다. 배에 올라 그 자리에서 거래를 하기도 하고 중국의 항구에서 수요자에게 직접 물건을 전달하기도 한다. 배에서 교역이 끝난 사람들은 하선을 하지 않고 그대로 그 배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 온다.


비록 잡아야 할 게 물고기는 아니지만 이 사람들도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와 싸워야 하는 사람들만큼 거칠고 억세 보인다. 배 안에서 서로의 애환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자리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물건 때문에 몸싸움을 하기도 한다.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다가 편을 갈라 다른 사람 험담을 하기도 한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배 위라도 다를 게 없다. 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기에서도 그대로 재연된다.


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배에는 물고기를 잡지 않는 뱃사람이 타고 있다. 배 위에서 바다와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삶과 싸우는 그들은 천상, 뱃사람 아닌 뱃사람이다.  (2004.7~9 학위논문을 위한 북경 필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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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연길행 비행기 하얼빈에 불시착 

중국말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중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선물처럼 생겼다. 여권을 다시 만들고 대사관에 가서 중국 방문 비자를 받으면서 처음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았지만 무사히 인천공항에서 서해를 가로 지르는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상해에서부터 시작해 천진, 북경으로 북상하는 동안 큰 문제는 없었다. 북경에서 마지막 목적지를 향하면서 드디어 문제가 발생했다. 연길로 가야 하는 비행기가 기류 불안정으로 하얼빈에 불시착했다. 출발할 때부터 한 시간 반이나 연착을 한 비행기가 결국 목적지에 도착을 못한 것이다. 비행기 연착은 경험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내심 불안해하고 있는데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려야 하나, 아니면 기내에서 마냥 기다려야 하나. 짐을 챙겨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도 있었지만 마냥 기다려야 했다.


전세계를 웃음으로 강타했던 코믹물인 '미스터 빈' 시리즈를 기내에서 보면서 흥분지수를 낮추고, 낮게 깔리는 등려군이라는 대만 가수의 노래에 다시 한번 흥분상태를 점검하는 동안 무려 네 시간이 흘렀다. 쉴 새 없이 떠들고 쉴 새 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던 승객들도 이제 지쳤는지 기내가 잠잠해질 무렵 드디어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가나보다.

새벽 한 시 연길시 풍경
연길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이미 잠들어 있는 도시는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못하겠는데 우리 팀을 인솔하는 조선족 가이드 아가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좌측으로 보이는 강은 해란강으로 어쩌구 저쩌구. 중간에 쉬지 않고 호텔에 도착해도 새벽 두 시는 좋히 넘을 텐데 프로그램상 준비된 저녁이 있으니 가야 한단다. 우측으로 보이는 큰 대로는 어쩌구 저쩌구. 시야가 캄캄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시커먼 새벽이었다. 예정시간보다 무려 여섯 시간이나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새벽 두 시 반에 한국 방문객들을 위해 준비된 전주비빔밥을 먹고 나서야 호텔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미 시간은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아침 일곱 시 출발이다. 무조건 자 둬야 했다. 이렇게 일이 술술 안 풀리는데 과연 내일 그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일행들은 또 불안해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내일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삼대가 복을 지어야 한다는 얘기도 있고 선한 마음이어야 가능하다는 얘기도 있는데 다 하늘에 맡길 노릇이다.


밤새 불안해 한 것에 비하면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여섯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그 사이 비가 뿌렸다가 해가 다시 나오기를 여러 번. 점퍼를 꺼내 입었다가 다시 벗기를 또 여러 번. 이상한 간판도 보였고 이상한 풍경도 보였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매표소 입구에서 접혔던 뼈들을 풀어주고 있는데 지프차가 도착했다. 여섯 명씩 조를 짜서 승차를 해야 했다. 완전 자동차 랠리다.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들이 눈앞으로 휙휙 지나갔다. 제대로 풍광을 볼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정상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해발 고도 2,700m 지프차 타고 랠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다.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그 백두산에 드디어 도착했다. 구름이 쉴 새 없이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해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 천지를 좀처럼 카메라에 담아내기가 힘들었다. 가이드 아가씨의 형식적인 인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팀 앞에 여섯 팀이 다녀갔는데 이만큼이라도 천지를 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이란다. 해발고도 2,700m가 넘는 정상은 날씨가 불안정해 두툼한 점퍼를 입은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누워보기도 하고 손을 들어 보이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다양한 자세로 사람들은 산을 맞이하기보다 산을 담아 놓기 바빴다. 카메라가 없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천지를 담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푸르다 못해 검기까지 한 천지의 물 빛깔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말이나 글로 눈으로 직접 본 자연의 모습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은 자연보다는 한참 하수인지도 모르겠다.


내려오면서 천지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가는 물줄기에 손을 담가볼 수 있었다. 손을 대자마자 어찌나 차가운지 바로 손가락 마디들이 벌개졌다. 장백 폭포를 보려고 이동한 장소에서는 내려오는 물의 온도가 섭씨 82도나 되어서 그 물에 달걀과 옥수수를 쪄서 파는 상인들도 보였다. 실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겁 없이 손을 담갔더니 이번에도 손가락 마디들이 벌개졌다. 1도 화상이다. 천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손을 댈 수도 없이 차갑고도 뜨거운 물들이 태극처럼 모여 산을 타고 들을 타고 내려와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우리 산하를 적시고 있었다. 문득 이쪽 중국이 아닌 저쪽 북한으로 올라가는 백두산은 어떤지 궁금했다.


우리 나라 관광지라면 어디든지 흔히 볼 수 있는 토종닭집, 보리밥집 같은 음식점들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지어진 러브호텔도 보이지 않았고 현란한 나이트클럽 간판도, 노래방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그랬다. 산에서 나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외부 유출이 금지되어 있었고 자연을 훼손하면 사회주의 국가다운 엄청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방문객들은 오롯이 그 곳에서만 자연을 즐겨야 했다. 하산하면서 들른 식당의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물들은 온통 80도가 넘는 백두산 온천수였다.


다시, 여섯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렸다. 아직은 열 두 시간 정도 고행을 해야 이쪽 중국에서 백두산을 올라갈 수가 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서 이상한 간판도 이상한 풍경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백두산을 저만큼 뒤로 하고 그저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만 가져 올 수밖에 없었다. (2002.7~8 외교통상부 후원 한중수교 10주년 기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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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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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왠 일이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랍쇼가 이사를 싹 했네? 결혼 준비에 바쁠텐데 말이야.
아무튼 땡큐~~서울신문의 사강님이 그랬단 말이지. 블로그는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근데 난 이렇게 든든한 서포터가 있으니 도움을 받아야지 뭐.

사진은 <핑퐁>의 박민규 작가가 지금처럼 뜨기 전에 보내 준 건데 내가 이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더라고. 메뉴의 기린을 보니까 이 사진이 생각났어. 내 짐 30킬로그램 안에 기노 작가가 선물한 <핑퐁>이 있었는데 책을 읽을수록 박 작가는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요즘 젊은 작가들 중에 이렇게 탁월한 상상력으로 작품을 마구, 정말, 마구 쓰는 작가를 보기가 힘든데 말이야. <핑퐁>이 장편이지만 그 안에 박 작가의 나름의 '단편'을 여러 편 읽을 수 있었어. 이 사진 보면서 느낀 건데 <카스테라> 표지의 일러스트 모델이 이 기린이 아닌가 싶네.

아무튼 그냥 들어왔다가 블로그가 싹 바뀌어 있어서 놀란 김에 '일단' 하나 포스트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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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세상 참 좁더라

어제 물어물어 찾아간 컨퍼런스 홀에서 튀니지에서 온 친구를
만났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 옆에 있는 도쿄 대사관에서 근무를
한댄다. 네 여자 친구는? (전에 알제리에서 온 친구랑 누가 봐도
커플처럼 지냈었거든.) 손사래를 치면서 그 친구는 그냥
베스트 프렌드 중에 하나였단다. 알제리는 바로 튀니지 옆에
있기도 해서 더 그랬다는데 뭐 나야 할 말 없지.
원래 약혼자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알제리 친구도
현재 도쿄 알제리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단다.

오늘 코스타 리카 친구한테서 메일을 받았는데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친구도 다들 지금 도쿄에 있단다. 살짝 보고 싶은 칠레
친구만 현재 산티아고에 있고. 늘 칠레상, 칠레상, 이렇게 불러서
이름도 잘 생각 안난다. 진짜 뭐였지? 다들 이름이 복잡해서
아르헨티나상, 온두라스상, 이랬었거든. 어쨌거나 조만간 동창회를
한번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코스타 리카상은 지금 진행하는
대형 프로젝트만 끝나면 일본에 와서 공부하고 싶단다. 열심히
스페인어 공부 하고 있냐고 물어보는 데 쩝이다. 한국어도 다 까먹을
지경인데.

며칠 전 메신저에서 만난 친구한테 "일찍 죽는 걸 뭐라고 그러지."
이걸 물어봤었다. 요절.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