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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나와서 시청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곤다르 시장을 구경할 수 있다. 유칼립투스 나무로 얼키설키 비계(고층 건물을 지을 때 디디고 서도록 긴 나무나 쇠파이프를 얽어서 널을 걸쳐 놓은 시설)를 사용해 건물을 짓는 모습도 볼 수 있고, 길 양쪽에 도열해 있는 재봉사들도 큰 볼거리다. 가게 안이 아니라 전부 바깥에 재봉틀을 내 놓고 작업을 하는데 이제는 생활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숯을 넣은 다리미로 쓰윽쓰윽 다림질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다운타운이라고 해봤자 우리나라 시골읍 정도의 규모지만 도시 곳곳에서 비교적 현대식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토모에 따르면 이러한 현대식 건물들은 이탈리아 침략시기에 지어진 것들로 곤다르에만 약 300개 정도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 역사가 60여 년 밖에 안 된 건물로 시내 중심가에 있는 우체국 건물 등 주로 관공서 건물로 이용되고 있었다. 물론 주택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철제 대문을 비롯해 화장실의 욕조나 변기 등은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성에서 나와 시청 반대쪽으로 길을 잡아 걷다 보면 파실라다스 왕의 풀장과 여행서에도 나오지 않는 쿠스쿠암(Kuskuam) 교회를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의식을 기념하는 날인 1 19일에는 파실라다스 왕의 풀장에서 대대적인 팀캇 페스티벌이 거행되는데 서로 물을 뿌려가며 축제를 즐기고 밤을 새워 예배를 보는 인파 덕분에 이 때가 되면 주변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쿠스쿠암 교회는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몇 개 올라가야 하지만 가는 길목에 펼쳐지는 풍광이 나그네의 발걸음을 결코 억울하지 않게 한다. 특히, 교회의 천장화가 인상적인데 그 유명한 데브레 베르한 셀라시에(Debre Berhan Selassie) 교회의 천장화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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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브레 베르한 셀라시에 교회는 17세기 이야수 1(혹은 조슈아 1)가 건립한 교회로 곤다르에 있는 44개의 교회 건물 중 1800년대 남()수단에서 쳐들어 온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교회다. 에티오피아의 최고 걸작이라고 하는 종교화가 이 교회에 있는데 에티오피아 국가 홍보물을 비롯해 관광상품에도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 보면 에티오피아 특유의 천사가 가득 그려져 있는데(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전부 80개라고 함.) 신기하게도 얼굴 표정이 같은 게 하나도 없다. 커다란 눈에다 몸통이 아닌 머리에 날개를 가진 천사들의 모습인데 전설에 따르면 이 천사들은 성 요하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쿠스쿠암 교회 천장화의 천사들도 바로 이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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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의 도시 곤다르. 아디스아바바에서 북쪽으로 약 500km정도 떨어져 있고 비행기로는 1시간 남짓 걸린다. 바하르다르에서는 이제 길이 뚫려 차로도 갈 수 있다. 못미더워 비행기를 타면 20분이 채 안 걸린다. 암하라족이 다수를 차지하며 중세 유럽풍의 성곽 덕분에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곤다르(Gondar)에 도착해 왜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가 아닌 에티오피아를 탐냈는지 이해가 갔다. 내가 만난 곤다르는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의 아프리카가 아닌 중세의 유럽 그 어느 곳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두리번거렸더니 모든 택시기사들이 대뜸 ‘토모’를 찾고 있느냐고 묻는 게 아닌가. 이거 참 신기하네. 토모가 누군데? 이곳에서 거의 7년째 곤다르의 건축물을 연구하는 일본인 연구자였다.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제대로 답변도 안 듣고 토모라는 사람이 사는 곳에 나를 내려줬다. 한국은 아프리카 연구가 활발하지 않지만 일본에는 아프리카 연구자들이 아주 많아서 에티오피아에서도 수년째 현지조사 중인 일본인 연구자들을 많이 만났다. 연구를 하면서 동시에 곤다르 시청의 도시계획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는 토모 덕분에 성곽의 도시 곤다르의 이곳저곳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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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birr짜리 입장권(이 표는 버리지 말고 파실라다스 왕의 풀장을 구경할 때 다시 사용할 수 있다.)을 사서 곤다르 성에 들어서니 매표소 뒤쪽의 언덕 위에 펼쳐져 있는 오래된 궁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에게 엑스칼리버 전설로 유명한 영국 중세 시대 아서왕의 궁궐 카멜롯에 비유해 곤다르 성은 '아프리카의 카멜롯'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지인들은 ‘파실 게비’라고 부른다. 곤다르 성은 약 900m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도시인데, 안에는 황제가 사는 궁전뿐만 아니라 법원, 도서관, 수도원, 목욕탕 등이 들어서있다. 건축양식은 악숨(Axum)의 전통에 포르투갈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어 복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곤다르의 유적지는 랄리벨라와 마찬가지로 유네스크(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곤다르는 파실라다스(Fasiladas) 왕과 아들 요하네스(Yohannes) 1세 등 그 후계자들이 1636년부터 1864년까지 약 200여 년간 수도로서 살았던 곳이다. 파실라다스 왕은 이전의 수도였던 고르고라(Gorgora)에 말라리아가 만연하자 해발고도 2,000미터가 넘는 곤다르로 수도를 옮긴다. 곤다르는 상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좋은 요건을 갖춘 곳이었지만 천도의 이면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카톨릭교회의 유입으로 종교분쟁이 잦아져 통치가 어려워지자 파실라다스 왕은 에티오피아 정교회만을 믿는 새로운 도시 건설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마을 입구에는 파실라다스 왕의 풀장이라고 부르는 시설이 있는데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에티오피아 정교회 의식의 세례를 받아야 마을 주민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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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24: 일본/사람들2007. 11. 2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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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니아에서 온 '알리'와 오늘 점심을 같이 먹었다. 4월에 만났을 때 언제 같이 점심이나 먹지, 했었는데 서로 뭐가 그리 바빴는지 오늘에야 만나 학교 구내 식당에서 각자 돈 내고 먹었다. 파인애플 양이 많아 같이 먹자고 했더니 지네 나라에서는 파인애플은 지천이라서 별로 안좋아하는데 내가 주는 거라 먹는다며 낼름 먹는거 아닌가.

2년간 히토쓰바시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이 없어 많이 심심했단다. 그 동안 흑인이라서 차별 받은 적은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들은 차별을 했는지 모르지만 자기는 신경 안써서 잘 모르겠단다. 좋은 습관이다. 겨울이 되면 아무리 껴 입어도 대책없이 추워 그게 유학생활의 유일한 어려운 점이란다. 행복한 친구 같으니라고...

알리는 세네갈 정부에서 초청을 받아 거기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년간 연구생 과정을 거쳐 올해 4월에 히토쓰바시대학 법학과 박사과정에 입학을 했다. 중간에 프랑스로 1년간 유학도 했다면서 살짝 자랑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굴에 성실, 이렇게 써 있는 친구다. 아프리카 연구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날 보면 늘 반갑게 인사를 했었다. 현재 '세계 평화를 위한 UN의 역할'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중에 에티오피아에 있는 AU(아프리칸 연합)에서 일을 하면 좋겠단다. 혹시 에티오피아에서 나중에 만나면 서로 친하게 지내자고 그랬다.

요즘 유네스코에서 나온 자료들을 보고 있는데 꼭 보고 싶은 자료는 프랑스어로 나오는 통에 애를 먹고 있다고 그랬더니 당장 프랑스어 공부하잔다. 음...그래서 에티오피아 다녀오고 나서 문자 읽는 법부터 배우기로 했다. 오늘은 그거 기념으로 "메르씨 보꾸 Thank you very much" 와 "아나나스 a pineapple"을 배웠다. 기니아 말 몇 개랑. '안녕'은 기니아 말로 '이니케'.

'게무초'라는 사람을 안다고 했더니 기니아에서는 넘치고 넘치는 이름이 '게무초'란다. 게무초 이 친구, 지금 기니아 외교부에서 일하는데 기니아의 '철수'?

기니아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아주 작은 나라다. 국토 면적은 남북한 합친 것 보다 조금 큰 것 같다. 수도는 코나크리(Conakry). 아프리카에는 내륙국이 많은데 기니아는 복도 많지, 바다를 가지고 있다. 수도 코나크리는 항구도시다. 기니아 전체 인구는 1000만명 정도. 이슬람교가 국민의 90% 정도인데 기니아의 문화와 맞게 토착되어 율법이 그리 엄격하지 않단다. 이슬람교는 북아프리카 정도만 전파된 줄 알았는데 이미 9세기 경부터 기니아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었다고 한다. 1884년부터 1958년까지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공용어는 프랑스어다. 프랑스 통치기에 종교에 대한 문제가 없었느냐고 했더니 이렇다 할 큰 변화는 없었다고 한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소수민족이 적은 편인데 15개의 종족이 있다고 한다. 기후는 일년의 절반이 우기고, 또 절반이 건기에 기온은 22~3도에서 32~3도 사이를 왔다갔다 한단다. 현정부 관심은 오직 development라는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나면 이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 지 구분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가능하단다. 내가 몇가지만 팁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서부 아프리카 사람의 경우 피부색이 검고 일단 키가 무지하게 크단다. 알리도 187cm다. 현재 전 세계 63개국이 가입되어 있는 프랑스어권 국가연합(OIF)의 사무국장(머릿속으로 이렇게 번역이 되었는데 확실하지 않음)이 세네갈 사람이라는데 키가 2m가 넘는단다. 피부는 훨씬 더 검고. 알리도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검은 것 같은데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란다.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숲이 많은 곳에 사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키가 아주 작단다. 피부도 덜 검고. 특히 숲이 많은 지역의 사람들은 인육 이외에는 아무거나 다 먹기 때문에 딱 봐도 강단이 좋단다. 진짜 그런가? 그리고 몇 가지 더 알려줬는데 그새 다 까먹었다.

전 국민 1000만명 중에 뽑혀 머나먼 아시아까지 온 알리와 난 무슨 인연으로 또 이렇게 만나 밥을 먹으면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또 기니아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인생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바빠 오래 수다를 떨 수는 없었는데 어쨌거나 아주 유익한 점심 시간이었다.

지도출처: http://www.uneca.org/aisi/nici/country_profiles/Guinea/guineab.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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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의 뱃부에서 기차로 한 시간

츠쿠미라고 하는 재미있는 이름의 도시에서 지난 여름 한 달을 보냈다. 츠쿠미는 일본 남단 큐슈(九州) 동쪽의 오오이타현(大分県)에 있는 인구 2 3천 규모의 아주 작은 도시다. 한국인들이 온천욕을 즐기러 많이 찾는 뱃부(別府)에서 기차로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이 작은 도시에 야구장이 있어 우리나라 두산베어스가 겨울이면 전지훈련을 한다고 한다. 남쪽이라 겨울에도 날씨가 따뜻하고 눈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없지만 가족 중에 한국인과 결혼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츠쿠미는 오오이타현 내에서는 두 번째로 작은 도시인데, 호토지마(
)와 무쿠지마(無垢島)라는 두 개의 섬을 거느리고 있는 반도로, 일본내 생산량 1위를 자랑하는 석회석 광산을 보유하고 있다. 기간산업으로는 석회석 채굴 이외에 시멘트 산업, 밀감 농업, 참치로 대표되는 어업이 중심이다. 그러나 요즘은 손이 많이 가는 밀감 농사를 접고 광산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참치도 원양어선을 타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츠쿠미 대표 브랜드로서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츠쿠미의 젊은 사람들이 더 이상 배를 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요즘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초청해 2, 3년간 연수를 시켜 배에 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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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시멘트 원료로 재탄생

츠쿠미에는 일본 톱 3 규모에 해당되는 태평양 시멘트의 본사가 위치해 있다. 공장이 들어서면서 농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시멘트 회사 덕분에 츠쿠미 사람들은 쓰레기 처리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도 쓰레기 처리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츠쿠미는 가정에서 수거한 쓰레기를 소각해 시멘트 원료로 사용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면서 시민들의 쓰레기 처리에 대한 고민거리를 없애주었다.

종이류, PET, 캔류를 제외한 모든 쓰레기는 분리할 필요 없이 한꺼번에 수거를 해 가는데 이렇게 모아진 쓰레기는 전부 소각해 몇 차례의 과정을 거친 후 품질에 전혀 차이가 없는 시멘트로 만들어진다. 태평양 시멘트 회사에서는 쓰레기가 시멘트 원료로 탄생되는 과정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한국의 시멘트 회사에서도 단체 견학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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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다미 크기에 빌딩을 올린 호토지마

일본인들이 사는 집을토끼장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체를 있는 곳이 호토지마(保戶島)이다. 호토지마는 츠쿠미 시내에서 배를 타고 30 정도면 도착하는 곳이다. 섬의 토지가 넉넉하지 않아서 6조 다다미(다다미 한 장을 1조라 하며, 1조는 0.85평 정도) 크기의 넓이로 건물을 2, 3 올려서 지은 주택들이 여기저기에 가득하다. 6조 정도면 우리나라 아파트의 가장 작은 방 한 칸 정도 되는 넓이다. 집과 사이는 아주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동네를 연결하고 있다. 할머니들이 어찌나 건강하신지 바구니들을 하나씩 지고 산비탈로 연결된 골목을 쉬지도 않고 올라 다니는 모습이 눈에 자주. 경사가 높아서 머리에 이기도 힘들고 들기도 힘들어서 여기 사는 할머니들은 커다란 바구니를 만들어 그곳에 짐들을 넣어 지고 다니는 게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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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찾아오는 사람들 보다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아쉽게도 호토지마의 식당과 카페는 점점 문을 닫고 있는 추세다. 작은 섬 안에는 진자(神社)도 있고, 우리와 양식이 완전히 다른 절도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골목을 실컷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 마파도처럼 노인들만 사는 섬으로 변화가 진행 중이다.

                                                                                                            

1 3천만년 전 공룡이 살았던 무쿠지마

츠쿠미가 또 하나 보유하고 있는 무쿠지마(無垢島)는 아주 특이한 섬이다. 아직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1 3천만년 전 공룡 화석이 발견되어 학계의 연구가 한참 진행 중인 곳이다. 매년 여름에 자연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프로그램이 이 보다 더 알찰 수가 없다. 올해가 3회째로, 운영에는 큐슈의 4개 대학과 츠쿠미시가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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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쿠지마 자연학습 프로그램이 여타의 다른 체험 학습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큐슈의 4개 대학 교수진을 비롯해 환경, 천체, 지리 등 자연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4개 대학은 학점교류가 진행 중인데 여름 방학기간 2 3일 동안 무쿠지마 자연학습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대학에서 학점 이수가 가능하다. 참가 대학생들은 교육학 전공 학생들이 많은데 예비 선생님들이라서 그런지 초등학생 참가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참가가 가능하며, 참가에는 특별한 제한이 없다. 올해의 경우 135여 명이 무쿠지마를 찾아왔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이 프로그램을 취재하기 위해 오오이타의 지역신문을 비롯해 요미우리 신문, 아시히 신문 기자들까지 찾아와 함께 했다.


이 섬에는 바닷물 이외에는 물이 없기 때문에 비를 받아 가라앉혀 쓰거나 먹는 물의 경우는 전부 시내에서 배로 실어다 마시고 있다. 체험학습에 참가하기 위해 섬에 머무는 사람들은 물 한 바가지로 샤워를 마쳐야 하는 노하우를 재빨리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곳에서 태어나 섬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한 주민에게 이 곳 생활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살면 다 살아진다는 너무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섬사람들은 늘 가족같이 살아 온 경험 때문인지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고, 해수욕을 즐긴 후에는 문이 열린 집에 들어가 샤워도 가능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물이 귀한 곳이기 때문에 화장실이든 샤워실이든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섬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라서 떠나올 때쯤에는 물 한 바가지로 샤워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수에 양치질까지 끝내는 요령은 터득했다.


호토지마처럼 무쿠지마도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 이곳에 있는 중학교에는 학생이 달랑 세 명뿐이다. 이 세 명을 가르치기 위해 11명의 선생님이 근무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의 경우 선생님 한 사람이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칠 수 있지만 중학교부터는 과목들이 다양해지고 좀더 심화되기 때문에 선생님 혼자서는 무리일 수밖에 없다. 집과 학교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서인지 무쿠지마에서 학생과 선생님의 관계는 일반 학교의 사제지간과는 다르게 그냥 가족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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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역사의 센스 오도리

~~, ~~라고 하는 독특한 절구로 시작되는 센스오도리(扇子踊) 츠쿠미를 대표하는 춤이다. 오른손으로 부채를 들고 8개의 문자를 그려나가는 동작이 계속 되풀이된다. 츠쿠미에 사는 사람들 아무나 붙잡고 센스오도리에 대해 물어보면 바로 이 기본 동작이 나온다.


지금부터
400 당시 오오토모씨(大友)의 지배하에 있던 츠쿠미는 전국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참히 꺼져간 전몰용사와 농민들을 애도하기 위해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센스오도리의 기원이다. 1964년부터 시민 오도리 대회를 개최하게 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츠쿠미 센스오도리 대회>라는 이름으로 매년 8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린다. 초등학교 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1,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츠쿠민(공모를 통해 정한 이름이라고 한다.) 시민공원에 모여 똑같은 부채를 쥐고 ~~, ~~ 리듬에 맞춰 미리 만들어놓은 트랙을 돌며 몇 시간에 걸쳐 춤을 춘다.
센스오도리가 시작되기 전 며칠 동안은 시내 어디에서나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부채를 펴 들고 휘휘 돌리며 센스오도리의 기본동작을 연습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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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쿠미 먹거리

츠쿠미 하면 밀감과 참치였는데 이것이 옛말이 되면서 자랑하며 내놓을 대표 음식이 이제는 별로 없다고 현지인들은 자신없이 이야기한다. 그래도 일본 특유의 정갈한 밥상은 시내 어느 식당을 들어가도 만날 수 있다. 마구로(참치) 스테이크, 츠쿠미 아이스(밀감 쉐이크), 가보스(라임과 비슷한 일본 과일)로 만든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꼭 시식을 권한다. ‘사계라는 상호가 붙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더니 새로 개발한 마구로 짬뽕을 권하는데 나가사키에서 먹었던 나가사키 짬뽕보다 국물맛이 담백하면서도 깊었다. 츠쿠미를 찾는 분들에게 강추다.


츠쿠미는 올해 일본에서 개봉된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의 ‘22세의 이별(22)’ 로케이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자체에서 영화 제목인 ‘22세의 이별상표로 등록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가 촬영되는 동안 처음 탄생한 상품이 ‘22세의 이별이라는 동명의 치즈 케이크다. 츠쿠미 시내에 있는 시장통의 빵집 한군데에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천연 재료만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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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쿠미 찾아가는 법

운항 편수가 많지는 않지만 인천에서 오오이타현까지 직항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후쿠오카나 나가사키까지 일단 비행기로 도착해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해 움직일 수 있다. 패키지 여행 프로그램으로 뱃부까지 갔다가 온천욕을 즐기고 기차로 츠쿠미까지 이동해도 된다.


츠쿠미는 아직까지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해변도 깨끗하고 무엇보다 바닷물이 아주 맑다. 해산물이 맛있는 비결이 이 맑은 물 덕분이라고 현지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다. 1년 중 바다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가을이라고 한다.

문화공간 2007년 11월호(세종문화회관 발간)

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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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문을 나서는데 쓰레기 분리수거 하시는 청소부 아주머니가 보였다. 너무 일에 열중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칠까 하다 '오하요우 고자이마스!!'하고 크게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도 반갑게 인사를 하셔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머니가 뭘 잊었다가 생각났다는듯이 내게 다가오셨다. 아주 좋은 걸 보여주겠단다. 그리고 계단참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저걸 보란다. 아, 후지산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떠날 때 혹은 도쿄로 돌아 올 때 하늘에서만 봤던 후지산이 내 앞에 보였다.

날씨가 아주 좋으면 기숙사 B동 6층 이상의 방에서 후지산이 보이는데 방의 위치상 내 방이 후지산 구경하기에 제일 좋은 자리란다. 두달이 다 되어가는 동안 그걸 몰랐다. 내 방에서는 야경만 근사한 줄 알았는데 만년설에 덮인 후지산을 병풍으로 두고 살고 있었다. 다시 방에 들어가 베란다 창문을 열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남향이 아니라고 속으로 좀 투덜댔었는데 신은 언제나 내 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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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북경 평양식당 해당화

북경 유학 시절, 친구를 통해 평양식당인 ‘해당화’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우리 돈으로 천 원도 안 되는 몇 원짜리 중국 음식에 길들여져 있다가 해당화에서 먹었던 북한 음식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해당화'의 ‘가재미 식혜’는 제일 좋아하는 음식 목록에 올려 놓고 있다.


북경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가끔 가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값만 비싸고 한국에서 먹었던 맛과 달라서 갈 때마다 후회를 했던 기억이 난다. 중국에서 운영하는 한국 식당은 대부분 주인만 한국 사람이고 주방에 있는 사람들이나 종업원들이 조선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들은 한국 사람과 말은 통하지만 그들은 한국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한국식 서비스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낯선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음식 맛도 대부분 중국에서 생산되는 재료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변형된 맛, 그러니까 중국스러운 비빔밥에 중국스러운 불고기가 나온다.


그러나 ‘해당화’는 달랐다. 북한에서 직접 들여온 재료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두릅나물’ 같은 경우는 향이 얼마나 진한지 모른다. ‘평양 통김치’는 한국에서 먹어 본 김치 맛 그 이상이었다. 서비스 하는 종업원들도 전부 북한의 고려호텔을 비롯한 고급 호텔에서 소양교육을 받고 파견된 사람들로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북한을 느낄 수 있다. 음식 이름들도 백두산 들쭉술, 단고기무침 등 ‘조선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해당화'를 찾는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 보다, 중국 사람들 보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한국 사람들이 '해당화'를 많이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북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해당화'의 음식 맛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음식점에서 맛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던가.

북한 문화를 파는 해당화
'해당화'는 대개 저녁 9시 반까지 영업을 한다. 손님이 많은 시간에는 홀에서 서비스를 하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종업원 몇 명이 무대에 올라가 기타와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반주에 맞춰 귀에 익은 ‘반갑습네다’ 같은 북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해당화' 버전으로 부르는 ‘아침이슬’은 들을 때마다 묘한 감동이 밀려 온다. 가끔씩 흥에 취한 한국 손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대에 올라가 같이 부르겠다고 마이크를 달라며 성화를 대거나 사진을 찍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도 일종의 공연이다. 공연이 끝나고 정중히 양해를 구해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영 보기에 민망하다.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식당, 특히 중국에 나가 있는 한국 식당은 ‘해당화’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의 비용 몇 푼을 아끼려고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곳에서 내용은 빠진 겉만 번지르르한 한국 식당이 너무 많다. 한국 음식이 그리워 마음 먹고 찾아간 식당인데 전혀 한국 음식 맛을 느낄 수가 없을 때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차라리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렴하게 먹고 나오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말이다. 한국 식당을 이용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중국에서 뭘 크게 기대하겠느냐는 거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 식당을 이용하는 중국인이나 다른 외국인이 이런 음식 맛을 한국 맛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기와 지붕에 상호만 한글 식당이면 뭐하나. 안에 들어가면 조선족 주방장이 중국산 재료로 만든 음식이 나오고, 조선족이 중국식으로 서비스를 하는데 그게 어디 한국 식당인가.

‘해당화’는 북한 음식만 파는 곳이 아니다. 북한 문화를 파는 곳이다. 우리 눈에는 낯설고 때론 촌스럽기까지 한 것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이다. 북한 문화. 우리로서는 ‘북한스럽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문화를 그들은 철저히 돈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들이다. GDP는 우리가 월등히 높지만, 문화를 파는 재주에 관한한 ‘해당화’의 그들이 한 수 위로 보인다. 오늘도 한국 사람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그들은 찌개를 나르다 기타를 메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반갑습네다’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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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채널24: 한국/사람들2007. 11. 9. 12:35
자전거 패달을 힘껏 밟아 학교에 도착했는데 외국인 선생이 감기 때문에 학교에 못나와 휴강한다는 메시지가 교실문 앞에 붙어 있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데 꼭 해야 할 일을 몸이 아파 못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이제 몸 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지에 시간이 떠 버려서 그 기념으로 포스팅한다. 어제에 이어 내가 만난 아름다운(내 맘이다.) 인연 3탄이다.

일본국제교류기금 초청으로 2005년 10월부터 2006년 5월까지 간사이에서 체류하면서 일본 축제 공부를 아주 실컷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이었다. 3개월 후인 8월에는 에티오피아에 갈 계획이라 이 기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하던 참에 화천 나라축제조직위 기획팀장인 어랍쇼라는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사람이 많으니 특별히 할 일은 없지만 알바거리는 있단다. 그렇게 해서 강원도 화천에 가게 됐다.

정말 특별히 할 일은 없었지만 아주 바빴고 그 와중에 내가 꼭 해야하고 나밖에 못하는 일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았다. 화천 사람들은 어랍쇼를 비롯해 마치 동화 속에 있는 사람들 같은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 어디에도 없고 화천에만 있는 그런 사람들 덕분에 나의 3개월은 참으로 유익했고 또 행복했다.

화천에 갈 때까지만 해도 내가 여관살이를 그렇게 오래할 줄 몰랐다. 콘서트를 할 때는 유명 아티스트들과 함께 가기 때문에 지역에서 제일 좋은 호텔에서 머물렀는데 화천엔 호텔 자체가 없었다. 장급 여관이라고 강조를 했지만 나한테 여관은 참으로 낯선 곳이었다. 군장병들이 군민 수보다 많은 화천이라는데 여관을 드나드는 군인아저씨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어쨌거나 알바생 주제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그냥 조직위에서 정해주는 <용화장>이라는 여관에 짐을 풀었다. 조직위에서도 나 같은 사람을 채용해 쓰는 게 처음이라 처우를 어떻게 해 줘야 할 지 모르겠다면서 나한테 물을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여관 독방도 과분했던 것 같다.

그냥 배낭여행을 하는 중에 잠시 들른 곳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면서 여관살이가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장님(주인 아주머니)이 어찌나 친절하신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세탁물이 싹 개어져 방 앞에 놓여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꼭 먹어보라고 방문을 두드리셨다. 여관의 벽 때문에 인터넷 사용하는데 무려 한달이 걸렸고 내가 지내던 방이 좀 습한 것 말고는 여관에서 석달을 보내는 데 큰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일이 잘 끝나서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화천 군수님이 밥을 사신다고 하셨는데 그냥 순대국밥 한 그릇으로 떼우게 되었고, 그러고나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릴 생각이었는데 그날 하필 춘천으로 나들이를 가셨단다. 졸지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핸드폰으로 대신하고 쓰던 짐들은 알아서 처분해 주세요, 하고 화천을 떠났다.

조직위 장석범 본부장님이 겨울에 또 올거지, 이 말씀을 안 하셨으면 다시 화천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에티오피아에 있으면서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 결국 작년 겨울에 다시 화천으로 향했다. 여름의 쪽배축제보다 규모가 훨씬 큰 대한민국 제1의 겨울축제인 산천어축제를 홍보하는 일이 내가 할 일이었다. 조직위가 아닌 화천군에서 지난 여름에 불편하셨던 것 같은데 이번 겨울에는 다른 곳에서 묵는 게 어떠냐고 의향을 물어와 춥지만 않으면 그냥 <용화장>에서 묵을 거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하고 동서울에서 버스를 탔다.

화천에 가던 날 눈이 살짝 내렸던 것도 같고 아무튼 그날 몹시 추웠다. 조직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용화장>으로 귀가를 했다. 아주머니가 어찌나 반가워 하시던지 그 겨울에 대한 예감이 아주 좋았다. 여름에 책상이 없어서 밥상을 하나 사서 노트북을 올려놓고 사용했는데 그걸 박스에서 꺼내 주시면서 다시 오실 것 같아 보관해 두고 있었다, 고 하셔서 감동을 흠뻑 먹었다. 또 내가 쓰던 샴푸며 비누며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것도 그대로 주시는 게 아닌가. 감동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아침 8시만 되면 전화를 해서 얼른 와서 한술 뜨고 가쇼, 이 말씀을 하고는 대답도 안 듣고 끊으시는 통에 일주일을 버티다 여관집 안방에 들어가 아침까지 얻어 먹게 되었다. 내 밥그릇의 밥은 늘 막내 아들 밥보다 양이 많았는데 바깥 밥은 기름기를 걷어내서 영양가가 없으니 밖에서는 무조건 많이 먹어둬야 하니까 사양하지 말라시며 늘 산처럼 밥을 퍼 주셨다. 밥그릇에 밥이 거의 비워질 때쯤이면 아주머니는 옆에서 요쿠르트랑 이런저런 과일을 섞은 야채주스를 만드신다. 내가 밥상에 숟가락을 딱 놓으면 주스 한잔에 알로에 정제된 걸 더도 덜도 아닌 딱 여섯 알을 세어서 주셨다. 그리고 출근을 했다.

시골에서 고생한다고 친구들이 자원방래 할 때가 몇 번 있었는데 여관에서의 아침 식사는 친구들에게도 제공이 되었다. 이 친구들 왈, 여관에서 아침까지 얻어 먹을 줄 몰랐다면서 넌 어딜 가도 너한테 맞춰서 생활을 하는구나, 이러는 게 아닌가. 봉황이었던 사람들을 닭으로 만드는 건 많이 봤는데 넌 여관도 호텔로 만드는구나, 라고 덧붙이면서...

날씨가 많이 춥지 않아 축제가 잘 될 지 걱정을 했는데 산천어축제는 올해도 방문객 100만이란 숫자를 아주 가볍게 넘겼고 전세계 수십여개의 미디어에 화천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홍보하면서 한국의 재미있는 겨울 축제로 대서특필 되었다. 축제 일도 재미있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 화천에서의 겨울나기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용화장 사장님을 다시 만나 따뜻한 인간미를 체험할 수 있어 참으로 좋았다. 서울로 돌아와 감사하다는 기념으로 뭔가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칼날 튼튼한 믹서기를 하나 사서 택배로 보내드렸다. 다시 올거지유, 하셨는데 그냥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화천 갈 일을 못 만들었고 여전히 난 일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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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채널24: 일본/사람들2007. 11. 8. 21:08

작년에 에티오피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이었다.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을 아디스 아바바에 하나 뿐인 한국 식당 '레인보우'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시간 맞춰 나갔는데 왠걸, 다들 30분 이상씩 지각을 하는 바람에 혼자 예약석에 멍청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각선으로 보이는 테이블에 정말 아무 대화도 없이 메뉴판만 들여다보며 앉아 있는 아시아인 둘이 있었다.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아니면 일본인인지 도무지 감을 못 잡았다. 그러다 일행들이 와서 왁자지껄 떠들면서 아무튼 실컷 먹고 일어나다가 대각선 테이블로 눈이 갔다. 일본인들이었다. 내 일행 중에 메뉴판만 읽고 있던 아시아인들의 일행을 아는 사람들이 있어 졸지에 서로 인사를 하게 됐고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짐을 싸기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떠나는 날 오전에 전화가 왔다.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주소만 들고 무작정 찾아 갔는데 거기에 그 아시아인 둘이 있는 거다. 세계 배낭여행 중인 일본인 여대생들이었다. 하나는 와세다대, 또 하나는 츠쿠바대에 재학 중이었다. 국제관계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는데 아프리카를 다 훑고 이제 중동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이야기 하던 중에 내가 유학을 준비 중인데 학교를 교토대에서 도쿄에 있는 곳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다, 도쿄에 어디가 내가 전공하려는 학교로 적당한 지 정보를 좀 달라, 이런 부탁을 하게 됐다. 대뜸 지금 다니고 있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을 추천해 주는 게 아닌가. 당시는 정말 듣도보도 못한 웃긴 이름의 대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강원도 화천으로 가서 산천어축제 홍보팀장으로 정말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지내면서 퇴근 후에는 유학 갈 준비를 했다. 남들은 몇 년을 준비해서 유학을 떠나는데 난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그간 준비한 교토대에는 못가게 되어 미안하다는 연락을 정중히 해 놓고 도쿄에 있는 학교를 거의 날마다 검색해서 결국 찾아 낸 게 신기하게도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이었다. 당시는 몰랐는데 내 지도교수는 위키피디아 검색으로도 튀어나오는 아프리카 전문학자이다. 한국에서는 발음하기도 힘든 이 학교가 일본에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다니는 명문학교라는 것도 오고 나서야 알았다. 분위기는 우리나라 카이스트나 포항공대 이미지다. 지도교수와 첫 면담하는 자리에서 바보처럼 이 학교가 그렇게 유명하다면서요, 이런 질문을 날렸다. 몹시 난처해 하면서 많이 유명하지, 이러시는 게 아닌가. 내 지도 교수는 정치하는 것도 싫어하고 학생밖에 모르는, 그냥 현대판 선비 이미지의 교수다. 이것도 다 내 복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 선배가 얘기하기를 내가 합격했다는 소식에 지도교수가 몹시 기뻐했다는데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지난 10월 31일이 입학금, 수업료 마감일이었다. 이 학교는 입학금 수업료를 좀 늦게내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버텼는데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다는 최후의 통첩이 날라왔다. 유학 와서 생활비 대느라 아주 정신이 없어 그냥 입학금 수업료는 남의 이야기처럼 살았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게 됐다. 동전까지 탈탈 털어 일단 입학금이 아닌 수업료를 먼저 냈다. 그걸 내면 이번 학기 수업료 면제 대상 심사를 받을 수 있단다. 그런데 사실 순서로 치면 입학금을 먼저 내야 말이 되는 거 아닌가. 아무튼 그냥 학교를 때려 칠 판이라고 생각해서 내 맘대로 그래버렸다.

지도교수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는데 뜬금없이 상담을 하고 싶으니 오란다. 뭐 때문일까 머리를 굴리다 갔더니 입학금 얘기를 하신다. 바보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그냥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그랬다. 그만 두면? 돈 벌어서 다시 오던지 아니면 뭐 다른 일을 해야겠죠. 지금까지 딴 학점이랑 아깝지 않아? 방법이 없네요.

10월 31일 오전에 다시 오라고 하셔서 갔더니 잔돈까지 딱 맞춰서 입학금 금액을 내 손에 쥐어주시는 게 아닌가. 일단 이걸로 입학금을 내고 그 다음을 생각하자고 그러셨다. 그러면서 입학금 내러 가면서 돈 잃어버리지 않게 가방에 잘 넣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난 또 바보처럼 그 앞에서 웃고 말았다. 하도 걱정을 하셔서 영수증을 들고 지도교수를 다시 찾아 갔다. 돈 잘 냈다고. 돈을 어떻게 갚을까요, 조심스럽게 여쭈었더니 통장으로 입금하면 수수료 드니까 매달 말일에 직접 10,000엔씩 갚으란다. 곧 받게 될 장학금 두달만 모으면 갚을 수 있다는 것 아실 텐데도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별로 부끄럽지도 않았고, 알았다고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자리를 떠났다.

교수한테도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고 나한테도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다. 그냥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부모님한테 받은 사람 같았다. 이 교수와 나와의 만남도 분명 인연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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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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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의 교역 중심지 악숨

3세기에 세상을 움직이는 4 제국이 있었으니 바로 로마, 중국, 페르시아, 그리고 오늘 이야기 하려는 악숨제국이다. 앞의 나라는 비교적 익숙하지만 마지막의 악숨은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악숨(Axum) 9세기까지 홍해를 지배한 악숨제국의 수도로 당시 아프리카 최대의 교역중심지였고, 지금의 에티오피아에 똑같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악숨의 오늘은 조금 초라한 모습이지만, 3,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의 에티오피아의 수도로 찬란한 문화의 도시였다. 악숨은 1세기경부터 로마제국, 비잔틴제국과 어깨를 견주었, 홍해 연안을 중심으로 무역으로 번성할 수 있었.

 

에티오피아가 지금은 바다를 잃고 내륙국 신세로 전락했지만 4세기 에자나왕의 시대에는 누비아(현재의 수단 지역) 예멘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의 시대를 구가할 있었다. 사실을 증명하는 석비가 1980년대에 농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석비의 내용은 에자나왕이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정복했던 일을 신에 감사한다는 것으로 그리스어, 아랍어, 기에즈어 3개국어로 씌어있다.

 

전설에 따르면 모세의 십계 석판이 들어 있는계약의 상자 악숨의 교회에 안치되어있다고 한다. 계약의 상자는 에티오피아 초대 왕인 메넬리크 1세가 이스라엘에서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주인공이 찾고 있는 법궤이기도 하다

 

악숨의 세계문화유산오벨리스크

본래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탑인 오벨리스크가 에티오피아 악숨에도 있다. 에티오피아의 오벨리스크는 크기와 무게에 있어 이집트의 것을 능가한다. 악숨의 상징이기도 한 오벨리스크는 왕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비석으로 악숨제국 만들어졌다. 형태는 단순하고 몸체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은 이집트의 것들과는 다르다. 악숨에는 규모가 대형 오벨리스크가 64, 중형 오벨리스크가 246, 그리고 작은 크기의 오벨리스크들이 산재해 있으며, 이 오벨리스크들은 198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오벨리스크는 장의 화강암을 조각해 만들었고 지하에는 무덤이 있다. 오벨리스크 가장 것은 높이가 33m, 무게가 100톤에 이르는데 이탈리아 침략시기에 붕괴되어 동강으로 나뉘어 쓰러져 있다. 에티오피아에는 아직 이걸 세울 힘이 없어 보인다. 번째로 것은 높이 24m 무게가 60톤이 나가는 1937 무솔리니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코끼리 500마리를 동원해 빼앗아갔다. 그러나 오벨리스크는 약탈된 지 68년만인 2005년에 러시아산 안티노프 124 화물기에 실려 악숨으로 돌아왔다. 당초 그 해 가을부터 제자리를 찾는 공사를 시작한다는 발표가 있었는데 2006년 현재 터 파기 공사가 진행 중이다. 번째로 것은 높이 23미터로 시온의 마리아 교회 근처 광장에서도 보인다. 오벨리스크들은 지금의 자리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산에서 돌을 가공하여 코끼리와 인력을 동원해 세웠다고 한다.

2007.10.30 서울신문 <에티오피아를 가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030500001&spage=1

Posted by 윤오순
채널24: 일본/사람들2007. 10. 21. 15:55

일본에서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을 만났다. <오체불만족>의 주인공이자 저자인 오토다케는 사지가 아예 없지만 이 사람은 있어도 사용을 못하는 사람이다. 머리는 비상해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윈도우 오피스 프로그램을 다 다룬다. 컴퓨터는 독특한 키보드를 사용하는데 내겐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어머니랑 같이 살고 있는데 어머니의 상황도 거의 비슷하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혼자 식사도 못하신다. 물론 화장실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갈 수 없다. 문득 사람은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혼자 먹지도 못하고 볼 일도 못 보고 사는 이유를 전혀 모를 때도 숨이 붙어있으면 그냥 살아야 하나, 하면서...

집안에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하나 있으면 가정이 완전히 풍비박산 나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한국이라면 가족의 도움없이 이런 사람들이 살기 힘들 텐데 일본은 이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어 부럽다. 집에는 전문 스탭이 항상 상주한다. 하다 못해 청소를 하고 밥을 하러 오는 사람들도 자격증을 갖추어야 한다. 최근에 일본도 젊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귀찮아 해 필리핀 사람들이 이 일에 많이 뛰어들고 있다고 한다.

자격도 자격이지만 마음 없이 이 일을 하긴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옆에서 보살피는 사람들을 보면 감동이 물밀듯 밀려온다. 이 사람 집에 오는 사람들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가족에게 하듯이  이 두 사람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각설하고, 자격도 없는 내가 이 사람들을 돕게 되었다. 장학금 타게 된 기념으로 시작했는데 '참 잘했어요' 라는 도장을 받아도 될 것 같다. 일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늘 기분이 좋다. 애초 자원봉사를 생각했는데 '스티븐 호킹'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해서 졸지에 아르바이트가 되어버렸다. 일을 시작한 지 한달이 채 안됐는데 내가 가는 날은 이 사람들이 밥도 안 먹고 기다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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