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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몇 개나 넘어 오오이타현(大分県)의 나카츠에(中津江) 마을을 찾아갔다. 나카츠에 마을은 2002년 월드컵으로 유명해진 마을이다.

당시 나카츠에는 아프리카의 카메룬 선수들이 5일 동안 묵으면서 훈련을 할 곳이었다. 그러나 카메룬 축구협회와 선수단 간의 승리수당 문제로 오기로 한 날에 선수단은 도착하지 않았다.

간신히 돈문제가 해결 된 후 선수단은 비행기에 올랐지만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영공 통과 허가를 얻지 못해 방콕에서 하루 이상을 더 머물러야 했다. 결국 5일이 아니라 하루를, 그것도 잠도 안자고 마을 사람들과 인사만 한 채 카메룬 선수들은 떠났다.

인구 1,600명(2007년 현재는 1,200명 정도)이 사는  나카츠에 마을은 선수들이 오기 전까지 아주 분주했다. 그러나 선수들은 오기로 한 날 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묵묵히 선수들을 기다렸고 마침내 도착한 선수들을 온 마음으로 환영했다.

마을의 촌장이었던 사카모토 야스무(坂本 休)씨를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었는데 올해 77세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분이었다.

훈련을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들이 유명무실해질 순간이었지만 신은 나카츠에를 버리지 않았다. 당시 이 웃기지도 않은 헤프닝을 찍기 위해 미디어란 미디어가 이 마을에 다 모였고, 그들이 먹고 쓰고 간 돈이 한 두푼이 아니었단다.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나카츠에 마을을 보러 오는 행렬이 끊이지 않아 그때 올린 수입만 약 1억엔 정도란다. 경제적인 효과는 그 몇 배이고. 일부는 시설 짓는 데 끌어 들인 빚 갚는 데 쓰고 나머지로 재단을 만들었는데 주민의 참여 의식을 높이기 위해 두당 천엔씩을 걷었단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나카츠에마을 지구재단(中津江村地球財團)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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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2일 오오이타현의 석유 돔에서 일본국가 대표팀과 카메룬 팀의 A매치 경기가 열렸었는데 경기 유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사카모토 씨였다.

4만명 수용 인원에 이날 공식 입장객은 37,240명이었다. 돔에서 이 정도 규모의 행사가 거의 열리지 않기 때문에 이날 경기만으로 1년 장사를 끝낸 셈이라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 열릴 뻔한 경기를 카메룬이 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카츠에 마을이 있는 오오이타에서 열어야 한다고 사카모토 씨가 강력히 주장했단다.

운동장 한켠에는 지역주민 약 400여 명이 카메룬의 유니폼을 입고 카메룬을 응원했다. 경기는 아쉽게도(?) 2:0으로 카메룬이 졌다.

현재 시설들은 전지훈련 캠프로 이용되고 있었다. 혹시 유소년 축구팀 중에서 훈련 캠프장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하셨다. 후쿠오카까지만 오면 나머지는 나카츠에 마을이 다 해결한다고. 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정도는 괜찮단다. 카메룬에 초등학교를 수십개 지어줬는데 앞으로도 계속 지어주겠단다.

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유명한지 '일본 나카츠에 마을 사카모토 씨'라고 쓰면 전세계 어디에서나 배달이 된단다.

최근 일본은 지역간의 합병이 활발하게 추진 중이다. 인구 10만이 안되는 곳은 마음에 드는 옆 동네를 찾아가 합치자, 이런 식이다. 합병이 되고 나면 지역 정체성이 없어지는 건 당연지사. 나카츠에도 옆 동네와 합병이 추진 되었지만 마을 이름만은 살아남았다. 브랜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어질 때 일본에 나카츠에 마을이 있다면 한국에는 화천이라는 곳이 있다면서 슬그머니 산천어축제 홍보 리플렛을 내밀었다. 어떤 마을이냐고해서 5년 전만 해도 사람,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곳인데 그 사람, 물이 한해에 관광객을 100만씩 불러 들인다고 소개했다.

사카모토 할아버지는 시간이 되면 화천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오마이뉴스 민족국제 2007.9.5)

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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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줄이 너무 타이트한데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다.

오늘은 가와노 씨의 배를 타고 어망이 설치된 바다까지 나갔다. 아들과 함께였는데 봉오도리를 같이 준비하면서 안면을 터서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시청의 직원이 이 지역 출신이라서 분위기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사투리들을 아주 심하게 써서 머리가 좀 아팠지만...

이 동네에 바다에서의 어업활동 허가를 받은 사람이 세 사람이라는데 가와노씨도 그중 한 분이다. 이 넓은 바다에 아무데나 가서 물고기를 잡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랬었다.

그물이 아주 넓게 쳐져 있어서 물고기들을 잔뜩 건져올릴 거라는 기대를 했었는데 40마리가 넘는 가오리 덕분에 망쳤다. 이런저런 크기의 가오리 구경은 실컷했지만. 날깨를 폈을 때 길이가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것도 잡혀서 현의 수족관에 연락을 해서 가져가라고 했다. 가끔 그렇게 잡힌 가오리나 특이한 물고기들이 현의 수족관으로 향한단다. 물론 공짜로. 가오리가 40마리나 되니 도저히 그물을 들어올릴 수가 없어서 가오리들 쫓아내느라 오전을 다 허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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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와서 난생 처음하는 경험들이 많은데 내겐 생활이 아니라서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생활이 된 이사람들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가오리가 그렇게 많이 걸린게 내 책임이 아닌데 말이다.

가오리를 쫓아내느라 그물 밖으로 내보낸 물고기들 덕분에 오전의 어획량은 며칠 전 낚시로 건져올린 전어보다 양이 적었다. 사시미를 해 먹으라고 전부 아이스박스에 담아주셔서 미안해하며 들고왔다.

저녁엔 극장이 없는 이곳에서 혼자 영화제를 개최하는 분이 있다고 해서 만나러 갈 계획이다. 직업이 따로 있으면서 취미로 한다는데 가끔 유명한 영화감독들을 초대해 지역주민들에게 교류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단다. 어디나 적응하면 다 살게 되어 있는 것 같다.


며칠 동안 인터넷 접속할 수 있는 곳을 발견 못해서 오늘 한꺼번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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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석회석 광산을 보러 산비탈을 한참을 올라갔다. 15미터 높이의 계단으로 깎아 내려가고 있는
광산 현장을 보면서 츠쿠미의 경제는 조상한테 물려받은 수려한 자연을 이래저래 이용해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세대들에게는 뭘 남겨 줄 수 있을까. 다 깎아내고 파헤치면 말이다.

점심은 배를 타고 호토지마라는 섬을 방문했다. 일본인들이 사는 집을 토끼장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섬의 토지가 넉넉하지 않아서 우리나라 방한칸 정도 되는 넓이로 건물을 2층, 3층 올려서 지은 주택들이 섬 여기저기에 가득했다.

집과 집 사이는 아주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온 동네를 연결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어찌나 건강하신지 바구니들을 하나씩 지고 산비탈로 연결된 골목을 쉬지도 않고 올라다니는 모습이 눈에 자주 띄었다. 경사가 높아서 머리에 이기도 힘들고 들기도 힘들어서 여기 사는 할머니들은 커다란 바구니를 만들어 그곳에 짐들을 넣어 다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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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톤의 배로 미크로네시아까지 가서 참치잡이를 하신다는 원양어선 선장님을 한분 만났다. 7년만에 아주 젊은 사람이 배를 타게 돼서 요즘 살맛이 난다고 하셨다. 인도네시아에서 연수를 온 젊은 사람들 말고는 그동안 맨 60, 70 넘은 사람들 뿐이었단다. 배 타는 사람들의 애환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자꾸 딴 생각을 했다.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그물을 내리고 남는 시간엔 뭘 할까 등등.

너무 더워서 츠쿠미시 출장소를 찾아 들어갔다. 어찌나 반갑던지. 물 한잔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배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긴 하지만 왠 개들이 배안에 그렇게 많던지. 이런저런 배들을 많이 타봤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처음이다.

저녁엔 저 멀리 오오이타현의 농림청 직원을 홈스테이 하는 곳으로 초대해 농산물 판매 촉진활동에 대해 밤 11시가 넘도록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고정된 월급을 현으로부터 받지만 과외로 현내에서 농사짓고 있는 사람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날밤을 잊고 뛰어다닌다는 얘기를 여러 사람한테 들었다.

어디나 지역혁신의 핵심은 사람이었다. 미야자키현의 후쿠다씨를 새롭게 알게되었다. 시간이 되면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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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도 없고 바람도 없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는데 오늘 시내 견학을 했다.
섬 이쪽에서 저쪽까지. 물론 차로 이동했지만 날씨가 이글이글 완전 찜통이었다.

츠쿠미는 옛날에는 귤과 참치가 유명했지만 이제 농사짓는 사람들도 없고 원양어선을
타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어 어디다 이거다 하고 내놓을 게 없는 곳이다.
그런 이 도시에 양질의 석회석이 생산되는 덕분에 일본 국내 톱 3에 해당하는
태평양 시멘트 공장이 들어섰다. 앞으로도 200년 정도는 생산할 수 있단다.
산을 파 헤쳐서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츠쿠미시 도시 경관 일부는 좀 흉물스럽다.
어쨌거나 시내 견학을 하면서 이 공장의 높은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궁금한 이야기들을 물어봤다.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면서 자연파괴에 대한 목소리가 높지만 더 이상 시멘트를 파낼 수
없는 곳은 녹지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도 최근에 쓰레기를
버릴 때는 쓰레기 봉투를 사야 하는데 츠쿠미시의 경우 돈을 주고 봉투를 사긴 사지만
종이 이외의 모든 쓰레기는 시멘트 공장이 처리를 해준다. 시에서는 상징적인 금액을
내고 쓰레기 전량을 소각해 시멘트 공장에 보내면 공장에서는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시멘트 원료로 만들어 사용한다는데 품질은 전혀 차이가 없단다. 우리나라 시멘트 회사에서도
가끔 견학을 온다는데 이 시스템은 도입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뭐 했더라. 더우니까 생각이 잘 안난다. 아, 이 도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근사한 공공도서관을 방문했다. 자유롭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 여기저기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깥보다 시원해서 한참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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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에 집을 나와 배을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다. 츠쿠미 시청 직원 중에 이번 프로그램 담당 과장이 배를 소유하고 있어서 그 배를 탔다. 배멀미 안하느냐고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 햇빛만 강하지 않았으면 더 버텼을 텐데 10시까지 낚시를 하고 접었다.

이미 통에는 전어가 100여마리 담겨있었다.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해야하나. 넙치가 많다고 했는데 그건 한마리도 못 잡았다.

화천에서 산천어축제가 끝나고 얼음판에 나가 산천어를 열심히 건져 올리려 노력했지만 실패해서 내심 낚시에 자신이 없었는데 이게 왠걸. 낚싯대를 담그기만 하면 주루룩 달려 올라오는데 낚시의 묘미가 이런 거구나, 새롭게 알게 되었다. 작은 새우를 아주 조그만 바구니에 담아 미끼로 썼다. 낚싯대에 바늘이 여섯개 달려 있어서 이런 저런 고기들이 따라 올라 오는데 아주 재미있었다. 넷이 가서 둘만 성공했다. 과장이 어제 잡은 5킬로 정도의 도미를 선물로 줘서 저녁에 회를 떠서 먹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맛에 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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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빼물만큼 날씨가 더웠는데 저녁엔 옆 마을 봉오도리에 참가했다. 프로그램에 춤대회가 있어서 팀을 짜서 참가했는데 심사위원 할아버지들이 한국에서 이 시골까지 왔다고 가산점을 주는 바람에 우리 팀이 1등을 먹었다. 상금을 5천엔 받았는데 이번주에 부침개 파티에 쓰기로 했다.

일본의 유명한 페스티벌은 이곳저곳에서 많이 구경했지만 지역주민들이 만드는 봉오도리 참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춤대회에 젊은 사람들이 없어 좀 썰렁했다. 가장행렬을 연상케하는 의상들을 전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준비해서 입고 있었는데 좀 서글프기도 했다.
관객이 다 떠나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동이 틀때까지 자리를 지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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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일찍부터 옆 마을의 봉오도리를 도회에서 고향을 찾은 젊은이들과 같이 준비했다.
노인회에서 만든 다양한 종이장식들을 여기저기에 달고 붙이고 땡볕에서 정신이 없었다.
종이학도 있었고, 꽃송이도 있었고, 오징어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오징어 모양의
종이장식도 있었다. 노인네들이 둘러 앉아 이걸 만들면서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찌나 꼼꼼하게 만들었는지 한번 쓰고 말 거라고 생각하니 아깝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8월13일부터 일본의 여기저기는 봉오도리 준비로 아주 분주하다. 오봉이라고 하는 절기다.
분위기가 딱 우리의 추석같은 데 이때가 되면 도회로 나간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하나둘씩 모인다.
게스트하우스도 지방에 사는 애들은 지난 주말에 고향을 찾아 다들 떠났다.
이 시기에 일주일씩 휴가를 받기도 한다. 보통 8월 15일에 끝나기 때문에 대개 그 앞뒤를 쉰다.
츠쿠미시까지 올때 신간센을 타고 왔는데 객차가 아주 미어 터졌다.
방송에서는 몇 시에 사람이 몰리고 몇 시에 한가한 지를 중계할 정도다.

이 때 70, 80이 넘은 노인들만 지키던 마을이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는다.
8시간, 10시간씩 차를 운전해서 고향에 도착한 젊은이들은 봉오도리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준비한다.
봉오도리는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인데 우리처럼 경건하게 치르는게 아니라 다들 한군데 모여 춤을 춘다.

동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시끌벅적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전통을 지키는 마을에서
어떻게 봉오도리를 준비하고 주민들이 참가하는지 아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난생 처음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바다인데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어 마치 프라이비트 비치처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늘 바다를 두려워했었는데 무슨 용기로 오늘
풍덩 빠져버렸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간단한 동작을 익힌후 혼자 10미터를 넘게 헤엄쳤다.

해수욕을 마치고 나오는데 해변에서 가족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이 동네 시보에 얼굴이
실린 덕분에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한다. 한잔 하고 가라는데
그냥 못 이기는 척 하고 주저 앉았다.

여행 오면 부끄러운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다는 데 이거 너무 자유로운 거 아닌지.
내일은 새벽 일찍 넙치를 잡으러 갈 것이다. 쓰고 나니 웃긴데 진짜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넙치를 잡을 것이다.





 
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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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방법이 없다. 몇년 만인지 원.

아침 일찍 시청으로 출근해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명함과 출입증을 받았다.

츠쿠미시의 ADSL사업에 대한 설명을 2시간 정도 듣고 관광 프로그램에 대한 청사진을 이야기했다.
어딜 가나 이런 이야기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또 달라서 귀를 쫑긋하며 들었고 또 나름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풀어놨다.

점심을 푸지게 먹고 오후에는 센스이(仙水)라는 곳에서 <히마츠리火祭り>를 같이 준비했다. '히'는 일본어로 불을 의미한다. 불꽃놀이도 하고 뭔가 요란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아, 그냥 감동 먹었다. 70대의 아라키 할아버지가 8년전에 사람들과 힘을 모아 시작한 페스티벌이란다. 요란한 폭죽도 없었고 수백개의 램프가 방파제 위에 죽 놓여지고 오후 7시가 되어 이 램프에 일제히 불이 켜졌다. 작은 어촌 마을이 별 세상이 되는 순간이다.

마을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올라가 보았는데 10미터에 하나씩 놓인 램프에 어떤 노력이 숨어있는지 보여줄 수 없어 아쉬웠다. 낮에 땡볕 아래서 할아버지들이 모여 램프에 기름을 넣고 손질을 할 때만 해도 이게 어떤 페스티벌이 될까 궁금했는데 술도 없고, 흥청망청하는 것도 없이 아주 조용한 페스티벌이 밤새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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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벚꽃이 이 마을을 덮는단다. 아직은 애기 벚꽃 나무들이지만 10년 후를 내다보고 몇 년 전에 심었단다. 물론 아라키 할아버지가.

아라키 할아버지는 좀더 근사한 히마츠리를 위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보다가 말레이시아에 근사한 불꽃 페스티벌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단다. 올해 1시간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오오이타현의 대학에 유학을 온 말레이시아 학생에게
도움을 청했단다. 내년 쯤에는 이런 마츠리를 열 거라고 오늘 자료들을 죽 보여주는데 시간이 되면 내년에도 한번 와 보고 싶다. 시에서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고 주민들 30여 명이 모여서 매년 이 행사를 조용히 연단다.

세상은 조용히 자기를 태우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살만한 게 아닐까. 오늘도 푹 잘 잘 것 같다.


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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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신간센을 타고  무려 8시간이나 걸려 이곳에 도착했다.
중간에 갈아타는 걸 헷갈려서 안가도 되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오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오면서 신간센 안에서 4시간 동안 한국어를 가르친 하카다의 아가씨한테 핸드폰으로 메일이 왔다.
도쿄에서 다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뮤지컬을 배우는 학생이라서 음감이 발달되어서인지 발음도 깨끗했고, 바로 글자를 읽는 게 아닌가.
헤어질 때 자기 이름과 내 이름을 한글로 쓰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었다.

츠쿠미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에 화천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정감이 넘친다.
오후 6씨쯤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이더니 성대한 바베큐 파티가 열렸다.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윤오순님, 이런 플래카드까지 만들어놓고 기다릴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배 터지게 먹고 이제 잠자리를 고르기 직전이다.
내일부터 하드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라는데
나한테는 그냥 놀이같다.

아, 졸립다. 그러나 평화롭다.

Posted by 윤오순



드디어 방학이다. 한학기를 어떻게 버틸까 내 스스로가 의심스러웠는데 결국 시간이 해결해줬다.
바쁘다는 핑계로 블로그 관리도 제대로 못했는데 날마다 60 정도에서 조회수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보고 이곳에 꾸준히 오시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살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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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주쿠의 오모테산도 힐즈 내부

지난 주 대학원 다닐때의 선생님이 도쿄에 오셨었다. 자칫 못 만날 수도 있었는데 연락이 겨우
닿아 만나뵐 수 있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오셨는데 내게까지 연락을 해 주신 덕분에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오랜만에 눈요기도 실컷했다.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까지의 차비만 달랑 들고 갔었는데 가난한 유학생의 지갑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는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짧지만 내겐 아주 즐거운 여행이었다.

롯본기 힐즈 52층에 있는 모리 미술관에 가서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작품들을
보며 오감이 요동치는 경험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건축가들이 이 사람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 건축은 아직도 이 사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산토리 미술관에서는 '물과 삶'이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전시를 감상했다. 흔한 테마인데 전시
구성이 독특해 아, 또 감동받았다. 물이 주는 그 다양함이라니.  무리를 해서 들어간 신국립미술관의
'일본 미술 100년전'도 역시나 가기 잘한 전시였다. 우리나라 미술대전이 여전히 일본의 그늘 아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만의 착각인가.

참고로, 롯본기역을 중심으로 갤러리들이 많아 동선을 잘짜면 하루에도 여러 곳을 둘러볼 수 있다.

전시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는데 쇼핑을 가면 언제 뒤에 따라오셔서 내가 집었던 물건들을 다
계산하시는 통에 돌아오는 길에 가방이 묵직해질 수 밖에 없었다.

잔돈까지 탈탈 털어서 돌아가는 길에 차비에 보태라고 하신 후 선생님은 떠나셨다. 내가 지지리
궁상을 떨지 않았음에도 원래 유학생은 가난한 법이야, 이렇게 즐겁게 뭔가 베풀 수 있게 해줘서
오히려 내가 고마워, 이러시는데 할 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나도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고학하는 유학생을 만나면 꼭 갚아야지,
그랬다. 한 여름에 도쿄를 다녀가신 산타클로스 덕분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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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며칠째 내리는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태풍의 영향인가?
비가 그친 줄 알고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아주 흠뻑 젖었다.
어디 잠깐 세워놓고 기다릴 걸 하다 냅다 그냥 달렸더니...그래도 기분은 좋다.
비를 좋아하는 거랑 철드는 건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신정아 관련 글을 올렸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내려버렸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혹시 어디 있지, 하시는 분들 있을 지 모르겠다.
나까지 부화뇌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충격은 충격이다.

이제 몇 번의 발표와 레포트를 제출하면 두달 간 방학이다.
1년에 몇 개월씩 공식적인 방학이 있어 난 학생이 좋다.
공부는 별로 체질에 안 맞는 것 같고. 학교라는 공간이 좋을 뿐이다.

올 여름엔 저 남쪽 큐슈에 있는 쭈꾸미라는 데를 간다.
인구는 2만 3천 정도 되는 시골마을인데 바다가 있단다.
축제, 관광 이런 걸로 지역개발 프로그램을 짜 본다는데
나도 참가하기로 했다. 회를 좋아하냐고, 스시 같은 것 먹을 줄
아냐고 조심스럽게 묻길래 나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없어 못 먹어요.

다녀와서는 에티오피아의 밀레니엄 행사를 준비해야 한다.
에티오피아는 서력을 사용하지 않고 고유의 달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올해 9월 11일에 새 천년이 시작된다.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호텔이란 호텔은 죄다 예약이 꽉 찼단다.
일본에서는 도쿄 대사관을 중심으로 관련 단체들이 각자 보탤 수 있는
힘들을 보태서 기념행사를 치를 예정이다.

그리고는 다시 가을 학기가 오겠지.

여러분은 올 여름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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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